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 두 편을 요약하면, 러시아의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만든 '시스템'이 미국 연극과 영화에 가져온 것이 '메소드' 연기법이고, 이 과정에서 리 스트라스버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새로운 연기법의 힘을 발견한 것은 스트라스버그만이 아니었고, 이 연기법이 미국 연극계에 퍼지는 과정에 많은 사람이 관여했다. 이들은 스타니슬랍스키가 키운 제자들(미국에 왔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에 돌아가지 못하고 뉴욕에 남게 되었다)에게서 연기법을 배웠고,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그룹(The Group)'이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으로 미국의 연극계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생각하는 연기자" 포즈를 취한 '그룹(The Group)'의 단체 사진(이미지 출처: Stella Adler: A Life in Art)

'그룹'이 조직된 건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931년이다. 이들은 1차 세계 대전의 충격과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던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갖고 일종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었고, 이런 낙관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었지만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그 10년 동안 '그룹'을 거쳐 간 사람들은 훗날 미국의 연극과 영화를 완전히 바꾸게 되는 핵심 인물들이었다.

특히 '메소드'라는 말을 만들어 내 새로운 연기법을 널리 알린 리 스트라스버그, '그룹'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와 샌포드 마이즈너(Sanford Meisner), 이렇게 세 사람은 각각 연기를 가르치는 코치가 되어 각각 자기가 해석한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법을 가르치며 젊은 배우들을 양성했다.

첫 글에서 메소드 연기법의 발전 과정이 종교의 발전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 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법의 확산 과정은 변하지 않는 세상에 새로운 메시지를 알린 창시자가 있고, 심오한—그러나 다소 모호하게 들리는—이 메시지를 받은 소수의 제자가 이를 받들어 세상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서로 조금씩 다른 해석을 하는 바람에 분파가 생기고,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빠르게 세상에 전파하는 종교의 확산 과정과 아주 닮았다.

러시아인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을 '그룹' 출신의 리 스트라스버그와 스텔라 애들러, 샌포드 마이즈너라는 세 명의 연기 코치들이 서로 경쟁하며 미국에 전파했는데, 그 과정에서 스트라스버그가 만든 '메소드'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크게 유명해지는 바람에 대중은 이 연기법을 "메소드 연기법"이라고 퉁쳐서 부르게 된 셈이다. 물론 이들이 가르친 연기법은 모두 스타니슬랍스키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과 같은 아브라함 계통(Abrahamic)의 종교들이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더 크고 중요했고, 그래서 싸우게 된 거다.

특히 스트라스버그와 애들러(아래 사진 속 가운데 두 사람) 사이의 반목과 경쟁이 극도로 심했다.

왼쪽부터 스타니슬랍스키, 스트라스버그, 애들러, 마이즈너 (이미지 출처: New York Improv Theater)

스트라스버그와 애들러는 '그룹'에서 감독과 배우로 만났기 때문에 지향하는 새로운 연기에 대해서는 동의했겠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에서 큰 견해 차이를 보였고, 무엇보다 성격 차이가 심했다고 한다. 특히 배우였던 애들러는 '그룹'에서 감독이자, 연기 코치의 역할을 하는 스트라스버그의 지도를 따라야 했는데, 배우의 개인적이고 힘든 경험을 다 끌어내게 하는 스트라스버그의 연기법은 따라하기도 힘들었고,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애들러는 스트라스버그가 감독인 연극에서 주연을 맡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더 많이 충돌했다.

애들러는 스트라스버그의 연기법을 따르면 "아프고 힘들다(sick)"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이는 러시아에서 스타니슬랍스키가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며 동료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그 연기법에 이의를 제기하며 "스타니슬랍스키 병(病)"이라고 부른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랬던 애들러가 메소드 연기법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스트라스버그의 콧대를 꺾을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파리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새로운 연기법의 창시자 스타니슬랍스키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스텔라 애들러의 배우 시절(왼쪽)과 연기 코치 시절 (이미지 출처: Cleveland.com, Los Angeles Times)

그때까지만 해도 애들러는 스트라스버그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법을 그대로 가르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과 스트라스버그의 '메소드'는 같은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믿었던 거다. 애들러는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나 길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래도록 참고 있던 말을 꺼낸다. "저는 원래 연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스타니슬랍스키 씨께서 만든 '시스템'을 따라 하면서 망가졌습니다. 이제는 연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어요."

애들러의 말을 들은 스타니슬랍스키는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신이 그걸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어요. 내일 저희 집에 와서 저랑 한 번 연습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애들러는 창시자 스타니슬랍스키를 사사하게 되었고, 스타니슬랍스키는 프랑스어로 몇 주 동안 애들러에게 집중적으로 연기 지도를 해주었다. 그 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애들러는 연극계에 폭탄선언을 한다. "스트라스버그가 가르친 거 다 틀렸습니다. 그 사람은 스타니슬랍스키를 완전히 잘못 해석했어요."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리 스트라스버그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의 핵심을 배우의 '정서 기억(affective memory)'을 끌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해서 특정 순간에 배역의 감정과 배우의 감정을 일치시키고 단순히 대사 속 내용 이상의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애들러와 같은 배우들이 힘들어하고 "아프다"고 호소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돌아온 애들러는 스타니슬랍스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으며, 그의 '시스템'은 등장인물이 처한 외적 환경에 집중하고, 그가 어떤 목적과 문제를 갖고 있느냐를 이해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스타니슬랍스키에서 출발한 연기법은 이제 뉴욕에서 배우의 감정과 정서 기억, 심리를 강조하는 스트라스버그 진영(=메소드 연기법)과 배우의 행동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애들러 진영으로 크게 나뉘었(고, 여기에 더해 마이즈너도 자신만의 스타니슬랍스키의 해석을 가르치고 있었)다.

영화 '대부(Godfather)' 1편의 알 파치노(왼쪽)와 2편의 로버트 드니로
스트라스버그에게서 연기법을 배운 배우와 애들러에게서 배운 배우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두 사람이 알 파치노(Al Pacino)와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다. 두 사람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둘은 4편의 영화에 같이 출연해서 연기 대결을 보여줬기 때문에 스트라스버그와 애들러의 접근법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알 파치노는 아무런 대사 없이도 그의 머리속에서 진행되는 갈등과 분노를 전달하는 데 능숙한 반면 배우의 정체성은 꾸준하게 유지되는 반면, 로버트 드니로는 배역의 환경과 특징을 연구해서 그 속으로 녹아드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메소드"라고 부르지만, 두 사람의 연기 코치들은 다른 방법론을 가르쳤고, 두 배우의 연기에 그 차이가 드러난다. 엄밀한 의미에서 '메소드'는 스트라스버그의 방법론이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메소드 연기'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에서 파생되어 나온 연기법 전체를 말한다고 보는 게 맞다.

1938년 존 가필드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는 어디까지나 무대 연기를 위해 개발된 것이고, 이를 미국에 보급한 '그룹' 사람들도 처음에는 연극계에서 일하던 감독과 배우들이었다. 그랬던 연기법이 어떻게 영화계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을까? 이를 설명하는 저자 아이작 버틀러는 그 연결고리가 되는 사람으로 존 가필드(John Garfield)라는 배우를 지목한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배우이지만, 그가 출연한 1938년 영화 '네 명의 딸들(Four Daughters)'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새로운 연기법의 탄생을 알린 영화로 알려져 있다.

가필드는 원래 스트라스버그와 애들러, 마이즈너가 속했던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한 영화배우였지만, 배역을 두고 다른 구성원들과 갈등이 생겼다. 게다가 아내가 임신하게 되면서 돈이 필요해 헐리우드로 가서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가 처음 출연한 영화가 '네 명의 딸들'이었다. 이 영화 자체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작품이었지만, 그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래 영상은 손님인 가필드가 집에 들어오는 이 영화의 첫 장면으로, 그를 맞이하는 배우의 연기와 가필드의 연기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집주인 역의 배우는 몸을 많이 사용하면서 대사를 전달하기에 바쁘지만, 가필드는 대사가 아닌 얼굴 표정과 분위기, 그리고 리듬으로 대사 이상의 것을 표현한다.

무슨 일이든 잘하는 사람은 자연스러워 보이고, 자연스러우면 쉬워 보이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배우가 연극에서 하던 연기를 카메라 앞에서 똑같이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대는 객석과의 거리 때문에 아무리 작은 극장에서 하는 연극이라고 해도 관객은 배우의 미묘한 표정을 볼 수 없고, 그런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큰 동작과 목소리를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배우를 가까이에서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서 그렇게 하면 과장되고 어색한 연기로 보이게 된다.

스타니슬랍스키가 시작한 새로운 연기법이 영화와 TV 시대에 큰 환영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미디어에서는 멀리 떨어진 무대와 달리 현실 속의 사람들과 비슷한, 가까운 거리에서 배우를 보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연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연기법을 익힌 연극 배우였던 가필드는 자신이 배운 것을 카메라 앞에서 영리하게 변형, 적용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가필드의 연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헐리우드 시스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사들이 곧바로 메소드 연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1910년대에 시작된 헐리우드의 영화 산업은 1920년대에 이르러 세계 영화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1930, 40년대에는 헐리우드만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추었다. 당시에는 헐리우드의 영화사들은 자사가 만든 영화를 상영하는 전속 극장을 확보하고 있었고, 배우들은 철저한 전속 계약을 통해 풀타임(상근)으로 일하는 직원으로 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스타급 영화배우들은 그들을 보유한 영화사의 브랜드 상품이었다. 팬들은 영화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를 보고 싶었던 것이지, 그 스타가 완전히 배역 속으로 사라져—가령 대니얼 데이 루이스처럼—알아보기 힘든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걸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가령 당시 인기 배우 캐리 그랜트(Cary Grant)가 출연한 영화 속 장면을 보면 그는 출연한 모든 영화 속에서 '캐리 그랜트'일 뿐이다. 나쁜 연기자였다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이 달랐다는 거다.

따라서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존 가필드 정도의 배우 정도로 이런 견고한 헐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이에 익숙한 관객들의 기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기를 확산할 수는 없었다. 천재적인 감독과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걸 해낸 두 사람이 엘리아 카잔(Elia Kazan) 감독과 말론 브란도(Marlone Brando)였다.

1950 말론 브란도

시대별로 흥행 감독이 있고, 영화사에 획을 긋는 감독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아 카잔 감독은 후자에 해당한다. 1930, 40년대에는 연극 감독이었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으며 헐리우드에 진출해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1951),'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 1951),'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1955)' 같은 전설적인 영화들을 만들었다. 특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워터프론트'는 말론 브란도의 뛰어난 연기를 영화 관객들에게 알린 작품이다.

"영화사를 바꾼 배역"이라는 평을 듣는 말론 브란도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미지 출처: James Guild)

브란도는 스텔라 애들러가 발굴해서 키운 배우다. 애들러를 사사한 많은 배우들 중에서도 브란도가 얼마나 영리한 배우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배우의 정서 기억을 꺼내는 것을 강조한 스트라스버그와 달리 배우의 상상력를 중요하게 생각한 애들러는 어느 날 학생들에게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닭들의 행동을 연기해보라"고 했다. 특정한 연기를 지시하는 대신 배우가 상상하고 사고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주문이었다. 애들러의 말을 들은 팔로 날갯질을 하며 다들 놀란 닭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는데, 브란도만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알을 품고 있는 닭을 흉내 내고 있었다. 왜 그런 연기를 했는지 묻는 애들러에게 브란도는 이렇게 답했다.

"폭탄이 뭔지 닭이 아나요?"


'메소드 ④'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