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의 발전이 크리스천 쿠퍼가 누명을 쓸 뻔한 상황을 면하게 해 주었다면,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소셜미디어가 해낸 일이다.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천의 이야기를 들은 가족 중 한 명이 그가 찍은 비디오를 트위터에 올렸고, 크리스천은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공개했다. 이 영상들은 바이럴이 되어 수천 만 번의 조회가 일어났고, (이런 일이 있을 때 항상 일어나는 것처럼) 온라인에서는 사진 속 백인 여성인 에이미 쿠퍼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에이미의 정체는 금방 드러났고, 그가 다니는 직장까지 다 공개되면서 이번에는 회사에도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에이미는 투자금융회사인 프랭클린템플턴 인베스트먼츠에서 보험 투자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일어난 당일인 2020년 5월 25일에 플랭클린템플턴은 내부적으로 조사를 마칠 때까지 행정 휴가 조치를 했다가 바로 다음날인 26일에 해고했다.

이런 초고속 결정은 이제 미국에서 보편화되었다. 기업들은 임직원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경우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가 결정되기 이전에 신속하게 해고하는 관행이 생겼다. 해당 인물이 법을 어겼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고용 관계는 개인과 회사 사이에 체결한 사항이기 때문에 기업이 가진 임직원 행동수칙(code of conduct)을 어겼다고 판단되면 법원의 결정과 무관하게 해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업들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가 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론이 지속적으로 악화될 경우 회사의 이미지가 나빠지기 때문에 그때까지 판결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법보다 빠른 기업들

하지만 어떤 기업들은 단순한 방어를 넘어 적극적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촬영한 비디오 덕분에 누명을 벗을 수 있었던 크리스천 쿠퍼에게 일어난 일이 그렇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양 다큐멘터리 채널인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최근 크리스천 쿠퍼를 채널이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인 'Extraordinary Birder (뛰어난 탐조꾼)'의 진행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탐조 경력과 탐조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그리고 멋진 목소리)를 생각하면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선정이지만, 그가 2년 전 겪은 일을 통해 생긴 유명세를 내셔널지오그래픽이 홍보에 이용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반응은 좋은 것 같다. 그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가 좋다는 것과 미국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결과다.

물론 내셔널지오그래픽이 BLM 운동의 흐름을 타서 흑인에게 특별한 기회를 준다고 불평할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유명 사립 대학교들이 다양한 인종, 집단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사회적 약자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을 유지하는 것을 두고도 공격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미국과 한국의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에이미 쿠퍼를 하루 만에 해고한 프랭클린템플턴과 마찬가지로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아이비리그 대학교들은 자신들 스스로 룰을 만들 수 있다.

기업들의 처벌 아닌 처벌을 "발언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보수 미국인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은 미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발언의 자유는 무슨 말을 해도 국가에 의해 처벌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사기업이 혐오발언을 하는 직원을 해고할 수 없게 하는 보호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디즈니와 플로리다 주지사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심포니홀에서 흥미로운 공연이 열린다. 보스턴의 유명한 게이 남성 합창단(Boston Gay Men's Chorus)이 디즈니와 함께 '디즈니 프라이드 콘서트'다. 미국의 LGBTQ 커뮤니티, 특히 게이 남성 커뮤니티에서 뮤지컬은 큰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디즈니 뮤지컬은 더욱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게이 남성 합창단이 디즈니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디즈니는 '온 가족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기업이고, 성소수자들은 오래도록 '온전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라는 말을 들으면 '정체성'이 아닌 '성관계'라는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에 성소수자에 관한 언급은 '성인용'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게다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지속되기를 원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런 대중적 편견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그 결과로 디즈니는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절 언급을 회피해온 기업이다. 그랬던 디즈니가 몇 해 전부터 게이 남성 합창단이 디즈니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합창단의 디렉터에 따르면 30년 전, 합창단이 디즈니 노래를 사용하기 위해 허락을 받으려고 했을 때만 해도 허락은 커녕, 아예 대화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분위기지만 저작권법이 엄격한 미국에서는 중요한 문제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수강했던 '미술사에 등장하는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세미나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성소수자의 눈으로 본 디즈니 만화들'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그 학생은 유명한 디즈니 애니메이션들 중에서 "퀴어적인 시각"으로 보면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장면들을 비디오테이프에 모아 편집한 영상을 가져왔는데, 틀기 전에 "이걸 수업시간에 틀어도 디즈니에게 소송을 당하지 않는 거 맞죠?"하고 물었다.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디즈니도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교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happily ever after)" 살게 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난 4월 (디즈니 월드가 있는) 플로리다주에서는 소위 '게이라는 말을 하지말라(Don't Say Gay)'라는 법이 발효되었다. 이 법은 교사들이 3학년 이하의 어린 학생들에게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나 젠더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문제를 정체성이 아닌 성행위처럼 '성인들 간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고,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법이 논의되고 만들어지는 동안 디즈니는 기업 차원에서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았다. 플로리다주에서 디즈니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어야 했는데 팔짱만 끼고 있었다는 비판이 직원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면서 디즈니는 태도를 바꿨다. CEO인 밥 체이펙(Bob Chapek)은 직원들에게 "이 문제는 플로리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도전"이라면서 "제가 여러분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줄 강한 동지가 되었어야 했는데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하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디즈니는 공식적으로 플로리다의 새로운 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플로리다주 정치인들에 대한 기부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의 법안에 서명하는 드산티스 플로리다주지사

2024년에 트럼프를 제치고 공화당의 대선후보가 되려는 플로리다의 주지사 론 드산티스(Ron DeSantis)는 이런 디즈니의 태도를 "우오크(woke,이 단어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은 여기에서 읽어볼 수 있다)"라고 비난했고, 디즈니가 수십 년 동안 누리던 세제 특권을 폐지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디즈니의 대응에서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다시 한번 드러난다. 디즈니는 어제 캘리포니아에서 2천여 명의 직원들을 플로리다로 이주하는 계획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플로리다주의 유리한 세금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오피스를 플로리다로 옮기려던 것이지만 워낙 높은 임금을 받는 직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주한다는 것은 플로리다 주지사로서는 '득점'을 할 기회였다. 디즈니는 드산티스와 정면 대결을 하겠다는 태도다.

그만큼 디즈니가 진보적인 기업으로 변한 걸까?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자신의 고객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들여다본 결과 내린 결정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런 기업들이 중립적으로 남아있을 수 없게 선택을 강요하는 정치적 환경이다. 디즈니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