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짧은 버전이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 게재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몰랐던 질병을 발견하는 일은 이미 알고 있는 질병의 치료법을 찾는 것만큼이나 길고 험난한 과정이다. 20세기 초에 쓰인 작품들을 보면 ‘폐병’, ‘폐병환자’라는 말을 종종 보게 되는데, 당시 폐병이라 불리던 병에는 각종 폐질환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단순 호흡곤란과 천식, 폐렴, 심하게는 결핵까지 다양한 질병들이 심한 기침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 ‘폐병’이라 불렸다. 그렇게 보면 사람들이 흔히 ‘허리를 다쳤다’고 하는 것도 폐병만큼이나 엉성한 표현이다. 단순히 무리해서 생긴 근육 결림부터 디스크, 골절까지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셸쇼크(Shell Shock)

그렇게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자세히 몰랐던 질병, 혹은 부상을 의학적으로 좀 더 세분화하는 과정이 있는가 하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는 바람에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도 흔하다. 대표적인 예가 ‘셸 쇼크(shell shock)’다. 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 영국군은 유럽 본토로 파견한 영국 병사들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다양한 증상을 호소한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명(귀울림), 두통, 어지러움과 손 떨림, 기억상실, 그리고 소리에 몹시 민감해지는 청각 예민증까지 포함한 이들 증상은 과거에 영국군이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영국군은 이 증상들을 통틀어 셸 쇼크, 즉 포탄이 터지는 데서 오는 충격의 결과라고 불렀다. 병사들이 호소하는 증상의 정확한 기제는 알지 못했어도 그 원인은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세계대전은 본격적인 대규모 현대전의 시초였고, 과거 병사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양의 포탄이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셸 쇼크는 영국의 정신과의사인 찰스 마이어스가 1915년에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포탄 혹은 폭탄이 터질 때는 파편으로 죽거나 다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공기 등으로 통해 전해지는 충격파(shock wave)는 근접한 병사들의 장기를 파괴할 수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청신경을 손상하고 뇌에 충격을 주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한 부상을 입힌다. 과거에는 이런 부상을 입고 전투력을 상실한 병사를 ‘겁을 먹었다’고 조롱했지만, 1차 대전 때 이런 병사가 속출하자 셸 쇼크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거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때는 이를 ‘전투 피로증(battle fatigue)’이라는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고, ‘전투스트레스반응(CSR)’이라는, 좀 더 의학적인 이름이 붙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이를 ‘외상후증후군(PTSD)’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앞서 말한 증상들의 좀 더 정확한 원인, 기제도 밝혀지고 있다.

심각한 질병, 향수병

그런데 거꾸로 발견 당시에는 심각한 질병으로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의 범주를 벗어나게 된 증상도 있다. 바로 ‘노스탤지어(nostalgia)’다. 우리말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시름’이라는 의미로 향수(鄕愁), 혹은 향수병(鄕愁病)으로 번역되지만 노스탤지어를 진짜 질병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진 1680년대 유럽에서는 걸리면 치료법이 없어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여겨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스위스의 용병은 중세 이후로 유럽 전역에서 활동했지만,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지에 주둔하면서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증상 역시 유럽의 군인들에게 처음 발견되었다. 당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스위스 출신의 용병을 고용하는 일이 흔했다. 유럽의 백년전쟁(1337~1453)과 같은 긴 분쟁의 결과로 뛰어난 전투기술을 습득한 병사들이 이를 직업화해서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군주들을 찾아 고용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특히 스위스 지역 병사들의 전투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면서 스위스는 용병을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직업의 특성상 용병들은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고향 스위스를 떠나 유럽 각지로 떠나 살던 용병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허깨비를 보거나 환청을 듣기도 했고, 슬픔(아마도 우울증)에 빠져 한숨을 쉬며 기력을 잃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병사도 있었다. 정확하게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인이 노스탤지어라고 적힌 병사의 사망기록들이 남아 있다.

원인을 찾아서

노스탤지어라는 ‘병명’은 누가 지었을까. 당시 스위스의 젊은 의사 요하네스 호퍼(Johannes Hofer)로, 귀향을 의미하는 노스토스(nostos), 통증을 뜻하는 알지아(algia), 두 그리스어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호퍼가 용병들이 겪는 특이한 증상들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그가 아직 의학도였던 19세 때였다고 한다. 그는 이 증상을 연구하다가 젊은 군인들이 문화와 관습이 전혀 다른 낯선 땅에 가서 적응하지 못한 채 ‘엄마의 젖’을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한심하게도 고향 땅에 대한 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한다”라는 어느 병사의 고백을 접하게 되면서 이들의 질병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결과로 생겼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지금은 비과학적으로 들리지만 호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동물의 영혼이 뇌 속의 섬유질을 진동시켜 고향의 생각을 일깨운다고 생각했다.

다른 의사 중에는 용병의 파견지역이 고산지역인 스위스와 기압이 달라서 생기는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지 못해 생긴다는 주장도 있었다. 나쁜 공기가 질병을 일으킨다는 생각은 서구에서 20세기 초까지도 지속되었다. 심지어는 용병들이 주둔하는 지역에서 소의 목에 다는 소 방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고막을 상하게 하고, 그렇게 상한 고막이 노스탤지어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소 방울 원인설’은 어쩌면 다른 이유에서 맞는 진단이었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낙농업이 발전한 스위스에서 자라면서 용병들이 흔히 듣던 소 방울 울리는 소리를 머나먼 타지에서 들으면 고향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요즘은 이렇게 시끄러운 소방울 소리가 소에게 고통이라는 이유로 없애자는 움직임도 있다.)

스위스 소방울은 작지 않다.

노스탤지어가 병이라면 어떤 치료법이 있었을까. 물론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라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스위스의 용병 산업이 유지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에 다른 질병의 치료법이라고 생각하던 방법들이 여기에도 적용되었다. 나쁜 피를 빼야 한다고 거머리를 사용하기도 했고, 높은 망루 위에 가둬 놓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하기도 했다. 훗날 한 프랑스 의사는 ‘고통과 공포’가 제일 좋은 치료법이라며, 향수병에 빠진 병사들에게 새빨갛게 달군 쇳덩어리를 배에 대고 지지면 병이 낫는다고 위협만 해도 치료된다는 황당한 ‘충격요법’을 제안했다.

결국 스위스 용병부대가 선택한 방법은 고향 생각이 나게 하는 모든 것들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소 떼를 몰며 부르는 목동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곡조를 휘파람으로 부는 것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병사들의 고향 생각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그런 노래를 허용함으로써 향수병을 달래는 게 나았을 것 같지만 말이다.

백인에게만 허용된 질병

노스탤지어/향수병에 관해 소개한 NPR의 스루라인(Throughline)에서는 향수병 이후에 어떻게 변해왔는지 추적한다. (참고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들려주는 스루라인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스루라인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2편에서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려 한다.) 특히 미국인들은 남북전쟁(1861~1865) 중에 병사들이 향수병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정작 아프리카에서 납치해 노예로 삼은 흑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고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백인들은 흑인을 가축처럼 취급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음식으로 먹는 동물들이 고통을 느끼거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이 생각(reflection)보다 감각(sensation)에 특화되어 있고, 따라서 슬픔은 잠시만 느끼고 잊어버린다고 '분석'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all men are created equal)"는 말을 독립선언문에 포함시킨 토머스 제퍼슨의 생각이다. 전형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과학자이자 발명가이기도 했던 제퍼슨이 그랬으니 당시 평균 백인들의 생각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달아난 남자 노예를 잡아주면 보상하겠다는 광고는 남북전쟁 이전 미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고, 광고 속에는 괴나리 봇짐을 진 삽화가 종종 들어갔다. 광고 속 노예가 35세임에도 "보이(boy)"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흑인 남성을 성인(man)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과 고향에서 분리되어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백인들은 노예가 왜 자꾸 탈출하려고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같은 처지에 있으면 당연히 탈출하고 싶었겠지만, 그들 생각 속 노예는 그만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따라서 탈출하려는 노예는 일종의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한사전에는 배회증(徘徊症)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으로 번역되는 drapetomania라는 "정신질환"은 향수"병"만큼이나 억지스러운 이름으로, '도망병' 정도에 해당한다. 1851년에 한 미국 백인의사가 흑인 노예들이 탈출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질환이다. 자유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임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걸 인정해도 흑인이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탈출 욕구는 질환이 되는 거다.

('나의 살던 고향은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