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란 소식을 듣는 사람 중에서 1980년대를 살았던, 그래서 어린 시절 당시 뉴스를 희미하게라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현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라는 이름을 듣고 '어? 예전에 들어본 이름인데?'하고 갸우뚱한 적이 있을지 모른다. 며칠 전 오터레터에서 발행한 글 '여학생들의 혁명'에서는 이란의 팔라비 왕정이 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지금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이 설립된 1979년의 일을 언급했는데, 그 혁명으로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이 아야톨라 호메이니다. 지금 뉴스에 나오는 사람은 아야톨라 하메네이와는 다른 사람이다.

호메이니(خمینی)와 하메네이(خامنه‌ای)는 분명히 다른 이름이고, 아야톨라는 이름이 아니라 시아파 이슬람의 성직자 계급이다. 호메이니는 1989년에 사망한 이란의 1대 라흐바르(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그의 뒤를 이은 2대 라흐바르. 아직 살아서 재임 중이다. 하지만 외국인의 귀에는 비슷하게 들릴 뿐 아니라, 검은 터번과 희고 긴 수염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이 호메이니가 아직도 살아있어? 하고 착각한다.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를 설명하는 영문 위키피디아 페이지 최상단에는 두 사람을 혼동하지 말라(Not to be confused with Khamenei/Khomeini)는 메시지까지 친절하게 뜬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그의 후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호메이니와 그의 뒤를 이은 하메네이는 종교에 기반한 신정체제 내에서 명칭 그대로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란은 형식적으로는 선거를 시행하고 내각과 대통령을 선출하지만, 종교 최고 지도자에게 워낙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에 이란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란도 민주주의 국가로 진입할 뻔한 적이 있다. 바로 1978~79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의 정권이 붕괴했던 시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당시 팔라비 왕정의 붕괴는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의 봉기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 뒤에는 이란에서 왕정을 끝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던 학생, 지식인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이란이 종교 권력 하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서방 세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물이었다.

아래의 내용은 On The Media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것으로 여기에서 직접 들어볼 수 있고, 좀 더 간략하게는 JSTOR에서 소개한 내용도 있고, 이 이야기를 다룬 'Small Media, Big Revolution: Communication, Culture, and the Iranian Revolution'이라는 책도 나와있다.

모흐센 사제가라 (이미지 출처: George W. Bush Presidential Center)

애국 청년들

모흐센 사제가라(Mohsen Sazegara)는 1955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조숙한 아이였고, 일찌부터 책을 좋아했다. 특히 정치 이론과 정치 철학책을 즐겨 읽으며 자란 그는 1970년대 중반,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란을 떠나 미국의 중부 도시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1978년쯤 되자 그의 관심은 온통 고국 이란에 있었다. 그는 이란의 독재자 팔라비 정권을 뒤엎는 혁명을 돕고 싶었다.

팔라비 가문은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왕조를 이룰 수 있었고, 이란 사회를 서구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군사 독재로 이란 사회를 꼼짝 못 하게 묶어두고 있었다. 특히 사바크(SAVAK)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동원해 이란 국민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뒤집는 혁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가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비슷하게 해외에서 공부한 유학생, 지식인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함께 혁명을 도모했다. 이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와 좌파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이었고, 본국의 이란인들을 부추겨 시위를 일으키게 했지만, 왕정을 뒤엎는 혁명까지 가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사제가라와 동료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노플 르 샤토(Neauphle-le-chateau)라는 마을에서 모임을 가졌다. 지인을 통해 그곳에서 머물 수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해야 하는 허접한 주택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염을 길게 기른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루홀라 호메이니.

1978년 루홀라 호메이니이와 모흐센 사제가라 (이미지 출처: Iran Wire)

호메이니는 1900년생이니, 그 당시에 이미 70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그는 이란에서 '백색 혁명'이라 불리는 팔레비 왕조의 서구화 정책–여기에는 히잡 착용 금지도 포함된다–에 반대하다가 1964년에 이란을 떠나 긴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튀르키예(터키)로 보내졌지만 곧 이라크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망명 기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하지만 1978년 (훗날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그와 대립하게 되는) 사담 후세인 당시 부통령에 의해 이라크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가게 되었던 거다.

사제가라와 그의 혁명 동지들은 거기에서 호메이니를 보고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호메이니는 "팔라비는 이란을 떠나라"는 식의 과격한 주장을 거침없이 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사제가라는 당시 자신들에게는 그런 종교 지도자가 필요했다고 한다. 이란 국민을 흥분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다만 호메이니가 종종 황당한 소리를 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건 괜찮았다. 그런 단점은 보완하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호메이니를 이용해서 이란에 혁명을 일으키고, 그렇게 해서 팔라비 왕조를 몰아낸 후에는 호메이니를 폐기처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호메이니는 그저 유용한 도구였다.

그렇게 해서 '호메이니 스타 만들기' 작전이 시작된다.

호메이니의 등판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70대의 노인을 데리고 어떻게 혁명을 시작할 것인가?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동원할 수 있는 '끈'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서구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영어를 할 수 있었고, 해외 언론을 프랑스로 초청해서 기자 회견을 개최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전 세계 언론사에 전화를 돌리고 보도 자료를 발표했고, 그들이 머물던 집은 미디어 센터가 되었다.

서방 세계의 석유 이권이 개입된 이란에서 미국과 영국이 지지하는 왕정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니 언론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했고, 유명 언론사들이 호메이니를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를 파견했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호메이니는 이란어(페르시아어) 밖에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혁명가들에게 그건 문제가 아니라 기회였다.

이 영상이 당시 인터뷰. 미국 기자의 호메이니 인터뷰는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통역으로 진행된다. 

지식인들의 통역을 통해 듣는 호메이니의 말은 신중하고, 현명하고, 외교적이다. 하지만 호메이니의 이란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그가 전혀 다른 톤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인터뷰에서 호메이니는 이슬람 국가를 지상에 만들겠다는 말을 한다. 이란을 중세 시대와 같은 종교 국가로 바꿔놓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지상 천국이 건설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국제 테러집단인 이슬람국가(IS)의 주장과 다르지 않은, 과격한 주장이다. 이런 말을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는 건 위험했다. 사람들은 호메이니 몰래 통역을 통해 내용을 걸러내기로 했다.

지식인이라면 호메이니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사제가라는 "팔라비 정권의 비밀 경찰이 국민을 체포해서 감옥에 넣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권의 교체가 제일 중요했다"고 말한다. 호메이니가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 팔라비 왕가를 쫓아낸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거다. 지식인들에게 호메이니는 혁명에 사용할 도구,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이들은 호메이니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호메이니가 "이슬람 국가" 같은 황당한 소리–호메이니는 몰랐겠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그의 주장이 "미친 소리"로 통했다–를 할 때마다 통역을 통해 빼버렸고, 서방 세계는 순화된 버전의 호메이니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또 다른–좀 더 심각한–문제가 있었다. 호메이니의 말은 서방 세계만 듣고 있었고, 정작 이란에서 봉기해야 할 이란 사람들은 들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식인들이 호메이니를 동원한 진짜 이유가 이란인들을 길거리로 끌어내려는 거였는데 말이다.

이때 기발한 방법이 동원된다.


'실수로 만든 혁명 지도자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