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독재 정권이 그러듯, 이란의 팔라비 왕가는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신문과 TV, 라디오가 모두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호메이니의 말은 이란에 있는 '타깃 오디언스'에 전해지지 못했다.

호메이니를 둘러싼 지식인들이 찾아낸 방법은 카세트테이프였다. (카세트테이프는 1963년에 세상에 처음 등장했고, 1970년대 말이면 이미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옮긴이) 호메이니는 매주 주말 저녁, 기도가 끝난 후 한 시간 안팎의 연설을 하곤 했고, 이 연설은 외국 기자들이 듣지 않았기 때문에 통역을 할 필요가 없었다. 더 중요한 건, 그렇기 때문에 그의 "미친 소리"를 굳이 감추거나 순화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들은 호메이니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놔두고, 그걸 녹음했다. 호메이니는 녹음된 테이프에서 "샤(팔레비 왕), 너는 왕이 아니다. 너는 더러운 반역자다" "인민은 이슬람을 믿는 정치가를 원한다" "이슬람은 독재가 아니다. 이슬람은 신정체제(神政體制)다" 따위의 주장을 마음껏 한다. 연설이 끝나면 사제가라는 그 테이프를 지하실로 가져가서 테이프 앞부분에 "위대한 지도자의 말씀"이라는 말과 날짜를 녹음했다.

사제가라와 동료 지식인들은 이 녹음을 이란인들에게 들려줄 방법으로 국제 전화를 생각해 냈다. 그 집에는 국제 전화를 할 수 있는 전화선이 있었다. 마침 이란의 전화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수신자 부담 국제전화를 개통했고, 그걸 통해서 이란에 전화하고 수화기에 대고 호메이니의 연설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틀었다.

프랑스에 있던 지식인들은 호메이니의 연설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걸 들을 이란 사람들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이슬람 국가 건설" 같은 주장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온다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국민이 거리로 나와야 혁명이 시작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란 쪽에서는 전화로 전해지는 호메이니의 음성을 받아 녹음했고, 이를 다시 틀어봤다. 지금 기준으로는 잡음이 많았지만, 내용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테이프가 완성되었다. 이런 방법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들은 본격적으로 호메이니의 연설을 보내어 테이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번에 여러 전화기로 전화할 수 있는 컨퍼런스콜을 사용했고, 자동 응답기(당시에는 일반 카세트테이프로 작동했다)로 녹음했다.

프랑스의 시골에서 연설하는 호메이니 (이미지 출처: Tehran Times)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약 9시간 분량의 연설 테이프는 또다시 여러 녹음기를 통해 복사되고, 재복사되어 수천, 수만 개의 테이프가 이란에 퍼져나갔다. 테이프를 받은 이란 사람들은 집 거실에서, 시장에서, 모스크에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전국에서 9만 개의 모스크에서 이 테이프를 복사해서 배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바이럴"이었다.

"요거트는 하얗다"

호메이니의 연설은 그 안에 담긴 과격한 메시지 뿐 아니라, 그의 말투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사제가라는 호메이니의 연설을 이렇게 평가한다. "세상의 유명한 정치인들을 보면 다들 말을 잘하고 연설도 아주 좋죠. 하지만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특히 문법이 하도 엉망이어서 제가 채점을 했다면 D나 F를 주었을 겁니다."

테헤란에서 뉴욕타임즈 특파원 활동을 17년 동안 했던 나질라 파티(Nazila Fathi)에 따르면 호메이니가 동사를 잘못 사용할 때가 많고, 억양도 시골 억양이라고 한다. 파티는 어린 시절 이란에서 자라면서 사람들이 호메이니 테이프를 듣는 걸 봤다. 그런데 말을 이상하게 하는 바람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듣고 웃었단다. "당시에 사람들이 호메이니의 말을 두고 하던 농담이 있어요, '요거트는 하얗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문장이 하나같이 그렇게 짧고, 너무나 뻔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웃었죠."

호메이니와 무관한 얘기지만 그 시점에 헐리우드에서 나온 'Being There'라는 영화가 있다. (한국에는 '찬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 남자가 "봄이 오면 꽃이 핀다"라는 식의 아주 당연한 말만 짧게 하는 바람에 주위에서 그의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현자(賢者)라고 불리게 되고, 유명해진다는 내용. 호메이니가 혁명의 영웅이 되어 이란으로 귀국한 1979년에 나온 영화이지만, 관련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평범한 이란 사람들에게는 달랐다. 호메이니는 농촌 출신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이란인들도 농민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도 그들의 부모는 농촌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런 이란인들에게 호메이니의 말투는 아주 익숙했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하던 그런 말투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여 앉은 거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 보라.

테이프로 듣는 호메이니의 말투는 정치인이 기자에게 하는 것과 달랐다. 정치인이 연단에서 하는 연설과도 달랐다. 마을에서 드물게 보는 TV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말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우리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면서 "여러분도 동참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야 하고, 당신이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면? 위대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데 팔레비 왕 한 사람이 그 길을 막고 있다고 한다면?

호메이니의 말은 이란인에게 정체성을 심어주었고, 목적을 부여했다. 그런 그의 연설을 이란인들은 반복해서 들었고, 당시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최면에 걸린 듯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최면에 걸린 것처럼 행동했다. 호메이니가 파업을 지시하면 파업을 시작했고, 가두 시위를 지시하면 길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팔라비 왕가를 이란에서 몰아내라고 하자 사람들은 마치 좀비처럼 일제히 봉기해서 정말로 왕정을 끝냈다.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시골 정원에 앉은 호메이니는 그렇게 카세트테이프를 사용해 팔라비 왕조를 몰아낸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방법은 그를 이용하려는 젊은 지식인들이 고안해 낸 것이고, 이들은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호메이니와 함께 에어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를 떠나 개선장군처럼 테헤란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들이 계획에 차질이 생겼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 기내에서 일어난다.

이란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의 호메이니 (이미지 출처: AP News)

'실수로 만든 혁명 지도자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