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옷과 주머니 ④
• 댓글 남기기의복의 발전사에서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었던 이유로 "자연의 순리" 다음으로 많이 등장한—그리고 지금도 자주 언급되는—건 여자들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유행에 순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여자들이 원하지 않았을 뿐이지, 주머니가 달린 옷을 만들어 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면 해결되었을 문제라는 얘기다. 사실일까?
당시 여자 옷은 양재사(dressmaker)들이 만들었다. 남자 옷은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산업화를 거쳐 기성복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여자 옷은 몸에 딱 붙는 디자인에 정교한 스타일을 따르고 있어서 일일이 재단해서 만들어야 했다. 여성 참정권론자였던 엘리자베스 스탠턴(Elizabeth Stanton)이 1895년에 쓴 글은 이들 양재사와 고객 사이에 벌어진 실랑이를 잘 보여준다. 스탠턴이 양재사에게 원하는 디자인을 이야기하면서 주머니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옷에 주머니를 넣을 공간이 없다며, 주머니를 붙이면 "보기 흉하게 툭 튀어나올 것"이라고 반대했다. 주머니를 요구하는 스탠턴과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말고 전문가의 충고를 따르라는 양재사 사이에 오랜 줄다리기 끝에 결국 주머니를 넣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나중에 완성된 옷을 받고 보니 주머니를 넣지 않았다는 것.
주머니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무시당한 스탠턴의 이야기는 "여자는 좀처럼 임금 협상을 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연상시킨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회사와 임금 협상을 해서 자신의 몸값을 높이고, 그 결과 더 유능한 직원처럼 보이게 되는데 여자들은 회사가 주는 대로 받기 때문에 남녀의 임금 격차가 벌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는 절반만 진실이다.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약간 더 적은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임금 협상에 나서도 여자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 요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했다는 건 편리한 핑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는 사이 기술은 계속 발전해서 더 많은 물건이 "포켓 사이즈"로 제작되고 있었다. 가령 이스트먼 코닥(Eastman Kodak)에서 나온 사진기가 그렇다. 코닥은 사진기가 얼마나 작은지를 홍보하면서 "코닥을 여러분의 주머니에 넣으세요(Put a Kodak in your pocket)"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물론 그 문구가 들어간 광고(아래 왼쪽)에서는 남자 재킷 주머니가 등장한다. 코닥은 시장을 넓히기 위해 여성 고객을 대상으로 한 광고도 만들었지만, 여자 옷에는 주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광고 속 여자 모델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다.
책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지만, 사진기와 같은 제품을 손에 들고 다닐 경우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다. 몇 년 전 한 대학교 캠퍼스 옆에서 아이폰 수리점을 운영하는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난 후에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깨진 화면을 수리하러 오는 사람 중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 많으냐는 질문이었다. 내 주변에서 화면이 깨진 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답은 "깨진 화면 수리를 원하는 고객은 90%가 여성"이었다. 그 이유를 두고 온라인에서도 많은 추측이 있지만, 여자 옷에 스마트폰이 들어갈 주머니가 남자 옷 만큼 많지 않아 손에 들고 다니는 시간이 길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핸드백 vs. 주머니
하지만 모든 여성이 주머니의 부재, 혹은 부족을 사회, 문화적 압력의 문제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버지니아 예먼(Virginia Yeaman)은 1918년 보그(Vogue)에 쓴 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주머니는 종종 여자 옷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가령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여자 옷에도 주머니가 달렸다) 유행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고 했다. 예먼은 주머니가 없으면 난리가 날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궁극적으로 주머니 때문에 옷이 불룩해지느니 주머니가 없이 살겠다는 선택을 했다고 주장했다. 여자들이 주머니 없이 사는 편을 선택했다는 예먼의 주장이 맞다면, 그건 옷에 붙은 주머니를 대신할 만한 대안이 정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현대적인 핸드백의 등장이다.
앞의 글에서 언급했던 천으로 만들어진 1800년대의 레티큘과 달리, 20세기에 등장한 여성의 핸드백은 19세기 말에 등장한 남성용 가방처럼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튼튼한 손잡이도 달려 있었다. 손에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 손을 사용할 수 없고, 쉽게 분실한다는 단점 때문에 주머니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핸드백의 유행은 빠르게 퍼졌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여군부대(WAAC)를 만들었을 때 정식 제복에 어깨에 걸 수 있는 핸드백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기이해 보이지만 남자 군인들처럼 사용할 수 있는 주머니를 넣느니 핸드백을 걸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던 걸로 보인다. (이런 전통은 미군에서는 사라졌지만, 일본의 자위대에는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옮긴이) 아래 사진 속 포스터를 보면 여군의 가슴에는 남자 군인들의 제복과 같은 위치에 주머니가 붙어있지만, 자세히 보면 주머니 덮개만 있을 뿐 주머니는 없다. 여자라면 심지어 군인이라도 옷에 주머니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지독한 고정관념이 존재한 거다.
그런데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된 미군의 판단에는 흥미로운 논리가 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여성이 군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 있었다. 군인은 남성의 역할이라는 오랜 고정 관념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에 미군에서는 여군이 남자와 똑같은 군복을 입을 경우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라는 오해를 살 것을 염려했고, 군인이라도 여자들에게는 "여성스러운" 옷을 입히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정복에 바지 대신 치마를 도입한 거다. 여성성에 대한 이런 배려 아닌 배려는 가슴 주머니에도 적용되어서, 남자들처럼 여군이 가슴 주머니에 담뱃갑, 라이터 같은 물건을 넣으면 가슴 모양이 살아나지 않고,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아예 덮개만 놔두고 주머니를 없앴다.
그 결과, 군복을 입는 사람 입장에서의 실용성보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군복이 탄생하게 되었다.
익숙해진 불편함
2017년 버즈피드(BuzzFeed)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참가한 남성 네 명의 옷에 달린 주머니를 꿰매어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일상생활을 하게 한 거다. 참가자들은 밖에 나가면서 사원증이나 지갑을 놓고 나가는 실수를 했고, 테이크아웃 음식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데 애를 먹었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폰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생했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 본 남자들은 여자가 현대 세상에서 주머니 없이 사는 건 전기가 발명된 세상에서 어둠 속에 사는 거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옷에 주머니가 없거나, 지나치게 작고 적은 주머니로 살아온 여자들은 하루 실험에 참여한 남자들보다는 익숙하게 일상생활을 할 거다. 하지만 여자들은 불편함에 익숙해진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당연히 불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조건화되었다.") 익숙해지지 않은 여자들도 있다. 바로 어린 여자아이들이다. SF 소설가인 헤더 카진스키(Heather Kaczynski)는 세 살짜리 딸이 자기 바지에 붙은 주머니가 손을 넣을 수 없는 가짜 주머니인 걸 알고 불같이 화를 낸 얘기를 소셜미디어에 써서 화제가 되었다. 여자라면 세 살짜리도 (장난감을 넣지 못해 들고 다녀야 하는 차별을 겪어야 할 만큼) 몸매를 살리는 옷을 입어야 할까?
카진스키의 말처럼 여자 옷의 주머니 문제는 "더 큰 불평등에서 비롯된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다. 진짜 문제는 남성과 여성 중 남성만이 기능하는 옷을 입을 수 있고, 입게 될 것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그걸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옷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말이 맞다면, 주머니가 없는 여자의 옷은 여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게 주머니 문제의 핵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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