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에게 남은 카드
• 댓글 3개 보기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리라는 생각을–어쩌면 푸틴을 포함해–아무도 하지 않았던 2019년,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등장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다른 종류의 전쟁을 위해 미사일과 핵무기를 채우고 있다 (The U.S. And Russia Are Stocking Up On Missiles And Nukes For A Different Kind Of War)"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미국과 달리 러시아가 전술핵무기(tactical nuclear weapon)를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도 이에 대비해서 전술핵무기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는 기사였다.
당시만 해도 당장 닥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던 이 기사가 최근 눈길을 끌게 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이 또다시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술핵무기의 사용 가능성이 돌연 크게 증가한 상황에서 2019년 미국의 결정은 앞으로의 전쟁 양상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전쟁의 진행 상황을 간략하게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푸틴의 징집령
가장 중요한 변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푸틴이 내린 징집령이다. 물론 총동원령은 아니고 군 경력을 가진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하는 "부분" 징집임을 강조했지만, 러시아가 침략받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의사에 반해서 국민을 동원하는 일은 푸틴에게 정치적으로 몹시 위험한 선택이다. 이제까지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국민이 대체로 이번 전쟁에 무관심하다는 (물론 이는 푸틴의 설계이지만) 사실 때문이었는데 징집령이 내려지면 전쟁은 강 건너의 일이 아닌 나의 일, 내 가족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국민은 푸틴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푸틴의 권력은 내부에서 위협받게 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푸틴이 징집령을 내리는 것은 최대한 피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푸틴은 부분 징집령이라는 약간의 우회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국민의 반발은 컸다. 동원령이 내려진 직후 러시아 내 군 징집센터를 비롯한 건물 수십 채가 불에 타고 공격을 받는 일이 발생했고, 보도에 따르면 벌써 18만 명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징집령을 피해 주변국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그렇게 탈출하던 러시아 남성들이 국경에서 징집 통지서를 받기도 한다는 보도도 있다.
푸틴이 이런 정치적인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은 전황의 변화와 내부의 비판 때문이다. 이번 전쟁을 지지하는 극우 인플루언서들은 러시아군의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물론, 푸틴이 징집령을 내려서 전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푸틴이 내린 부분 징집령으로 이런 비판이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푸틴이 극우 인플루언서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징집령을 내린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결단을 내릴 때는 그만한 이유, 즉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게 뭘까?
앤더스 퍽 닐슨은 푸틴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징집령을 내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면 이는 오히려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 중 하나가 이번에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관제에 불과하지만) 주민투표를 서둘러서 러시아의 영토라고 선언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즉, 우크라이나의 일부를 차지하고 지킴으로써 전쟁의 승리를 선언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 징집한 병력을 이들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 이는 버락 오바마가 2007년, 이라크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병력을 오히려 증파(surge)해서 진행한 '이라크 안정화 작전'과 비슷하다는 것이 닐슨의 생각이다.
핵 사용의 회색지대
하지만 지금 우크라이나가 벌이고 있는 반격의 규모와 강도는 단순히 병력을 증파한다고 방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닐슨도 지적하지만, 현재 러시아군은 보급 능력이 한계에 달한 상황인데 병력 증파로 최전선의 수요가 늘어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무기가 충분하지 않은 병력이 많아봤자 결국 총알받이(cannon fodder)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경고하는 것이 푸틴의 핵 사용이다. 실제로 이번에 푸틴은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다"라는 말로 핵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러시아가 말하는 "모든 수단"이 핵무기를 이야기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 푸틴은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냐, 라는 (전쟁 초기부터 등장했던) 질문을 다시 꺼내게 된다.
우선 푸틴이 우리가 생각하는 '핵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거나 극히 낮다. 이에 대해서는 '푸틴의 선택 ② 푸틴의 핵단추'에서 자세히 설명했지만, 현재의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핵 독트린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자국 영토가 침범을 받거나 핵공격 아래 놓이게 되지 않는 한 대규모 핵무기를 사용하기 힘들다. 독재라도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는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첫째, 러시아가 새롭게 빼앗은 우크라이나 땅을 자국의 영토라고 선언하면, 그리고 이를 우크라이나가 "침공"하면 엄밀하게 말해 핵을 사용해도 자국의 독트린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연합과 미국, UN은 러시아의 영토 주장을 승인하지도, 거기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러시아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회색지대인 것이다.
둘째, 대규모 핵무기(전략핵무기, strategic nuclear weapon)가 아닌 소규모의 전술핵무기(tactical nuclear weapon)를 사용하는 경우다. 물론 아무리 작아도 분명한 핵무기이고, 푸틴도 이런 무기의 사용을 쉽게 결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만약 푸틴이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특정 도시의 일부를 공격하는 데 소규모의 전술핵을 사용한다면? 미국과 나토/유럽연합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이제까지 세계가 핵전쟁의 발발을 막는데 사용해온 방법은 '핵 공격을 받는 순간 핵 공격을 되돌려준다'는 것인데, 러시아가 전술핵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의 일부를 파괴하는 데 사용할 경우 나토의 핵 미사일을 발사해야 하느냐, 라는 난감한 질문에 처한다.
다른 종류의 전쟁
여기에서 글 초반에 언급한 2019년의 기사가 중요해진다. 이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20세기 냉전 초기만 해도 미국과 소련(러시아)은 핵무기를 다른 재래식 무기와 마찬가지로 각종 전투에서 쉽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가령 적이 점령한 지역으로 진격하기 전에 전술핵무기를 먼저 터뜨리는 식이다. 핵무기가 퍼뜨리고 남기는 방사능 물질의 끔찍함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던 시절의 얘기다. 작은 핵무기로 적을 죽일 수 있겠지만 그리로 돌격한 아군도 방사능에 노출되고, 그 지역은 출입할 수 없는 재난지역이 된다면 그 비용은 지나치게 커진다. 이를 깨닫게 된 미국은 전술핵무기를 일반 전투에 사용하는 계획을 포기한다. 일반적인 전투는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고, 핵무기는 최후의 수단으로, 최후의 전쟁 억지력(deterrence)으로 남겨둔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술핵무기를 대부분 폐기 처분한 미국과 달리 소련/러시아는 흔히 재래식 무기로 분류되는 지뢰, 어뢰, 포탄, 단거리 미사일 등의 무기에도 핵을 장착해 파괴력을 키운 약 1,900개의 전술핵무기를 비축해왔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러시아가 이런 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이런 작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미국은 '동등한 수준의 대응(response in kind)'이 불가능하다는 것. 핵은 핵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미국의 핵무기는 도시를 날려버릴 수 있는 대형 핵무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9년, 미국은 대형 핵무기의 일부를 개조해 러시아의 전술핵에 대응할 수 있는 소형 전술핵무기를 마련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그게 위의 기사가 전한 뉴스였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러시아의 상황은 전술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커지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나토는 이 가능성을 측정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 중이다. CNN이 오늘 발행한 기사는 나토의 화생방 무기 전문가 해미쉬 드 브레튼-고든(Hamish de Bretton-Gordon)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가 전략핵무기는 정비와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만 전술핵무기의 관리 상태는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핵탄두는 유효하지만 이를 목표물까지 싣고 갈 미사일의 관리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다.
참고로, 지난 6월에 러시아군이 발사한 미사일이 U턴을 해서 아군을 공격한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해킹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무기 전문가들에 따르면 고체연료가 든 로켓의 경우 꾸준히 관리, 정비를 하지 않으면 발사 후 연소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관리 사고'라고 한다.
하지만 푸틴으로서는 비재래식(unconventional) 무기, 즉 화학/생물학/방사능(화생방) 무기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이런 무기는 우크라이나군이 아니라 민간인들을 상대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드 브레튼-고든의 예상이다. 그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끔찍한 결과에 놀라고 전쟁에 지치면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포기하고 전쟁을 끝내자는 쪽으로 여론이 변화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푸틴은 이미 2013년에 시리아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경험이 있다. 푸틴이 전술핵을 사용한다면 바로 이런 가정에 기반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푸틴이 전술핵을 사용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순간, 미국과 나토의 감시망에 잡히게 되고 발사되기도 전에 나토의 정밀 타격을 받게 될 수 있다. 즉, 러시아의 전술핵은 상태가 좋지도 않고, 사용을 시도하는 순간 역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반드시 화생방 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독성이 강한 물질이 저장된 화학공장이나 원자력발전소를 파괴할 경우 체르노빌 원전사고 때와 같은 끔찍한 사태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이는 전술핵을 사용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드 브레튼-고든이 생각하는 가장 현실성 높은 시나리오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원전을 파괴한 후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의 비재래식 무기의 사용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고, 사용할 경우 응당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은 푸틴이 잘못 판단할 여지를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이는 바이든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은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어떤 형태로든 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미국은 이런 움직임을 조기에 감지하기 위해 감시의 강도를 높이고 있지만 러시아의 전술핵은 재래식 무기와 함께 보관하는 경우가 흔해서 서구에서 미처 감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와 미국, 나토는 현재 푸틴이 전술핵 사용을 결정할 경우 가장 적절한 대응책을 논의 중일 것이다.
이제 핵무기의 사용은 더 이상 막연한 위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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