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방문 ② 2023년의 바이든
• 댓글 남기기베를린 장벽이 세워져도 개입을 꺼렸던 케네디가 베를린으로 달려가 서베를린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연설을 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우크라이나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크라이나를 다시 자신의 손안에 넣으려는 러시아가 2014년에 크름(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뒤이어 동부의 돈바스 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은 흐루쇼프가 베를린 장벽이라는 과감한 행동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개입 의지를 시험하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2014년 미국의 대응도 1961년과 비슷했다. 서방 국가들은 푸틴의 도발을 두고 긴장했지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직접 싸우지 않는 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포함되지도 않은 나라에 군대를 보낼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그 이후로 군사 고문단을 보내는 등의 조용한 원조(트럼프는 이마저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보류하겠다고 위협했다)를 했을 뿐이다.
러시아가 전면 침공을 계획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여론 변화를 보면서다. 한국의 진보 진영에도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불안을 키워서 전쟁이 나게 했다"라는 크렘린의 말을 그대로 가져다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주객이 전도된 주장이다. 러시아의 위협을 떠나 EU로 가고 싶어 하는 우크라이나의 여론이 젤렌스키를 당선시킨 것이고, 젤렌스키가 그 여론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아닌) 푸틴이 불안을 느끼고 침공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푸틴은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 실수를 저질렀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푸틴이 '젤렌스키의 EU 가입 행보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바탕으로 어설픈 침공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1년 전 오늘을 떠올려보면 기억하겠지만, 당시 세계는 "우크라이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빠르면 사흘, 길어봐야 일주일이면" 수도가 함락되고 대통령은 국외로 피신해서 망명 정부를 세울 거라는 게 거의 모든 언론의 예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원조를 해주고 러시아의 침략과 관련한 첩보를 제공해준 미국 정부조차 그런 시나리오 하에 젤렌스키에게 피신을 권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보다 더 나은 정보를 가진 조직이 아니라면 다른 예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침공 직후부터 우크라이나는 세상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러시아에 강하게 저항했고, 세계인을 그들의 팬으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의 팬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조 바이든이다.
그런 바이든을 끊임없이 졸라 무기를 받아내는 젤렌스키와 그런 젤렌스키에게 처음에는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다가 결국 다 들어주는 바이든을 보면 선물을 달라고 떼쓰는 아이와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는 마음 약한 아빠를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잘 보면 패턴이 있다고 한다. 미국은 자기네가 제공한 무기가 제대로 사용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더 강력한 무기를 함부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전차미사일(재블린) 같은 휴대용 무기만을 줬는데 그걸 너무나 유용하게 사용해서 러시아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것을 확인하자 휴대용 공격 드론을 제공했고, 155mm 대포를 줬더니 기대 이상으로 잘 사용하는 것을 보고 다연장 로켓 시스템(하이마스)을 제공했고, 그걸 또 잘 사용하자 브래들리 장갑차를 약속했고, 마침내 M1 에이브람스 주력전차까지 약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이 부자 나라이고, NATO 국가들이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줄 수 있는 무기가 무한한 것은 아니다. 자국의 방위를 위해서 남겨 둬야 할 무기까지 줄 수는 없으니 이제 우크라이나도 무기를 좀 아껴서 쓰라는 말이 몇몇 나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나라들이 러시아와는 달리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세금을 내는 유권자들의 생각이 바뀌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언제든지 끊길 수 있다. 푸틴이 공공연하게 장담하는 게 바로 서방 국가들이 지쳐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멈출 때가 곧 온다는 것이다.
푸틴은 이번 겨울이 유럽인들이 연료 부족으로 난방이 힘들어져 생각을 바꾸게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년보다 따뜻한 겨울이었던 데다가 독일 등의 국가들이 잘 대비한 결과, 겨울은 큰 문제 없이 넘어가는 듯하다. 하지만 각국에서 볼멘소리는 계속 나오고 있고, 특히 가장 중요한 미국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금 지출이 너무 크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는 점점 확산하면서 '어쩌면 미국도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조심스런 전망이 언론에 나온다. 바이든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하면서 "우크라이나가 필요하면 언제까지라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문제는 푸틴이 바이든의 말을 얼마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느냐다.
이게 바이든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하게 된 배경이다.
바이든과 젤렌스키는 두 달 전에 이미 만났고, 논의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통화할 수 있다. 미국의 고위급 인사가 방문할 필요가 있다면 의원들이 있다. 실제로 낸시 펠로시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키이우를 찾아가 젤렌스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도 바이든이 굳이 위험한 곳을 (그가 머무르던 중에도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방문한 이유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계속될 것이고, 그걸 미국이 보장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대통령의 방문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Ready, Player Two
백악관은 바이든의 키이우 방문을 몇 달 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국제 정세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전쟁 1주년이 되는 시점에 바이든이 방문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겠지만, 백악관 내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극비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 완성되어 바이든이 비행기에 오를 때가 되자 크렘린에 통보해서 바이든이 우크라이나에 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러시아가 엉뚱한 생각을 품을 수도 없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무엇보다 이건 미국이 그만큼 자신 있다는 얘기고, 이런 자신감의 표현은 항상 제로섬 게임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푸틴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전쟁터의 한복판에 들어가서 걸어 다닌다는 건 러시아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날인 21일, 러시아가 핵무기 감축 조약(뉴스타트)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불편한 심기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 측에서는 러시아가 항상 하는 공허한 위협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푸틴은 다음 날인 22일에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나온 공개적인 발언은 두 나라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는 제3자를 겨냥하지 않고, 제3자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더욱이 제3자의 협박을 거부한다"라는 내용으로 미국을 겨냥했지만, 특별히 새로운 건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진짜 협력'에 대한 정보는 며칠 앞서 나왔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새로운 정보에 따르면 중국이 러시아에 군사적(lethal)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중국은 러시아가 무기 지원을 요청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현재 무기 부족을 겪고 있는 러시아가 손을 벌릴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중국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이 이를 부인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러시아와의 관계에 "한계가 없다"라고 말하지만, 엄연한 침략국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가 무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반도체 등의 부품을 지원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것조차도 비밀로 하고 있을 만큼 부담스러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중국에 대해 미국이 중국이 러시아를 도우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라고만 하고 그걸 공개하지는 않은 것은 중국에 이를 부인할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중국이 부인한 것은 그 경고가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전쟁에서 중요한 플레이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의 경제가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지만 중국이라는 시장이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으로 가고 있고, 미국이 우려하는 것처럼 러시아는 결국 중국에 무기 지원을 부탁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푸틴 정권의 붕괴로 자기네와 접경한 러시아가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푸틴이 난관에 빠지면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무기를 지원했다가는 이미 디커플링(decoupling)이 진행 중인 미국에 이어 유럽 경제와도 단절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에게 러시아는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뜨거운 감자다.
중국이 한국 시간으로 오늘(24일), 전쟁 1주년을 맞아 평화 협상안을 내놓겠다고 한 것도 이런 난감한 상황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젤렌스키가 중국이 이 문제에서 중재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 그런 역할을 하기는 힘들다. 중국은 자신의 이익을 걸고 판에 들어와야 할 (혹은 이미 들어온) 플레이어이지, 물러나서 심판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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