이 글은 데이비드 홉킨스(David Hopkins)라는 작가가 2016년 3월에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이런 글이 있는 줄 몰랐다가 최근 우연히 읽고 전문을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오래전에 이 시트콤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거든요.

게다가 이 글은 '트럼프 현상'이 본격화되기 전에 나온 글입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언급도 되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글이 나온 이후에 몇 년 동안 일어날 일들을 마치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읽힙니다. 글 마지막에 나오는 백신에 대한 언급을 보면서 "예언자가 아무리 경고해도 세상은 듣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꼭 공유하고 싶었던 글이니 한 번 읽어보시죠.


나와 내 아내가 요즘 넷플릭스에서 몰아보기를 하고 있는 인기 프로그램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느 가정적인 사람의 이야기다. 과학을 하는 사람이고, 잘못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천재다. 그는 독단에 빠져 점점 미쳐가며 절망에 빠지고, 삶에 불운이 겹치면서 괴물이 되어간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프렌즈(Friends)'이고, 비극적 주인공은 로스 겔러(Ross Geller)다.

여러분은 이 프로그램을 코미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걸 보면서 웃지 못하겠다. 내 눈에 '프렌즈'는 미국이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받아들인 신호탄이고, 그 안에서는 재능 많고 지적인 한 남자가 멍청한 친구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여러분이 나의 관점에 동의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라이브 스튜디오에서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끊임없는 웃음소리는 여러분과 나의 반응은 무의미하며 불필요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프렌즈'의 주제가도 불길한 예감을 전달한다. 삶은 원래 우리를 속이고, 커리어를 추구하는 건 우스운 일이며, 가난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사랑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 언제나 바보 같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참고로, 프렌즈 주제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So no one told you life was gonna be this way / Your job's a joke, you're broke / Your love life's DOA / It's like you're always stuck in second gear / When it hasn't been your day, your week, your month, or even your year/ But I'll be there for you 삶이 이럴 거라고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지 / 한심한 직업을 갖고 있고, 가진 돈은 없고 / 사랑은 꿈도 꿀 수 없고 / 항상 느린 2단 기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지 / 오늘을, 이번 주를, 이번 달을, 아니 올해를 망쳤어도 / 그래도 나는 네 옆에 있어줄 게

이 시트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집에 TV가 있었다면 '프렌즈'를 기억할 거다. '프렌즈'는 매주 목요일 황금시간대에 "절대 놓치면 안 되는 프로그램"이었고, 캐스팅 담당자가 고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들만 모아둔 시트콤이었다. 모두 젊었고, 모두 중산층이었고, 모두 백인이었고, 모두 이성애자였으며, 모두 매력적이었(고 동시에 친근했)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는 평범한 캐릭터들이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페르소나를 갖고 있었다. 조이는 똑똑하지 못한 친구였고, 챈들러는 비꼬는 말을 잘했고, 모니카는 강박 신경증적인(obsessive-compulsive) 성격을 갖고 있었고, 피비는 히피였고, 레이첼은.. 레이첼은 어땠더라.. 쇼핑을 좋아했다. 그리고 로스가 있었다. 로스는 지적이고 낭만적인 인물이었다.

'프렌즈'의 관객들–약 5천250만 명이 시청했다–은 결국 로스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만, 사실 이 시트콤은 처음부터 다른 친구들이 로스에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가령 첫 에피소드에서 조이는 "쟤가 인사하는 소리만 들어도 자살하고 싶네"라고 말한다.) 그 정도가 아니다. 로스가 말을–자신의 관심사나 연구, 아이디어 등에 대해–꺼내기만 하면 첫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친구들" 중 하나가 한숨을 쉬거나, 로스가 얼마나 지루한 사람인지, 똑똑하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 것이지, 혹은 아무도 (그의 말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한다. 바로 그때 스튜디오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나온다. 이런 농담이 10개의 시즌 동안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 나왔다. 그러니 로스가 미치는 게 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

그리고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우리의 영웅은 피할 수 없는 예언에 갇혀있다. 이 쇼의 제작자들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음성처럼 로스는 결국 쇼핑을 좋아하는 레이철과 맺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솔직히 로스는 더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었다.

왜 로스에 이런 동정심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프렌즈'는 2004년에 종영되었다. 바로 그 해에 페이스북이 시작되었고, 조지 W.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다. 그 해는 리얼리티 쇼가 대중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한 해이고, '아메리칸 아이돌'이 등장해서 그 후로 8년 동안 시청률 1위를 놓치지 않게 된다. 그리고 패리스 힐튼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시작하고 자서전을 발간한 것도 같은 2004년이다. 조이 트리비아니는 자신만의 시트콤–프렌즈의 속편(spin-off)–을 갖게 되었다. 2004년은 우리가 완전히 포기하고 무지함(stupidity)을 하나의 가치로 받아들인 해다. 그린데이(Green Day, 미국의 펑크록 밴드. 미국 문화를 비판하는 노래를 많이 부른다–옮긴이)에게 한 번 물어보라. 그들이 2004년에 발표한 앨범 'American Idiot(미국의 바보)'는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앨범상을 받았다. 이 이상 완벽한 타이밍이 있을까? 로스를 거부한 것은 많은 미국인들이 이성의 목소리를 들으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숨을 쉬던 바로 그때였다.

그렇다. '프렌즈'라는 시트콤이 서구 문명의 몰락을 불러왔다는 게 나의 이론이다. 이렇게 말하면 정신 나갔다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로스의 말을 빌면 "오, 내가? 내가 그렇다고? 내가 지금 미쳐가고 있는 건가? 내가 지금 정신이 나가고 있는 거냐고!" '프렌즈'의 파일럿 에피소드에 실렸던 노래는 R.E.M.의 노래 "It’s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And I Feel Fine)." (우리가 아는 세상의 종말 (그런데 난 아무렇지 않아))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종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행복한 곡조를 갖고 있어서 대부분 눈치 채지 못했다.

2004년에 나는 교사였다. 나는 근무하던 학교에서 체스 클럽의 코치였는데, 그 클럽의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클럽에 속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아이들을 모두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똑똑하고 엄청난 너드(nerd, 특정 주제에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갖고 있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옮긴이)였던 체스 클럽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적대적이고 비우호적인 환경에 처해있었다. 체스 클럽은 매일 점심시간에 내 교실에서 모임을 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교실 밖에서 모임을 끝내고 나오는 아이들을 기다렸다가 괴롭혔다. 나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불리(bully,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옮긴이)의 천적이자 너드의 보호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장담컨대, 불리들이 아무리 무서워도 '홉킨스 선생님'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적인 사람들은 사회에서 항상 핍박을 받아왔고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받아왔을지 몰라도, 당시 나는 그런 일이 최악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지한 토론과 정치적 담론은 소셜미디어에서의 상호 작용으로 대체되었고, 정치인들은 함께 맥주를 마실 만한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평가되었으며, 과학적 의견 일치는 부정되었고, 과학적 연구에 대한 지원은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관심은 진지한 저널리즘에서 셀렙들에 대한 가십 기사로 옮겨 갔다.

CNN.com의 헤드라인에서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의 엉덩이를 보게 되면서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어쩌면 해로울 게 없는 재미일지 모른다. 라이브 스튜디오에서 방청객이 별생각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웃는 것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우리 문화 내에 지적인 호기심을 가꾸는 작업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다는 진지한 걱정을 한다.

최악의 프로그램이라는 비판과 큰 인기를 동시에 얻은 리얼리티 쇼 '저지 쇼어'

다행인 것은 이런 흐름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 "그걸 알아?"라는 말로 문장을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로스 같은 사람들이 세상이 있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체스 클럽에서 만났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그들은 미술관에 숨어있고, 중고책 서점에 웅크리고 있고, 공공 도서관이나 커피점에서 서로를 흘끗 바라보고, 학교와 커뮤니티 칼리지, 대학교를 돌아다닌다.

로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그는 이성을 잃게 되었고, 나중에는 거슬리는 캐릭터가 된 게 사실이다.

그럼 우리는 이런 한심하고 멍청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훌륭한 교사는 이럴 때 아이디어를 몇 개 가져오는 법이다.

첫째: 제발 책 좀 읽자

현대 문화가 공허한 것들로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때 이를 잠시 제쳐두고 소설책에 깊숙이 빠져들면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당신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경험, 새로운 관점에 스스로를 개방하게 된다. 이는 인내심과 정신집중(mindfulness)의 실험이다. 뉴욕 뉴스쿨 대학교의 사회연구소(NSSR)에 따르면 문학작품을 읽으면 공감능력이 좋아진다. 사실이다. 책을 읽으면 덜 재수 없는 인간(jerk)이 된다. 그러니 더 자주 읽고, 어려운 책을 읽으라. 논쟁이 되는 책을 읽으라. 울게 만드는 책을 읽으라. 재미있는 걸 읽어도 좋다. 하지만 뭐라도 읽으라.

둘째: 뭐라도 좀 배우라

당신의 두뇌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두뇌에 양식을 주라. 새로운 것을 배우라. 진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너무 복잡해서 고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가난은 구할 수 없고,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이해하기 너무 어렵고, 공교육은 무너졌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그런 대화에 끼어들 수 있게 자신을 가르치라. 과학적인 것을 배우고, 수학적인 것을 배우라. 철학을 탐구하고, 고생물학(로스의 전공 분야–옮긴이)을 공부하고, 외국어를 배우라. 그 언어에 유창하게 되는 걸 목표로 할 필요도 없다. 몇 개의 단어라도 머리에 넣으라. 교육적인 팟캐스트를 들으라. 하버드, 예일, 콜럼비아, 스탠포드 같은 대학교의 교수들은 온라인에서 무료로 강의를 제공한다. 당신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교사를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누군가에게서 '멍청하다'라는 말을 들은 학생에게 '너는 똑똑하다'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셋째: 물건 좀 그만 사라

이건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소비문화(consumer culture)와 바보 문화(idiot culture)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삶을 단순화하라. 무지(idiocy)가 우리의 문화 지평을 지배하는 이유는 무지가 나이키의 테니스화와 맥도날드의 빅맥을 더 많이 팔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집에 어떤 물건을 가져올지를 깊이 생각하면 공허한 충동에 휘둘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너드를 지켜라

시애틀에 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한 명이 빌 & 멜린다 재단을 통해 미국의 그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세상의 가난과 기아, 질병을 없앤다. 너드는 백신을 만들고, 너드 엔지니어는 다리와 도로를 만든다. 너드는 교사가 되고 도서관 사서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똑똑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또 저런 소리를 한다'라고 한숨을 쉬는 사회 앞에서 주눅이 들게 해서는 안된다. 로스에게는 더 나은 친구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