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조금 다른 버전이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아직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 그의 ‘점심식사 행보’가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신문에서는 당선자가 “도보로 이동해 근처 김치찌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라면서 같은 식당 내 다른 테이블에서는 시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상세하게 보도했다.

일부에서는 보수 매체가 보수당 대통령 당선자 행보를 지나치게 보도하는 것이 “우상화”의 소지까지 보인다며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보수 신문들만 그의 점심식사 일정을 보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정은 당선자 비서실이 미리 언론에 알린 후에 이뤄지는 공개 일정으로, 당선자가 누구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지 알고 싶을 기자들로서는 취재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흘 연속으로 점심식사 장면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마치 과거의 “땡전뉴스(정각에 나오는 뉴스의 첫 소식으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일정을 이야기하던 과거 세태를 풍자한 단어)”를 떠올리게 됐고, “당선자의 개인 일상을 보도하는 건 ‘윤비어천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곰탕, 짬뽕, 피자, 육개장 처럼 식사 메뉴를 꼼꼼하게 보도하거나, 같이 식사하는 사람에게 국자로 김치찌개를 퍼주는 모습에서 당선자 태도를 설명하는 기사는 그를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가 보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몇몇 매체에서도 지적했듯 이와 비슷한 보도는 문재인 전 대통령 때에도 없었던 게 아니다. 취임 직후 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참모들과 식사를 마친 후 종이컵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일제히 양복 상의를 팔에 걸친 채 셔츠 바람으로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은 큰 화제가 됐다. 대통령과 고위 관료가 자신이 마실 커피를 직접 들고 걸어가는 장면을 두고 “탈권위 행보”라는 평가도 받았다. 물론 이 역시 언론사가 사진을 찍기 좋게 일정을 공개한 것이었고, 이 모습을 좋아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시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왜 각 비서실이 기획한 공개 일정이 왜 굳이 김치찌개였고, 커피였을까? 이 둘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김치찌개 식당’이라는 이미지는 수십년 역사를 가진 전통적인 느낌을 준다면, 테이크아웃 커피는 비교적 근래에 등장해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즐기는 음료다. 결국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더 익숙한 기호(嗜好), 혹은 기호(記號)에 맞췄다고 보는 게 맞다. “나는 당신과 동일한 문화, 비슷한 생활 양식을 갖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미국에서 정치인들이 이런 행동을 가장 노골적으로 하는 때가 바로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매년 8월에 열리는 ‘아이오와 스테이트 페어(Iowa State Fair)’ 시기다. 아이오와는 농업으로 유명한 미국 중서부를 대표하는 주다. 아이오와 최대 도시인 디모인에서 열리는 이 연례행사는 각종 가축의 크기를 경쟁하는 콘테스트, 나무 패기 콘테스트, 파이 먹기 콘테스트 등이 벌어진다. 미국 시골의 전통 장터 축제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장터에서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아이오와의 내로라하는 요리사들이 각종 음식을 만들어 팔고 맛으로 경쟁한다.

2020년 민주당 경선주자 피트 부테제지의 먹는 모습은 따로 기사화될 만큼 대단했다. 사진 위주의 기사이니 꼭 한 번 보시길.

그런데 왜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 대선은 선거일보다 약 1년 반 정도 일찍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2024년 11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면, 두 당은 그 해 2월부터 시작되는 당내 경선을 통해 후보를 결정한다. 이 경선은 각 주별로 순차적으로, 때로는 몇 개의 주가 함께 치르는데 이 경선을 처음 시작하는 주는 아이오와(2월3일)로 정해져 있다. 말 그대로 “스타트를 끊는” 경선이다 보니 이곳에서 승리하거나 선전하는 후보는 언론 관심을 집중적으로 끌 수 있기 때문에 ‘바람몰이’에서 유리하게 된다.

따라서 대선에 관심이 있는 정치인들은 아이오와를 자주 들락거리고, 대선에 출마하기로 결심을 굳힌 정치인들은 아예 1, 2년 전부터 캠프를 차리고 운동원들이 일일이 유권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캔버싱(canvassing)’을 한다. 물론 정치인 본인은 일정상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지만, 아이오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행사가 있다면 반드시 찾아가서 ‘얼굴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렇게 가야 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가 대선 1년 전 8월에 열리는 아이오와 스테이트 페어인 것.

How the Corn Dog Became the Must-Eat Food of American Presidential Candidates
A long time favorite of state fairs, the corn dog represents Americana and, quite possibly, a way to the White House

특히 이곳에서는 미국 서민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인 콘독(corn dog)을 먹어야 한다는 ‘룰 아닌 룰’이 있다. 우리나라 핫도그에 해당하는 이 음식은 기름에 튀긴 거라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지만, 이미 모든 (전국/중앙 정치를 하려는) 정치인의 통과의례가 됐기 때문에 그곳까지 가서 콘독을 먹지 않는 정치인은 대중에 자신을 알릴 생각이 전혀 없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결국 모든 후보들이 그곳에서 콘독을 먹는 장면을 보여준다. 한국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을 찾아 떡볶이나 순대, 우동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도 이런 정서가 있기 때문에 정치인이 새로운 음식이나 음료를 먹는 것이 대중의 관심 혹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유명한 예가 ‘라떼 리버럴(진보)’이라는 표현이다. 정확하게 언제, 어떤 이유로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대개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시절(2009∼2017)에 테이크아웃 커피컵을 자주 들고 다녔던 것을 두고 보수 진영에서 만들어냈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다.

미국인들은 ‘다이너(diner)’라 불리는 서민식당, 혹은 던킨도너츠 같은 곳에서 파는 값싼 드립 커피를 주로 마셨는데, 스타벅스를 필두로 등장한 새로운 커피 매장이 2000만원 가까이 하는 스위스제 고급 커피메이커를 갖추고 우유 거품이 들어간 라떼처럼 비싸고 다양한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커피는 대도시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먼저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미국 대도시엔 대개 진보적인 유권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스타벅스 라떼를 마시는 사람=민주당 지지자’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를 발견한 공화당 선거 전략가들은 이런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정부를 확대하고, 라떼를 마시고, 스시를 먹고, 볼보 승용차를 타면서, 뉴욕타임즈를 읽고, 바디 피어싱을 하고, 헐리우드를 좋아하는 진보주의자들”이라는 문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문 전 대통령과 참모들이 테이크아웃 컵에 어떤 커피를 담았는지는 모르지만, 일부에서 “오바마/미국 진보 흉내를 낸다”는 비아냥이 나왔던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진보적 성향의 후보 하워드 딘을 문화적 정체성으로 공격하는 정치 홍보물

하지만 결국 정치인의 문화적 정체성은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들과 가까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문 전 대통령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직접 들고 다니며 마시든, 윤 대통령이 앞 사람에게 김치찌개를 퍼주든 평소 자신이 하는 행동이면 나무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유권자들에게 잘 보이려다가 실패해서 생기는 역효과다. 뉴욕 출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에 서민들의 문화를 공유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피자를 먹곤 했는데, 종종 포크와 나이프를 써서 먹으면서 “뉴요커(뉴욕 사람) 맞냐”는 조롱을 받았다. 뉴욕식 피자는 얇은 종이 접시 위에 한 조각을 놓고 한 손으로 말아서 먹는데, 무슨 포크와 나이프냐는 것.

물론 갑부에게는 포크와 나이크가 더 어울리는 건 맞다. 게다가 뉴욕시민들은 어차피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를 뽑지 않기 때문에 트럼프로서는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