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슬리어 ②
• 댓글 남기기'미국의 대통령은 핵무기의 사용을 어떻게 결정할까?' 이 궁금증을 추적한 역사학자가 있다. 알렉스 웰러스틴(Alex Wellerstein). 웰러스틴은 다양한 자료를 뒤져가며 지난 70년 동안 미국에서 핵무기의 관리, 사용을 결정하는 룰이 변화하는 모습을 추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트루먼은 대통령이 될 때까지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트루먼은 4선에 성공한 (당시에는 가능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다가 루즈벨트가 취임 후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권한 대행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다. 미국이 일본과 태평양에서 전쟁을 시작한 지 3년이 넘는 시점이었다.
더 흥미로운 건, 미군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트루먼의 허가를 받은 게 아니라, 그에게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원자폭탄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시점이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군은 작전의 목표를 부여받아 실행하는 조직이지, 그걸 달성하는 방법으로 어떤 무기를 쓸 것인지를 대통령에게 일일이 승인받아야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가진 자원의 활용을 결정할 자율권이 있다.
하지만 원자폭탄은 평범한 무기가 아니었고, 트루먼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만 해도 미군과 백악관 사이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는 것. 조금 거칠게 말하면 군대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어 하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이를 통제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잡음이 종종 나온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전에 트루먼이 일기에 기록한 내용이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이지만, 민간인을 상대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군사 목표물에만(purely military target) 이 폭탄을 떨어뜨릴 것이다. 우리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이지 않는다."
심지어 트루먼은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에 "군기지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고 발표했다.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할 것을 미군은 알았겠지만, 대통령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이라며 원폭을 축하하던 트루먼은 다음날 뉴스를 통해 피해 규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 뉴스를 보면 "(미국의) 멤피스나 시애틀, 혹은 로체스터 규모의 도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설명한다.
트루먼의 불신
더 어처구니없는 건, 미군은 트루먼이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목표물인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했지만, 트루먼은 다음날 사후 통보만 받았다는 사실이다. 트루먼은 미군이 원자폭탄을 그렇게 빨리 사용할 줄 몰랐던 것 같다. 미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트루먼에게 "일주일 후에 세 번째 폭탄을 투하할 예정"이라고 또다시 통보했다. (세 번째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중간 지점인 고쿠라, 지금의 기타큐슈에 투하할 예정이었다고 알려졌다.) 이건 아니다 싶었던 트루먼은 미군의 결정에 제동을 건다.
"이제부터는 대통령의 분명한 승인을 받기 전에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트루먼에게는 군인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주면 그걸 반드시 사용하려 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이는 기우가 아니었다. 취임 초기부터 일어난 이런 갈등은 트루먼에게 핵무기와 미군 장성들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훗날 '대통령의 핵무기 직접 통제'라는 원칙으로 발전하는 첫 단추가 된다.
참고로, 군 조직에 대한 트루먼의 불신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의 갈등에서 파국을 맞게 된다. 맥아더를 흔히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영웅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미국인들이 생각한 맥아더는 '전쟁 영웅'이라는 호칭이 전혀 아깝지 않은 인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38선을 넘어 북진하던 맥아더는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공격하고 싶어했지만–이 과정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중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던 트루먼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분개한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하원의장에게 직접 편지를 썼고, 이를 알게 된 트루먼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 맥아더를 직위 해제한다. 전쟁 중에 총사령관을 그것도 맥아더 같은 국민 영웅을 직위 해제하는 것은 엄청난 결정이었고, 맥아더를 지지하던 많은 미국인이 길거리에 나와서 시위를 벌이며 트루먼의 인형을 만들어 목매달았다. 트루먼의 지지율은 폭락해서 훗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기 직전 닉슨 대통령의 지지율보다도 낮은 23%였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미국인의 대다수는 전쟁이 중국이나 소련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 확대 불사라는 맥아더의 의도와 그에 대한 인기는 별개였던 거다.
핵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대통령의 직접적인 승인을 받게 하는 건 궁극적으로 군에 대한 문민통제(文民統制,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의 문제였다. 하지만 어떻게 무기를 관리하는 군에게서 핵만을 빼앗아 대통령의 통제 아래 둘 수 있을까?
미국은 이를 위해 아예 핵폭탄의 설계부터 바꿨다. 폭탄에서 플루토늄이 들어간 핵심부는 분리해서 보관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의 직접 통제를 받는 민간인이 군인들에게 이걸 전달해야 장착할 수 있었다. 트루먼은 핵폭탄의 핵심부가 미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따로 보관하게 하고, 누구도 대통령의 허가 없이는 이를 가져갈 수 없게 했다. 이를 관리하는 담당자들은 무장을 하게 했다. 트루먼이 군을 얼마나 불신했는지, 그리고 핵무기를 대통령의 직접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기술적 변화로, 처음에는 거대했던 핵폭탄이 기술의 발전으로 점점 작아졌고, 폭발하는 부위가 폭탄, 미사일에 붙어서 분리되기 힘들어졌다. 또 다른 변화는 정치적 변화. 바로 2차 대전의 전쟁 때 유럽의 서부전선을 총지휘했던 장군 출신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군 출신의 아이젠하워로서는 미군이 핵무기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고, 핵무기도 다른 모든 무기와 마찬가지와 똑같이 취급해도 좋다며 전임자인 트루먼의 방침을 뒤집었다.
그렇다고 아이젠하워가 핵무기 사용권을 군에 일임한 건 아니다. 핵무기를 사용하기 전에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살아있었다. 다만 핵탄두의 관리를 군대가 직접할 수 있게 된 것이고, 특별한/위급한 경우 대통령의 승인 없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예외를 허용한 것이다.
케네디의 등장
아이젠하워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1961년, 존 F. 케네디가 취임하면서 상황은 다시 변하게 된다. 이즈음이면 소련과의 냉전은 최고도에 달하게 되고, 소련이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도 분명해진다. 이 두 나라가 핵무기 사용을 자제한 것은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즉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는 쪽도 반드시 핵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는 전 세계가 핵의 공포에 떨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특히 소련과 미국은 상대방의 무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핵폭탄이 떨어질 경우의 행동 요령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큰 건물 지하에는 핵공격시 피신할 수 있는 대피소가 만들어졌고, 집주인들은 땅을 파서 별도의 방공호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핵폭탄을 만들다 보니 관리는 생각보다 허술했고, 폭격기에 핵폭탄을 싣고 여기저기 운반하는 과정에서 각종 사고가 잇따랐다. 수소폭탄을 운반하던 미군 비행기가 스페인 상공에서 다른 비행기와 충돌해 폭탄이 땅에 떨어진 일도 있었고, 그린란드에서도,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숱한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폭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실수로 인한 폭발을 막기 위한 8중 안전장치 때문이었다.
이렇게 핵폭탄이 수송되던 이유 중 하나는 좀 더 짧은 시간에 소련을 타격하기 위해 해외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튀르키예(터키)에 있던 미군의 핵미사일 기지가 대표적인 예다. 케네디는 튀르키예가 미국의 우방이기 때문에 핵미사일을 배치했지만, 만에 하나 튀르키예의 정부나 군이 미군의 핵미사일을 뺏으려 한다면? 미사일 기지에 쳐들어가서 발사 열쇠를 뺏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해외에 배치한 핵미사일 발사장치에는 자물쇠를 채우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조합식 자물쇠를 채웠다고 한다.) 이런 케네디의 우려는 트루먼의 우려와 다르지 않고, 궁극적으로 핵무기를 대통령의 통제, 즉 문민통제 아래 두려는 의도였다.
여기에서 앞의 글에서 소개한 해롤드 헤링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헤링은 핵무기를 반격용이 아닌 선제공격에 사용하려는 대통령이 있다면, 과연 그의 결정 과정에는 어떤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개입하느냐고 질문했다. 그가 그런 의문을 제기한 것은 1973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닉슨이었다.
'미슬리어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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