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무덥던 어느 저녁에 알고 지내는 편집자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세상에, 이겼어!' 승리의 주인공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일명 AOC로 얼마 전 내가 격주간지 더 네이션 <The Nation>에 소개 기사를 쓴 젊은 하원의원 예비후보였다. 후보를 처음 만났을 당시 만 해도 브롱크스와 퀸스의 일부 동네를 벗어나면 무명이나 다름없던 인물이다. 그의 경선 승리 소식과 함께 내가 대략 1년 전부터 감지해 온 미국 정치 지형의 변화가 한층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 나는 이 정치 신인을 만나려고 브루클린에서 지하철로 두 시간 거리인 브롱크스로 향했다. 종이 더미와 상자가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고 구불구불 꼬인 전선으로 가득한 채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자동차 정비소 한구석이 그의 선거 운동 본부였다. 인터뷰 사전조사를 나고 나서, 나는 그가 인상적인 젊은 여성이지만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 터였다. (중략)

AOC의 선거운동 포스터 (이미지 출처: Vox)

(AOC가 민주당) 경선에서 깜짝 승리를 거둔 이후, 민주당 우세 지역인 지역구에서 따낸 본선 승리는 모두 예상한 결과였다. 그는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스타급 의원이 됐고, (뉴욕시 공영 라디오방송국 WNYC 표현에 따르면) 걸어 다니는 정치자금 모금함,' '민주당 당내 진보세력의 국가적 상징'으로 떠올랐다.

미디어와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이 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민주당 관계자들은 오히려 열광적인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AOC의 승리가 뉴욕 민주당 우세 지역구에서 일어난 정치의 한 장면일 뿐이며 “인구 통계 전문가로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 했다. 클레어 맥카스킬 전 상원의원은 2018년 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AOC를 가리켜 "반짝거리는 새 물건”이라고 깎아내리며 '수사는 값이 저렴하지만 결과를 얻어내기는 훨씬 어렵다'고 덧붙였다.

값이 싸건 비싸건 AOC의 수사는 효과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는 생애 처음 출마해서 단숨에 연방 하원에 입성했다. AOC는 사람들 기대치를 낮추는 데 평생의 이력을 바쳐온 자들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고 주장하며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가 성공의 동력으로 삼은 것은 정치인 한 사람보다 훨씬 거대한 무엇, 즉 자신과 동년배들이 불러올 도도하지만 당시에는 여전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새로 나온 책 '미국이 불타오른다(The Rise of the New Left)' 서문의 일부다.

이 책은 AOC의 승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책 전체에 걸쳐 AOC가 자주 언급되지만, AOC에 관한 책은 아니다. 인용한 서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정치적 움직임," 그러나 2018년을 기점으로 수면 위로 본격적인 부상(浮上)을 시작한 움직임을 들려주는 책이다. 책 뒤의 찾아보기(색인)를 확인해 보면 '미국의 민주사회주의자들(DSA)'과 '버니 샌더스,' '전국민 의료보험' 같은 단어들이 AOC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진보의 역사가 길다고 하지만 미국주류 정치에서 진보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미국은 1960, 70년대를 제외하면 진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양대 정당은 이념적 차이가 분명하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북부는 공화당, 남부는 민주당이 가져가는 정도의 지역적 구분이 뚜렷했다. 이런 정치 구도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다. 인종, 민족, 소수 종교와 여성에 대한 차별을 불법화한 이 법을 민주당 대통령이 통과시키자 (존 F. 케네디가 발의했지만, 그가 암살당한 후 후임인 린든 존슨이 통과시켰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던 남부 백인 유권자들이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꿨다.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전국적인 압승을 거뒀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The White House)

1960년대에 본격화된 미국의 진보 정치 시대는 1980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끝났다.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레이건의 등장으로 미국 주류 정치가 보수로 돌아섰다는 오해를 부르기 쉽다. 레이건처럼 인기있는 대통령 후보의 당선은 그 나라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런 대통령의 당선은 보수화(혹은 진보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특정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 성향은 그가 처한 시대의 성향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럴까 의심스럽다면 아래에서 설명하는 대통령이 누군인지 맞춰보라:

이 사람은 소수인종의 비즈니스를 지원하는 부처를 만들었고, 흑인을 차별하는 유권자 문해 능력 테스트를 폐지했다. 대학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을 없애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전국민 건강보험에 찬성했고, (앤드류 양이 주장한 것과 비슷한) 월 1,000달러의 무상기본소득을 제안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리처드 닉슨이다. 닉슨은 케네디와 존슨의 진보 정치에 반발한 미국인 유권자가 뽑은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이고, 알다시피 재선을 노리던 중에 민주당 후보에 대한 불법 도청 사건("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이후에 나온 클린턴, 오바마 같은 민주당 대통령도 입 밖에 내기 힘들어하는 정책을 태연히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했던 1960년대가 그만큼 진보적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시대에 대통령이 된 공화당의 닉슨이 지금 기준으로 놀라울 만큼 진보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면, 레이건의 뒤를 이어 미국이 보수로 돌아선 시기에 대통령이 된 민주당의 빌 클린턴은 지금의 바이든 대통령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뉴 데모크래트(New Democrats),' '네오리버럴리즘(Neoliberalism)'과 같은 단어로 대표되는 중도 노선을 내세워야 했다.

빌 클린턴의 뒤에 보이는 "Opportunity(기회), Responsibility(책임), Community(커뮤니티)"는 전통적으로 공화당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들이다. (이미지 출처: Vox)

대통령이 자신이 일하는 시기가 허용하는 범위까지만 진보적, 혹은 보수적일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통령이 바이든이다. 평생을 민주당의 주류 정치인으로 살아온 바이든은 자신의 소신보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1970년대에는 진보 성향의 정치인이었다가, 미국이 보수로 돌아선 1980, 90년대를 지나면서 중도 성향으로 돌아선 사람이다.

사실 2020년 대선에서 승리한 것도 민주당 내 경선에서 진보적인 경쟁자 버니 샌더스와 달리 중도 성향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와 본선에서 맞붙은 트럼프는 "바이든이 당선되면 샌더스와 AOC 같은 급진적인 의원들에게 끌려다니다가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중도 유권자들에게 겁을 줬다. (이런 주장은 트럼프만 한 게 아니다. 미국의 많은 정치 전문가들이 중도의 바이든이 2018년 이후로 그 수가 빠르게 증가한 민주당 내 진보세력을 통제하지 못해 고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언했다).

하지만, 바이든 임기 3년째인 지금까지 민주당에서는 이렇다 할 잡음이 들리지 않는다. 진보 의원들이 바이든에 협조하고 있어서 조용한 것인지, 아니면 바이든의 정책이 민주당내 진보 세력이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이기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분명한 건 보수층에서 "민주당의 급진 좌파"라고 공격하는 이들의 존재가 바이든처럼 여론의 향방을 따르는 정치인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의 행진 (이미지 출처: CNN)

그렇다면 민주당의 색깔을 바꾸고 있는 이 진보 의원들은 누구이고,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작동할까? 이 책 '미국이 불타오른다'가 바로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나온 책이다. 1970년대 이후로 미국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진정한 진보/좌파가 장외 투쟁에 머무르지 않고 의회에 들어와 바이든과 같은 중도 정치인을 왼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당연한 말이지만–새로운 유권자들이 있다. 이들은 밀레니얼과 Z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에서 이 두 그룹은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는 2008년 금융위기를 보며 자랐고, 낮은 취업률 때문에 부모 세대보다 생애 소득이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이다.

본인이 그 유권자 그룹에 속하는 저자 레이나 립시츠(Raina Lipsitz)는 단순히 큰 틀에서 미국 정치의 변화만 분석하는 게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젊은 정치인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아주 꼼꼼히 설명한다. 한국 독자에게는 다소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으로 다가올 대목도 있지만, 큰 그림을 그리다가 디테일을 놓치는 책은 아니다. 그리고 저자의 정치적 입장은 분명히 진보 정치인들에 가깝다. (이 책 영어판의 표지 디자인과 AOC의 선거 포스터 사이의 유사점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놓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못할 우려가 드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평가가 아닌, 진보 진영의 지도 만들기다.

내가 이 책의 뒤표지에 쓴 추천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어젠다를 가졌으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하고 싶다면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이들이–아마 저자의 바람대로–점점 늘어나는 Z세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키워나간다면, 10~20년 후에는 미국의 정치가 지금보다 눈에 띄게 왼쪽으로 이동할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 뒤에 실린 '뉴스 페퍼민트' 송인근 편집장의 해제가 그런 뜨거운 기대를 조금 식혀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답답한 보수 정치인들을 보며 비슷한 고민과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어보고 싶을 것 같다.

저자 레이나 립시츠 (이미지 출처: 저자의 X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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