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패배 ④ 출구를 없앤 푸틴
• 댓글 2개 보기2022년 1월만 해도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유럽의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노르트스트림2 송유관은 이제 막 가동을 앞두고 있었고, 가동이 시작되면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들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고, 관련 분석 기사나 각종 씽크탱크의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우크라이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는 젤렌스키 정부의 인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돈바스에서 진행되는 지지부진한 전쟁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유럽과 미국을 상대로 벌이던 정보전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고, 유럽에서, 특히 유럽의 극우 정당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긍정적 의견은 상당히 높았다.
더구나 우크라이나가 단기간 내에 NATO에 가입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영토분쟁이 진행 중인 국가는 NATO에 가입할 자격을 갖지 못하는데, 우크라이나는 돈바스와 크름 반도 두 곳에서 분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문제가 논의된다고 해도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같은 사람이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지지할 리는 만무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NATO에 가입하지 못할 것이었고, 우크라이나의 정부는 인기가 없었을 뿐 아니라, 불안한 상황이었고, 러시아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러시아의 군대는 계속해서 현대화되고 있었다.
이게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한 얘기지만, 2021년 말부터 2022년 초까지 미국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 한다고 요란하게 경고했을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은 불필요하게 불안을 조장해서 가만히 있는 러시아를 적대시하라고 세계를 부추기는 나라로 보였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역사적으로 단결력이 가장 약해졌고 심지어 존재의 의미 조차 의심받고 있던 NATO는 다시 한 번 약해질 것이었다. 러시아가 자국 안보에 위협을 느낄 만한 아무런 징후도 없는 상황이었다.
푸틴은 침공을 포기하고 기다렸어야 했다. 정보전을 계속 진행하면서 미국을 전 세계에 불안을 조장하는 나라로 보이게 만들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서서히 키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반복하는 실수 중 네 번째인 "능력 이상으로 욕심을 내는 버릇"이 되살아났다. 푸틴은 서방 국가들이 또 다시 팔짱을 끼고 지켜볼 것이라고, 우크라이나 정부가 포기하고 무너질 거라고, 그리고 러시아는 세계 최강의 군대 중 하나이며 목표를 반드시 달성한다고 확신하고 진격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하려는 질문이 나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과연 전략적 성공인가?
푸틴의 전략적 재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참담한 실패다. 개전 직후 러시아 군대는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직면해 꼼짝하지 못했고, 2022년 한 해 동안 싸워서 점령한 지역도 대부분 우크라이나에게 빼앗겼다. 사진과 영상으로 확인된 피해는 믿기 힘들 만큼 엄청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앞서 설명했던 러시아의 오래된 실수의 반복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정부와 사회를 개혁하지 못해서 부패와 거짓말이 만연하게 되었고, 그 부패는 러시아의 군대를 약하게 만들었고, 기만과 거짓말이 일상화된 문화 때문에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환영할 거라는 환상을 갖게 되었고, 러시아 군대의 실력에 대해서도 착각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에서 보여준 태도, 크렘린이 쏟아낸 말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저항감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과거 한 때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들이 서로 형제 관계라는 생각이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을 부정했고, 우크라이나의 역사적인 존재를 부정했고, 문화를 부정했다. 쉽게 말해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형제국가 사람들이 아니라, 러시아인인데 자기 정체성을 착각한 사람들로 취급한 거다. 이런 식의 접근법은 과거 폴란드와 핀란드 사람들을 러시아화하려던 시도 이상의 결과를 낳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크기의 나라를 공략하면서 국민 징집령도 내리지 않고, 화력도 총동원하지 않은 채 이미 진행 중이던 돈바스에서의 전투는 물론이고 북쪽과 동쪽, 남쪽 전선을 동시에 공격하고, 거기에 더해서 수도 키이우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나친 확장(over-extension)과 무리수(overreach)의 사전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군대는 그들이 가진 자원을 넘어서는 지나친 임무를 부여받았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 초기 몇 달 동안만 해도 러시아가 자신들의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피해를 줬는지는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첫 두 달 동안은 러시아가 재난을 겪지 않는 선에서 빠져나올 기회가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달성하려는 목표를 워낙 모호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무장해제(demilitarize)하고 우크라이나 안에 있는 민족주의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목표는 워낙 불분명해서 군대가 별 성과 없이 러시아로 돌아가도 러시아 매체들은 러시아가 승리했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가면 원했던 결과는 아닐 것이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것에 비해) 많은 피해를 입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택 가능한 옵션이었다.
출구를 폭파해버린 푸틴
러시아가 그렇게 몇 달을 우크라이나에서 싸운 후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푸틴에게 전쟁에서 빠져나갈 혹은 출구(off-ramp)를 주자는 논의가 나왔다. 그렇게 나가도 러시아가 이겼다고 주장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출구였지만 푸틴은 거기에 화약을 채워 넣고 폭파시켜 버렸다. 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지역을 러시아 영토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푸틴의 선언에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침공을 시작했던 2월만 해도 푸틴은 영토를 빼앗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몇 달 만에 웬만한 유럽국가보다 큰 영토의 합병을 선언했다.
그런데 푸틴의 합병 선언은 단순한 정치적 허세가 아니었다. 푸틴은 이들 지역을 합병함으로써 많은 정치인들이 죽어도 하지 않으려는 행동을 했다. 바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방법을 사람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푸틴이 애초 공개적으로 밝혔던 목표는 우크라이나를 "무장해제"하고 "비 나치화(de-Nazify)"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를 "무장해제"한다는 건 군 장비 몇 개를 파괴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퉁칠 수 있을 만큼 애매한 작업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정부를 나치나 극우민족주의자들이 이끌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한 나라를 "비 나치화"한다는 게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아무거나 가져다 붙여도, 아니 아무 일 하지 않고도 해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의 파시스트 용병 단체 바그너 그룹이 러시아로 돌아가면 우크라이나의 나치 숫자는 줄어드는 셈이다.)
그런데 이 지역들을 합병해버린 결과, 앞으로 만들어질 평화협상안에 이들 지역 네 개를 러시아가 완전히 통제하는 조건을 포함시키지 못하는 순간, 러시아는 전략적 실패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과의 측정 기준
러시아가 전략적으로 실패했느냐 아니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애초에 가졌던 전략적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푸틴의 목표가 (파괴된 러시아 탱크와 장갑차로) 우크라이나의 고철 산업을 활성화하는 것이었거나, 혹은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부양시키는 것이었다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성과를 제대로 측정하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전략적 목표가 무엇이었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앞서 프리마코프 독트린과 그 독트린이 가진 목표를 살펴봤으니 그것들을 적용해 보기로 하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의 힘과 영향력, 그리고 헤게모니를 약화시켜야 했다. 그리고 옛 소련이 지배하던 공간에서 러시아의 지배를 강화해야 했다. 그리고 NATO를 약화시키고, 그 확장을 저지해야 했다. 이게 프리마코프 독트린이 말하는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다. 여기에 푸틴이 직접 러시아 국민과 전 세계에 밝힌 목표를 더한다면, 우크라이나의 무장해제와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제거를 포함시킬 수 있겠다. 그리고 영토 확장과 무관하다고 주장한지 몇 달 만에 말을 바꿔 네 개의 지역을 러시아에 합병한 것도 이 전쟁의 목표에 추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러시아의 침략 전쟁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은 프리마코프 독트린이 말하는 목표와 푸틴이 국민과 세계에 밝힌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것을 기준으로 측정해도 러시아에 유리한 그림은 나오지 않는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이 영상을 녹화하는 시점(2월 말)에서 러시아는 여러 개의 전선에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고, 상당한 군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서방 세계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결정적인 요소이지만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이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달려있다.
그렇지만 내 주장은 러시아의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변수는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든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라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생각실험을 하나 해보자.
'전략적 패배 ⑤'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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