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는 1863년, 제정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공산주의 혁명 이전의 러시아에서 제조업으로 성공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아마추어 배우이자 감독으로 유명했다. 본명은 스타니슬랍스키가 아니라 알렉세예프였지만, 당시 연극인들을 보는 시각 때문에 부모가 부끄러워할 것을 우려해서 예명을 사용해 활동했다. 그가 함께 일하던 극작가 블라디미르 네비로비치 단첸코와 함께 모스크바 아트 시어터(MAT)를 설립한 건 1898년이다.

사업가 집안에서 자란 스타니슬랍스키는 극단도 기업처럼 철저하게 운영했다고 한다. 매일 출근을 체크하고, 주연 배우가 디바(diva, 자기가 주연이라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처럼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헐리우드에서 유명한 격언인 "하찮은 배역은 없다. 하찮은 배우가 있을 뿐(There are no small parts, there are only small actors)"이라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바로 스타니슬랍스키였고, MAT 극단의 신조이기도 했다.

배우 시절의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이미지 출처: Wikipedia)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는 당시(19세기 말) 러시아의 연극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본은 정부의 검열을 거쳤고, 무대 세트는 진부하고 사실감이 없었고, 배우들은 그저 우렁찬 목소리로 거창한 대사를 외치는 진부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실주의를 추구했지만, 그들의 사실주의는 연극의 주제가 아니라 연기와 표현에서의 사실주의였다.

이들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명작이지만, 체호프의 희곡이 처음 공연된 1896년에는 크게 실패했던 작품이다. 관객은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했고, 무대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충격을 받은 체호프는 다시는 희곡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체호프를 찾아간 네미로비치 단첸코는 스타니슬랍스키에게 한번 맡겨보라고 권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무대에서 귀뚜라미와 개구리, 새의 소리가 들리게 했고, 배우들에게 관객을 향해 대사를 외치지 말고 무대에 있는 다른 배우들과 진짜로 대화하듯 연기하라고 지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갈매기' 대본을 읽는 체호프(가운데)와 그의 옆에서 담배를 쥔 수염 기른 남자가 스타니슬랍스키 (이미지 출처: Wikimedia)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타니슬랍스키는 아직 자신만의 체계적 연기법("시스템")을 완성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연기에 약간의 사실주의적인 방법을 도입한 정도였다.

그가 새로운 연기법을 만들어 낼 필요를 느낀 것은 1906년,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연극 '민중의 적'에 출연해 주인공 토마스 스토크만을 연기하던 때였다. 그는 "나는 순진한 역할을 연기했지만, 순진하지 않았고, 무대에서 뛰었지만, 발만 빠르게 움직였을 뿐 내적인 다급함이 없는 움직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배우가 자신이 아닌 배역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그 배역으로 변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의 내부에 저장된 살아온 경험을 이용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걸 끌어내어 사용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앞의 글에서 리 스트라스버그도 연극을 보다 배우들의 연기에 기복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처럼, 화가나 작가처럼 영감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공연 내내 그걸 유지할 수 있어야 했고, 매 공연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새로운 연기법을 만들기 위해 실험을 했다. 우선 한 배우가 연기해야 역할을 작은 덩어리로 쪼갰다. 그리고 각 장면에서 배우가 하는 행동에 동기와 이유를 찾게 했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그 행동에만 집중하도록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public solitude)을 찾는 연습을 하게 했고, 이를 위해서 몸에서 힘을 빼고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을 시켰다.

배우가 하는 행동에 동기와 이유가 왜 중요할까? 스타니슬랍스키가 만든 현대적인 연기법이 널리 퍼진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게 들리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연극인들은 자신이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했지, '연극 속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가령 연극 속에서 누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거나, 독약을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 배우는 그게 가짜 총이고, 가짜 독약인 걸 잘 알고 있었고, 그게 연기에 드러나는 식이다. 무대 위의 배우가 총이 가짜라고 생각하면 그 연기를 보는 관객도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 바꾸기 위해 스타니슬랍스키는 여기에 '만약 진짜라면(Magic If)'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만약 무대 위 상황이 현실이라면? 저 총이 진짜라면? 이 잔에 진짜 독약이 들어있다면? 배우의 표정과 목소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가 이 방법을 발견한 1906년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현대적인 연기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화 속 줄리엣이 독약을 바라보는 장면 (이미지 출처: silver screen scholar, YouTube)

1931년 스트라스버그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변화는 비록 시간이 걸렸지만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리 스트라스버그가 1923년에 뉴욕에서 보고 감명을 받았던 연극이 바로 스타니슬랍스키가 감독한 작품이었고, 이후 스타니슬랍스키가 가르친 제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뉴욕에 정착하면서 그의 새로운 연기법을 퍼뜨리는 통로가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당시 연극인들이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이 뉴욕에서 흔히 보는 연극보다 훨씬 뛰어남을 눈치챘다는 사실일 거다. '소셜미디어가 바꾼 영화산업'에서 언급했지만, 미국의 영화 평론가 폴린 케일이 1960년대 미국 영화가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연극은 그저 상업성만을 추구하면서 제자리에 머물러있는데 유럽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연극, 특히 러시아 연극의 변화한 모습을 부러워한 리 스트라스버그는 해롤드 클러먼(Harold Clurman), 셰릴 크로포드(Cheryl Crawford)과 의기투합해 '그룹(The Group)'이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이 흐름과 관련된 사람들은 the Group, the System, the Method처럼 이름을 단순하게 만들어서 중요성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이들은 1931년, 뉴욕 북부의 코네티컷주에서 캠프를 차리고 완전히 새로운 연기법을 개발한다. 스트라스버그는 러시아의 스타니슬랍스키의 방법론("시스템")을 적용한 것으로 자신만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게 바로 메소드(the Method) 연기법이다. 그가 생각한 메소드는 이렇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감각 기억(sense memory)정서 기억(affective memory)이라는 두 종류의 기억에 의존한다. 전자의 경우 이해하기도, 연습하기도 어렵지 않다. 뭔가를 마시는 연기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물과 와인을 같은 방식으로 마시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연기하는 배우도 다른 표정과 동작을 취하게 되는데, 이건 그가 물이나 와인을 마실 때의 물리적인 감각을 기억하고 연기 중에 떠올리면 된다.

영화 '조커'에서 감정과 상관없이 웃음이 나오는 신경 질환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 (이미지 출처: Koimoi)

반면 정서 기억은 까다롭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사람들이 물리적인 감각뿐 아니라 특정 순간의 감정과 정서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꺼내서 사용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고 믿었다. 스트라스버그는 이 방법을 자신의 "메소드"에 적용해서 슬픈 연기를 할 때는 슬픈 기억을, 기쁨을 표현할 때는 기뻤던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을 사용해 사실적인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바로 스타니슬랍스키("시스템")와 스트라스버그("메소드")의 방법론이 그만큼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배우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방법이 '연기'와 동의어처럼 느껴지게 된 거다. 가령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정물화를 보자. 하나는 사실감을 극도로 강조한 '눈속임 회화(trompe l’oeil)'이고, 다른 하나는 화가(고흐)의 개성이 드러난 그림이다. 둘 다 훌륭한 작품이지만, 각 화가가 추구한 목표는 전혀 다르다. 후자의 경우 붓질만 봐도 누구나 고흐의 작품인 줄 알지만, 전자의 경우 화가는 사라지고 손에 만져질 듯한 사실감만 화폭에 남는다.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 로버트 듀발(Robert Duvall)의 경우 사람들이 그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모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듀발이 눈속임 회화 속 화가처럼 자신의 배역 속으로 녹아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 영화에 나와도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톰 크루즈나 새뮤얼 L. 잭슨 같은 배우도 좋아한다. 이 배우들도 메소드 연기법에서 비롯된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아무도 이들을 메소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배우들도—어쩌면 오히려 더—관객의 사랑을 받는다.
눈속임 회화의 예 (이미지 출처: Art & Object)
빈센트 반 고흐의 정물화 (이미지 출처: Web Gallery of Art)

메소드 연기의 발생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뉴욕에서 이 방법론을 받아들여 사용한 배우들이 이민자이거나,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메소드 연기법은 배우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일, 겪은 감정을 부정하거나 억누르지 말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집에서나 밖에서나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메소드 연기는 처음으로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충실할 것을 허락하고, 오히려 요구한 가르침이었다.

그뿐 아니다. 당시 미국의 연극은 물론, 라디오 방송, 영화 등 모든 매체에서는 '미드애틀랜틱(mid-Atlantic)'이라는 억양을 사용했다. 흔히 "옛날 미국 영화 억양"으로 알고 있는 이 억양은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중간쯤 된다. 뉴욕의 부자 가문에서 실제로 사용된 일종의 귀족 영어이기도 했지만, 보통 사람들이 일상 대화에서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울 말투가 표준어로 여기고 뉴스 앵커들이 사용하는 것처럼, 당시 미국에서는 미드애틀랜틱을 미국의 표준영어, 교육받은 사람들의 영어 억양이라고 생각하고 미디어에서는 이를 사용하는 게 상식이었다.

이 영상에 나오는 모든 억양이 미드애틀랜틱 억양이다.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보컬 코치인 이디스 스키너가 미드애틀랜틱 억양을 퍼뜨렸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미드애틀랜틱은 기자들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억양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지 출처: Snopes

하지만 사실적인 연기를 최우선으로 하는 메소드 연기에서는 이런 가짜 억양이 아니라 일반인이 사용하는 "진짜 억양"을 추구했고, 뉴욕의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유대계, 이탈리아계(사실 뉴욕 특유의 억양이 이 둘의 조합이다)의 억양, 노동자 계급의 말투를 선호했다. 배우들이 그런 사람이고, 배역이 그런 배역이라면 굳이 미드애틀랜틱 억양을 사용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이 길거리에서 들을 법한 억양을 사용해서 말하니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사실적인 연기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일상적인 말투를 영화에 가져온 대표적인 배우가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였다.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로 알려져있지만, 그 시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연기의 혁명을 일으킨 배우로 기억한다.

1949년의 말론 브랜도 (이미지 출처: LIFE)

'메소드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