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중문화 속 여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는 헐리우드 공포영화 속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들어와서는 변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20세기 중후반을 주름잡은 공포 영화에서 희생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여성이었고, 가해자는 남성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비판의 포인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말, 저물어가던 디즈니를 살려낸 애니메이션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를 재조명하는 이야기였다. 알다시피 "디즈니 공주들"의 하나인 인어공주의 이야기는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모를 만큼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재조명 시도가 내 관심을 끈 것은 익숙한 비판점을 넘어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내가 들은 이야기들은 각각 이곳이곳에서 들을 수 있다).

생존한 여성들

그레이디 헨드릭스가 쓴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The Final Girl Support Group)'은 '할로윈'(1978) '13일의 금요일'(1980) 등의 공포 영화에서 친구들이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후 마지막에 살아남는 여성 캐릭터들을 모아 만든 소설이다. 공포 영화 속에서 생존한 캐릭터 여섯 명이 모여서 집단 심리치료를 받는다는 설정. 그런 여성 캐릭터가 여섯 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이 장르가 얼마나 뻔한 멜로디의 변주를 만들어냈는지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런 뻔한 스토리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인기였는지도 보여준다. (오죽했으면 '13일의 금요일' 프랜차이즈에 등장하는 마지막 생존 여성 캐릭터들의 랭킹도 있다).

영화 '할로윈'(1978) 속 주인공을 맡은 제이미 리 커티스

이 책을 주제로 한 인터뷰에서 글쓴이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1편에서 살아남은 여성 캐릭터는 2편에 출연해서 초반에 죽임을 당하고, 1, 2편에서 모두 살아남았더라도 3편에서는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이 여성들이 "비록 얼굴 없는 살인자를 피할 수는 있어도 시장 자본주의의 힘은 피할 수 없다"라는 말을 했다. 농담처럼 했지만 가볍지 않은 지적이다. 공포 영화의 관객들이 그런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 구도를 좋아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도 사실이다. 위와 같은 공포영화가 집중적으로 쏟아진 시점은 미국에서 연쇄살인이 급증하던 시기와 겹치는데, 연쇄살인범은 거의 예외 없이 남성이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남성 살인마가 등장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계에 따르면 연쇄살인 범죄 피해자의 성별은 남녀가 거의 동수로 나뉘고 여성이 약간 많은 정도다. 물론 많은 공포 영화에서 남성 피해자들도 많이 등장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혹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장면은 거의 예외 없이 힘없는 여성이 도망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고, 최후에 남는 상징적 피해자는 반드시 여성이다.

이런 구도는 특히 칼과 도끼 등을 사용한 난도질과 피가 낭자한 슬래셔 영화(slasher film)에 두드러지는데, 한 분석에 따르면 "슬래셔 영화는 흔히 한 명의 살인자가 랜덤한 피해자들을 이유 없이 스토킹해서 잔인하게 살인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피해자들은 대개 10대, 혹은 젊은 성인 중에서 주류 사회에서 분리되어 있거나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들은 흔히 젊은 여성이 살해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살인자를 꺾고 살아남는 여성이 나오지만, 문제(=범인)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앞서 이야기한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이 바로 이런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가져온 것이다. (이를 소재로 한 것은 이 책만이 아니다. 관심은 끌지 못했지만 2016년에 비슷한 플롯의 영화도 나왔다).

'13일의 금요일' 2편에 등장하는 "파이널 걸"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과거의 진부한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여성 캐릭터가 악당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범인을 잡는 힘 있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여성 캐릭터가 주도하는 공포 영화들을 보고 싶다면 여기에서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 '친절한 금자씨'가 들어가지 않은 건 아쉽다.

하지만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의 저자는 자기가 끌리는 여성 캐릭터는 '뱀파이어 해결사(Buffy the Vampire Slayer)'의 버피나 '매드맥스'의 퓨리오사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캐릭터가 아니라 특별히 똑똑하거나 힘이 있지 않아도 악착같이 버티고, 기어오르고, 싸워서 살아남는 인물이라고 한다.

이 저자가 인터뷰에서 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거다. 자신은 이 책을 쓰면서 이렇게 여성을 죽이려고 악착같이 쫓아다니는 남성 범인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그들이 하나같이 여성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다는 것. 현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성들에 대해 별 이상한 이유로 분노한다면서 가령 힐러리 클린턴을 보라고 한다. 대중과 언론은 이런 여성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집착을 갖고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그 "여자들이 도대체 (남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분노다. 그 결과 공포 영화 속 여성들은 영화 끝에 살아남아도 공포에서 풀려나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의 손아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남성들이 만든 영화가 주는 경고의 메시지다.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 13세기에 기록된 'Roman de la Rose' (British Library)

사라진 인어공주

'남자의 말을 듣지 않는 여자는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메시지는 수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주의가 누차 강조했던 거다.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때릴 권리를 인정하면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헌신과 복종을 하면" 남편에게 맞지 않고 사랑을 받을 거라고 충고했다. 그런 "충고"는 중세시대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성인 남성들이 각본을 쓰고 만들어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인어공주' 같은 대중문화에도 담겨있다.

자신이 정한 룰을 따르지 않는다고 딸에게 분노하는 트라이튼

이번에 말콤 글래드웰의 'Revisionist History'의 '인어공주' 에피소드를 들으며 깨달은 것은 내가 이 작품의 결말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에리얼이 자신의 목소리와 함께 사랑하는 왕자를 빼앗은 문어/마녀 우르술라를 무찔렀거나 최소한 그걸 도왔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딸을 도우러 온 바다의 신 트라이튼은 우르술라를 죽이지 못한다. 딸이 서명한 계약서는 바다의 신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법학자들은 이 부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이 계약은 무효다. 게다가 신체를 훼손하는 계약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이 '정의'가 아닌 '계약'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지극히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걸 본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이 '법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시작은 '인어공주'일 거다.

그런 상황에서 우르술라를 죽인 건 왕자 에릭이었다. 그것도 배 앞에 길게 튀어나온 부러진 돛대로 우르술라의 몸을 관통해서 죽인다. 남근(男根, phallic)상징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해석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 장면을 보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말이 나올 만큼 분명한 남성성 과시다.

더 의미심장한 건 왕자/돛대/남근의 활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주인공 인어공주다. 에리얼이 상황에서 가부장인 아버지와 (미래의) 남편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다. 하지만 'Revisionist History'가 지적하는 건 단순히 에리얼의 수동성이 아니라, 그가 극중에서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디즈니의 '인어공주'를 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초반부에서 에리얼이 얼마나 활발하고, 주체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여성으로 묘사되는지 잘 알고 있다. 그게 이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다. 그런데 강력한 파워를 가진 가부장의 말을 어긴 후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갑자기 무능력한 존재로 변한다. 가장 강한 남성인 아버지 트라이튼에 맞서는 힘있는 여성과 계약을 한 것이 에리얼의 가장 큰 잘못이다. (우르술라는 왕국/가부장에 반발한 여성이다). 결국 더 어처구니없는 건 그 이유도 결국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이 존재하는 최고의 목적인 결혼, 그것도 왕자와 결혼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에리얼의 존재는 없는 셈 치고 진행된다. 아니, 화면에는 나오지만 후반부의 에리얼은 영화 초반에 나온, 당차게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여성이 아니라 그저 친구들의 도움에 의존하는 텅빈 캐릭터다. 결국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모든 문제는 현재의 가부장과 미래의 가부장이 힘을 합쳐서 해결해준다. 결국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가진 큰 그림은 이거다: 가부장에 반발한 젊은 여성이 곤경에 빠지고, 남성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후 다시 가부장제도 속에 안착한다.

21세기를 살아야 할 어린 딸아이의 가치관이 이렇게 형성되는 걸 바라는 부모는 (바라건대) 없을 거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여전히 여자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필수 아이템으로 남아있다.


사족 하나

디즈니 버전의 동화들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아무리 세탁을 해도 그 흔적을 지우기 힘들다. '숲속의 잠자는 미녀'의 디즈니 버전은 왕자가 공주에게 키스해서 깨우는 것으로 나오지만, 17세기에 기록된 버전에서는 어느 (결혼한) 왕이 잠자는 공주를 발견하고 깨우지 못하자 (책에는 '사랑'이라 묘사된) 성폭행을 한 후 떠난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공주는 잠에서 깨어 쌍둥이를 낳았더라는 얘기. 그 뒤에는 남편이 혼외 자식을 낳은 걸 발견한 왕비가 등장해 복수극을 벌이는 막장 드라마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