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식욕을 잃을 때
• 댓글 2개 보기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미국은 세계에서 비만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비만율에서 미국보다 높은 나라들은 대개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이다. 이들을 제외하면 미국 인구의 비만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그런 미국의 인구수를 생각하면 세계에서 비만 인구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은 미국이다.
왜 미국의 비만율이 높은냐는 질문이 내게는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내게는 미국 체중이 있고, 한국 체중이 있다. 한국에 머물 때와 미국에 머물 때 내 체중은 대략 5~6kg의 차이가 생긴다. 물론 한국에 갈 때는 아무래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니 가기 전에 다이어트를 하게 되지만, 중요한 건 한국에서 특별히 음식을 적게 먹지 않아도 미국에서보다 낮은 체중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다가 미국에 돌아오면 내 몸무게는 '미국 체중'을 회복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아무리 운동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비중이 높은 수도권에서 매일 걷는 거리는 미국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뉴욕시에서는 대충 가능하다. 그래서 맨해튼 사람들이 미국 평균보다 훨씬 날씬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음식이다. 요즘은 한국에 사는 사람들도 배달 음식 등으로 좋지 않은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하고, 나도 한국에 있는 동안에 배달 음식을 제법 먹었지만, 평균적인 미국인이 먹는 양이 훨씬 더 많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의 경우 양을 아주 풍성하게 줘서 다 먹지 못한 음식을 포장해서 가는 문화가 20세기 말부터 생겼다고 하는데 (그렇게 가져간 음식을 다음 날 점심으로 먹는 문화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음식 남기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란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다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요소는 대형 식료품점이다. 빅박스 그로서리(big-box grocery)라고 부르는 이런 식료품점은 단가를 낮추기 위해 묶음 판매만 하는 게 아니라 내용물의 단위를 크게 한다. 싸기 때문에 쉽게 집어 드는데, 양이 많기 때문에 한 번 뜯으면 빨리 먹어야 하는 음식도 많다. 코스트코(Costco)에서 파는 머핀은 다른 곳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큰데, 그런 음식들을 몇 개 사 와서 상하기 전에 먹으려고 하면 과식을 피하기는 힘들다. 개인적인 경험이라 과학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나는 코스트코에 다녀온 후 일주일 안에 체중이 증가한다. 하지만 나만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미국에서 한 연구에 따르면 음식점과 대형 식료품점이 몰려있는 것이 그 지역의 비만율을 높이는 주요 요소로 밝혀졌다.
결국 미국의 비만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미국인들이 더 많이 움직이고, 더 적게 먹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 나오지만, 넓은 땅을 이동해야 하고 걷기에 부적합한 외부 환경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미국인들이 식욕을 덜 느끼게 만드는 거다.
오젬픽의 혜성 같은 등장
미국에서 식품업계만큼이나 강력한 집단이 있다면 제약업계가 아닐까? 미국의 패스트푸드업체와 식료품업체들이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미국인들의 체중을 늘려 놓았다면, 제약회사들은 체중을 줄이는 약을 개발하는 데 수십 년을 매달렸다. 하지만 투입량과 산출량이라는 물리학의 법칙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제약회사가 노려야 하는 것은 '적게 먹게 만드는 약'이었고, 좀 더 정확하게는 안전한 식욕 억제제였다. 부작용으로 식욕을 떨어뜨리는 약은 많지만 그걸 안전하게 해줄 약이 있어야 했고, 그걸 개발하는 기업은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수익을 낼 거라고 했다.
그런 약이 개발된 것 같다. 바로 오젬픽(Ozempic)이다.
잘 알려진 대로 오젬픽은 다이어트약이 아니라, 덴마크의 제약회사 노보노디스크(Novo Nordisk)가 만든 당뇨병 약이다. 일주일에 한 번 주사를 맞아 혈당 조절을 도와준다. 미국 식약청(FDA)이 이를 당뇨병 약으로 승인한 게 2017년이다. 하지만 이 주사를 맞은 당뇨병 환자들 사이에 식욕이 줄어들면서 체중을 감량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당뇨병 환자가 아닌 사람들, 특히 돈이 많고 체중과 수익이 직결되는 헐리우드 셀레브리티들이 이 약을 다이어트약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특정 약이 개발된 것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오프레이블(off-label, 허가 외 목적)"은 종종 있다.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되었다가 발기부전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히트 제품이 된 비아그라(Viagra)가 대표적인 오프레이블 약품이다. 노보노디스크도 오젬픽의 새로운 효능과 인기를 알게 되면서 일부 성분을 바꿔서 위고비(Wegovy)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2021년에 출시했다. 출시와 함께 위고비는 사고 싶어도 사기 힘들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고, 위고비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뇨병 약인 오젬픽을 찾으면서 당뇨병 환자들이 필요한 약을 구하지 못하는 일까지 생기고 있다.
업계에서는 전 세계, 특히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비만 인구를 고려하면 위고비는 2000년대의 비아그라나 보톡스와 같은 히트 약품이 될 수 있다면서, 이로 인해 노보노디스크가 유럽에서 시가총액 1위의 기업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오젬픽-위고비의 인기를 지켜보던 다른 제약사 일라이릴리(Eli Lilly)도 자사의 당뇨병 약에서 비슷한 효능을 확인한 후 마운자로(Mounjaro)라는 경쟁 상품을 내놓은 상태.
세상이 식욕을 잃을 때
이런 약품의 등장과 인기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기업들이 있다. 바로 대형 식품 기업들이다. 식욕 억제제의 인기가 장래 이들 기업의 매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에 따르면 위고비 등의 약을 복용한 사람들은 하루 최대 30%의 칼로리를 덜 섭취한다. 만약 하루 2,000칼로리를 섭취하는 사람이 30%를 적게 먹는다는 것은 감자칩 한 봉지, 콜라 1병, 그 밖에 다른 간식을 먹지 않는다는 얘기다.
기사에 등장하는 어느 가정의 경우, 식욕 억제제를 복용한 이후로 간식도 적게 사고, 외식이나 배달 음식도 줄어들면서 식료품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20% 줄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식품 기업 중에서도 캔디, 초콜릿, 과자류의 판매 비율이 높은 허쉬(Hershey), 몬델레즈(Mondelez) 같은 기업들이 "오젬픽 시대"에 취약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들 기업은 오젬픽의 위협이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미 매출이 줄고 있다. 올해 들어 미국 500대 기업의 주가지수(S&P 500)가 11% 상승하는 동안, 식음료 부문은 14% 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식욕 억제제의 인기가 이어진다면 이들은 어떤 대안이 있을까?
소비 패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업들은 열량이 높은 스낵류에서 고급 식품으로 제품군을 전환하고, 대용량 포장을 소량으로 바꾸고, 무엇보다 과일과 생선 등 신선한 식재료의 판매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식욕 억제제가 인기를 끄는 세상에서도 달고 열량 높은 스낵을 찾을 사람은 많다고 생각하는 스머커(Smucker)의 CEO 마크 스머커(Mark Smucker)는 싸구려 스낵의 대명사인 트윙키(Twinkies)를 만드는 호스테스(Hostess)를 46억 달러에 인수했다.
게다가 지금 당장 식욕 억제제가 인기라고 해도 앞으로 추세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회의론도 존재한다. 지금 당장은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온 지 오래되지 않은 약품이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다는 것. 제약사에서는 아직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 주사 형태로 복용해야 하는 식욕 억제제가 알약의 형태로 쉽게 복용하게 되는 때가 이 약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기업인 출신의 스캇 갤로웨이(Scott Galloway) 교수는 식욕 억제제가 가져올 변화에 대해 무척 긍정적이다. 선진국의 많은 질병이 궁극적으로 비만에서 비롯된 것들인데 이런 약을 통해 사람들이 체중을 줄일 수 있다면 AI가 가져올 변화보다 훨씬 더 크고 긍정적인 변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성인병 인구가 감소하고 더 많은 사람이 자기 몸에 대해 자신감을 회복한다면 분명 좋은 변화가 맞다.
제외된 사람들
하지만 한 달에 1,000달러(130만 원)에 달하는 주사를 꾸준히 맞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국 가정의 중위 소득인 7만 5,000달러인데 일 년에 1만~1만 6,000달러나 하는 주사를 맞으면서 건강하고 날씬한 체중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계층에 국한된다.
무엇보다 미국에서는 신선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식료품점이 근처에 없어서 건강에 좋지 않은 고열량 가공식품에만 의존해야 하는 음식사막(food desert, 반경 1.6km 내에 슈퍼마켓이 없는 지역) 거주자가 인구의 6%에 달하고, 전체 인구의 1/6이 그날 그날의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food insecure) 상황에 있다. 게다가 이들은 건강보험이 없을 확률이 아주 높다.
미국의 빈곤 지도(아래)와 비만 지도(맨 위) 사이에는 큰 교집합이 존재한다. 이들에게는 맥도널드는 가깝지만, 야채와 생선을 파는 가게는 멀다. 이들에게 식욕 억제제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의 건강을 무시하고 고칼로리의 중독성 높은 음식을 팔던 기업들이 오젬픽이 피해가는 시장을 과연 포기할까? 선진국에서 줄어드는 매출을 개발도상국에서 채웠던 담배회사들을 생각해 보면 미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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