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가 바꾼 영화산업 ⑤
• 댓글 남기기진행자: 영화를 어떻게 읽느냐는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저는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객에게 도발(provoke)하는 영화로 읽었습니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그렇고, 원자폭탄 투하를 묘사하는 방법이 그런 도발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온라인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묘사를 두고 분노하는 걸 봅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영화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것을 두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LA타임즈의 영화 평론가 저스틴 챙(Justin Chang)은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글을 썼어요. 제가 그 글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술과 스토리텔링에서 묘사되는 것이 반드시 작가가 지지(endorsement)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작품에서 묘사되지 않는다고 해서 작가가 그것을 지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는 그만큼 자주 듣지는 않는다. 그런데 온라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으면 관객은 스스로 역사를 알 수도 없고, 공감을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묘사하는 것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관객은 무지하다고 즉각적으로 가정한다. 그들은 영화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들은 회피하려 하거나 실수로 빼놓은 것으로 생각하지, 감독이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오펜하이머'를 좋아하고, 저스틴 챙의 영화 해석과 온라인 담론에 대한 그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와이먼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와이먼: 저는 저스틴 챙이 요즘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그리고 제가 정말 싫어하는—일반적인 트렌드에 대해 말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영화들은 아주 안전하게 만들려고 하고, 관객을 가르치려고 들죠, 그것도 아주 게으른 방법으로요. 챙이 말하는 것처럼 이런 영화들은 관객에 대한 신뢰가 없어요. 여기에는 소셜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하는 기제가 소셜미디어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죠.
지금 생각나는 게 '바비'입니다. 제가 그 영화를 비판하는 것, 혹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제가 원래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감독을 옹호하는 논리 중 하나가 그 감독이 (젊은 여성 감독이라고 해서) 어린/젊은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은 여성 감독이 그래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데, 거윅은—적어도 '바비' 이전까지는—그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비판을 받곤 했고, 그래서 제가 훌륭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한 거고요.
그런데 '바비'에서는 거윅 감독이 '보여주는 대신 설명하는(tell-don't-show)' 방식을 사용하는 듯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전달해야 할 모든 걸 설명합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으면 엄청난 백래시(backlash)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듯 해요. 실제로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하고, 영화가 자기에게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기대합니다. 저는 영화로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면 영화의 플롯, 스토리에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감독들이 겁에 질려서 관객들이 자기 영화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영화를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비'가 나온 거고, 그런 제작 태도는 관객에 대한 불신(관객이 영화를 인내심을 갖고 보거나,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옮긴이)을 반영합니다. 감독들이 겁을 먹게 만드는 관객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는(show-don't-tell)' 영화를 선호합니다.
진행자: 폴 슈레이더 감독이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아시다시피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 2017)' 같은 만든 감독으로 유명하죠.
와이먼: '아메리칸 지골로(American Gigolo, 1980)'도 있죠!
진행자: 맞아요!! 그 영화 얘기를 하면 폴 버호벤의 영화 스타일을 다시 얘기하게 되는데 (함께 웃음) 암튼 슈레이더가 나이 든 아버지 세대가 페이스북에서 투덜거리는 투로 이런 말을 했어요. "영화 평론이 꽃을 피운 시대가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관객들이 더 좋은 영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목격하는 이런 변화, 사회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들이 변하는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게 변해서 그런 건지, (알고리듬 기반의) 소셜미디어가 확산시키거나 확산을 억누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영화 제작사가 원해서 그중에서 취사선택을 하는 건지 말이죠.
와이먼: 저는 소셜미디어는 미술계처럼 실제 세상에 비하면 아주 작은 생태계에 불과하고, 소셜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제 세상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도덕적으로 단순하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볼만한 영화들은 많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사들이 위험을 극도로 회피하면서 아주 안전한 영화들을 만들려고 하죠. 제가 생각하는 문제는 그거예요. 사람들 자체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죠. 1960년대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이 그렇게 다르지 않아요. 바뀐 게 있다면 영화 산업의 재정 모델(financial model)이라고 봅니다. 과거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메시지가 단순하지 않은 영화들도 만들어질 수 있었죠.
물론 1960년대에는 거대한 문화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민권운동이 있었고, 성 혁명(sexual revolution)도 일어났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영화도 변했고, 사람들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역치(threshold)도 달라졌겠지만, 지금 일어나는 변화를 전부 관객의 책임이라고 보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진행자: 맞아요. 요즘 나오는 영화들을 보면 제작사들은 관객의 생각과 다른 영화, 도발적인 영화를 만든다기보다는 관객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바비'가 그런 걸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영화가 작품 자체로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가지고 요즘의 추세를 고민하기가 쉽지 않기도 해요. 혹시 '바비'만큼 좋은 작품이 아니면서 바뀌는 영화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요?
와이먼: 물론이죠. 저는 아무래도 여성이 만든 영화에 더 민감한 것 같아요. 여성이 만들면 단순하지 않은 작품이 나올 거라 기대하게 되거든요. (웃음) 요즘 추세 중에 사회 계급에 대한 우화(class allegory)가 있어요. 작년 거의 비슷한 시점에 나온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과 '더 메뉴(The Menu)'가 그런 영화들입니다. 저는 '슬픔의 삼각형'을 아주 좋아했어요. 일단 재미있는 영화이고, 기술적으로도 아주 잘 만든 영화죠. 연기도 좋았고, 새로운 시도도 많이 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우디 해럴슨(Woody Harrelson)과 또 다른 캐릭터가 앉아서 한 사람은 미국의 사회주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의 자본주의자라며 30분 가까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아, 제발 영화의 주제가 뭔지 설명하는 건 그만 좀 했으면...' 하고 생각했죠. 그래도 그 영화 하나는 눈감아 줄 수 있었는데, 그 뒤를 이어서 '더 메뉴'가 나와서 비슷한 걸 하니까 인내심이 바닥나더라고요. (웃음)
많은 사람들이 '더 메뉴'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이 제게 "그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래"라고 하면 제 대답은 "아니, 그냥 좋은 영화가 아닐 뿐이야"이죠. (함께 웃음) '더 메뉴'가 참기 힘든 건 이 영화가 대단한 척하는 태도(smug)예요. 저는 그 영화가 등장인물인 부자들을 관객들이 충분히 비난하고 싶은 사람들로 묘사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아니, 그다지 부자 같지도 않아 보여서 마지막에 그들이 받게 되는 디저트가 합당한 건지 납득도 되지 않아요.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뭔데?'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영화가 관객을 가르치는 데 실패했다면, 결국 이 영화는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고 만든 건데, 솔직히 충격적이지도 않아요. 영화의 기술적 요소도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질문하신 내용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영화가 있다면 이 영화입니다.
진행자: 네, 대단한 척 하는 태도가 적절한 설명이네요. 그게 영화가 케이블TV처럼 변하고, 케이블TV가 트위터처럼 변하는 추세를 잘 설명해 준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케이블TV"는 폭스뉴스나 MSNBC처럼 당파성이 강한 케이블 뉴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옮긴이) 관객들이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입장에 대해 우쭐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 말이죠.
그런데 와이먼 씨께서 '바비'에 대해 방금 말씀하신 것과 같은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영상을 만드시면서 그걸 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하셨나요? 그 영화의 팬덤도 상당하니까요.
와이먼: 네, 그 영상 앞부분에서 무려 10분 동안 제가 받은 백래시 이야기를 해야 했어요. 왜냐면 본 영상을 만들기 전에 다른 영상에서 짧게 '바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한 걸로 보고 사람들이 분노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그 백래시에 관해서 이야기 한 걸로 또 백래시가 일어났어요. 사람들이 비판한 걸 네 팬들에게 보란 듯 내걸 수 있느냐는 거였죠. 이 얘기를 하자면 길어지니까 여기까지만 하겠지만, 답을 말씀드리면 맞습니다. 저는 그 영상을 포스팅하기 전에 무척 걱정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걱정해야 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더 화가 났어요. 제가 부정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전통적인 영화 평론가들이 힘들어했던 게 바로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인 내가 특정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 일반 관객인 당신이 그 영화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저는 영상에서 영화 평론을 하면서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고, 그 이유는 이러저러하지만, 여러분은 이 영화를 좋아하실 수 있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게 싫습니다. 관객은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비판적으로 말하는 평론가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왜 '바비'를 좋아하는지 아주 잘 알고 이해합니다. 그냥 저는 개인적으로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뿐입니다. 답을 말씀드리면, 네, 그 영상을 만들면서 두려웠어요.
진행자: 유튜버나 팟캐스터들은 오디언스(시청자, 청취자)에게 의존해야 하죠. 저는 몇 년 동안 신문에 기고했는데,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도 갈수록 비슷한 처지가 됩니다. 유튜브와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이 이런 의존을 크게 강화하지만, 구독 기반의 신문들도 다르지 않아서, 오디언스는 갈수록 매체가 자기가 듣기 좋은 소리,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영화 제작사들도 그런 요구에 민감해질 거고, 거기에 따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희는 이런 변화가 영화 문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와이먼 씨와 저는 둘 다 영화나 영화 문화가 문화 전반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보고 있죠. 사람들이 특정 이슈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자기가 본 영화의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이 변화가 만들어 낸 실수, 혹은 결과가 영화를 넘어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하십니까?
와이먼: 영화는 20세기 초에 발명된 이래로 인류 문화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만들어지다 보니 일종의 타임캡슐 역할도 해서 우리의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죠. 예전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보면 그 당시 사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잖아요. 가령,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처럼 레이건 시대(1980년대) 영화들은 딱 보면 '아, 저거 레이건 시대 영화야'라고 알아볼 수 있고, '트랜스포머(Transformers)' 같은 영화들을 보면 부시 시대 영화인 걸 알아볼 수 있잖아요. 대단하지 않나요?
영화가 그렇게 인류 사회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영화를 통해 인간조건(human condition, 인류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 거창한 말로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왜 예술을 만들어 왔겠어요?
한편으로 영화는 그냥 인류의 창의성을 즐기는 하나의 축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최근에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봤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얼마나 힘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 작품이 박찬욱 감독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감독의 솜씨를 보면서 흥분이 되더라고요. 영화의 카메라 워크도 대단해서 '왜 미국에서는 아무도 이런 걸 안 하지?'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죠.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저는 삶을 보는 눈이 달라져요. 훌륭한 예술을 감상할 때마다 제 삶을 더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은 작품을 보고 싶어집니다.
A.O. 스캇이 이런 말을 했어요. 영화를 소비하는 게 점점 평범한 일상의 행위로 변하면서 영화가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오락거리인지 잊게 된 것 같다고요. 주중 아무 날에 그냥 영화관에 들어가서 작품을 보면 그날의 기분이 바뀌죠. 그날 하루가 더 나은 날이 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지금 잃고 있는 게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일어나는 변화가 영화의 종말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씨네마(cinema, 영화관, 영화관 영화)의 종말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영화관과 관련해서는 좋지 않은 트렌드이지만, 우리는 이걸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요약하자면, 저는 전반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문화적 현상(cultural event)를 상실하는 것 같아 두려워요. 저는 영화가 과도하게 상업화하고 있고, 근래 들어 영화업계가 재정적으로 불안해지면서 기업이 (이윤을 내려는 목표가) 영화계를 장악하고 있죠. 이건 영화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좋은 영화들이—특정한 어젠다를 밀고 있지 않으면—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우려스럽습니다.
저는 역사라는 게 진자운동을 하기 때문에 한쪽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방향을 바꾼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 만들어지는 많은 좋은 영화들을 관객이 모르고 있으니까 아쉽죠. 저는 이게 배급과 상영의 문제이고 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풀 수 있으면 해결됩니다만, 걱정도 되고, 그러면서도 희망은 잃지 않아요.
진행자: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드리려 합니다. 헐리우드 영화 문화와 영화 비평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가 우리 시대에 반복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와이먼 씨께서 "불가능하다"라고 대답하도록 유도하는 거 아닙니다. (진행자는 불가능에 무게를 두는 것 같다—옮긴이) 저보다 많이 아시니, 가능하다고 대답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폴린 케일이 1967년에 뉴요커에 쓴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 영화평입니다.
청취자들을 위해 이 비평의 왜 나왔고, 왜 중요했는지 그 맥락을 잠깐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1960년대 헐리우드는 지지부진했고, 뻔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보수적이었고, 영화에 담긴 정치적 견해도 보수적이었어요. 그래서 당시 새로운 영화는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나왔습니다. 헐리우드는 변화를 원하지 않았고, 젊은 관객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폴린 케일은 뉴요커 영화평(아래)에서 '보니와 클라이드'를 극찬하면서 이 영화가 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영화는 폭력과 섹스로 가득하고, 특이한 방법으로 촬영되었는데, 케일은 아주 긴 글을 통해 왜 이 영화가 중요한지, 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지, 그리고 왜 제작사들이 이 영화를 좋아해야 하는지 설명했습니다. 케일의 평론은 이 작품의 의미를 관객에게만 설명한 게 아니라, 영화 제작사들이 이런 종류의 영화 제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고,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방식을 바꿨고, 결과적으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를 바꿨고—제 생각이지만—문화 전반에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그때 일어난 변화가 오늘날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와이먼: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폴린 케일의 비평을 두고 사람들이 잘난 평론가의 글이고, 요즘 영화에 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도 케일과 같은 옛날 평론가들을 흉내고 있다고 말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폴린 케일이나 로저 이버트 같은 사람들이 달랐던 건, 이들이 영화는 왜 룰(rule, 틀)을 깨야 하는지, 룰을 깨는 것이 하나의 매체로서의 영화,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지를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회가 평론가들—어떤 방식으로 비평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하지 말고—에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허용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영화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동의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을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그게 지금 필요한 거라고 봐요. 영화 평론의 역할을 축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영화 평론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평론은 생명력을 유지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가 영화 평론가들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만드는 종류의) 영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웃음) 모든 종류의 영화 평론을 허용해달라는 겁니다. 제가 제 일을 계속하게 해주세요! (함께 웃음)
진행자: 영화 평론이 계속해서 생명을 유지할 만한 오디언스가 있다고 봅니다. 다가오는 미래에 영화와 영화 평론이 어떤 모습이 될지 기대하게 되네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이먼: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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