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Way Out ①
• 댓글 남기기아무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던 2016년 초 (그의 아내도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트럼프는 대선을 향한 첫 관문인 아이오와 경선을 앞두고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해서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내가 (뉴욕) 5번가 한가운데 서서 누군가를 총으로 쏴도 내 지지자들은 한 명도 이탈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I could stand in the middle of Fifth Avenue and shoot somebody, and I wouldn't lose any voters, OK?)"
트럼프가 이런 말을 농담이랍시고 할 수 있는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지지자들이 그를 그만큼 철저하게 추종한다는 것이고 (트럼프도 그 시점에서야 자신의 지지기반이 그토록 단단하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그가 평생 자신은 법을 빠져나갈 수 있고, 법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사실이다.
트럼프는 사업을 하던 1980년대부터 대통령에 당선된 2016년까지 4,000개가 넘는 소송에 연루되어 있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송에 연루될 수 있고, 그가 일했던 부동산업이 워낙 소송이 흔한 업종이라고는 하지만 4,000건 이상이라면 유별나게 많은 숫자다. 이렇게 많은 소송을 자신이 일일이 관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변호사들이 하지만, 트럼프가 변호사를 사용하는 방법은 다른 사업가들과 조금 다르다.
그는 자신의 변호사들을 법적인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전투견(attack dog)'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트럼프는 자신이 소송에 걸리거나 수사의 대상이 될 경우 변호인도 변호인이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상대방을 공격해 줄 사람을 원한다. 미국에서는 부자가 비싸고 공격적인 변호사들을 대거 동원해서 상대방이 소송을 포기하게 압박을 가하는 일이 낯설지 않고, 트럼프는 항상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트럼프가 믿고 자신하던 '파워'는 따지고 보면 돈과 변호사의 힘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평생을 자신이 법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큰 파워를 가졌다는 미 합중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의 자신감은 더욱 커지게 된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기분 내키는대로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후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처벌하기 힘든 행동을 대통령의 '통치 행위'라는 이름으로 거침없이 했다. 작게는 워싱턴 DC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호텔을 만들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의 투숙을 유도하는, 우리 기준으로는 공직자 윤리 위반부터 자신이 패배한 선거를 뒤집기 위해 내란을 선동하는 중대 범죄까지, 그에게는 전부 "대통령이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랬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연방법 위반으로 기소된 것이다. '아니, 얼마 전에도 기소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하고 궁금하다면, 맞다. 하지만 지난 3월에 기소된 것은 '성추문 입막음'과 관련해서 뉴욕주의 법을 어긴 혐의로 기소된 것이고 (이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연방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여기서 잠깐, 트럼프가 현재 기소당했거나, 각급 검찰이 기소를 준비하기 위해 수사 중인 사건은 큰 것만 추려도 현재 다섯 개가 된다. 아래의 내용은 워싱턴포스트가 정리한 것으로, 이번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두 번째 사건이다.
1. 포르노 배우에게 입막음 돈을 지불하면서 선거자금을 유용한 사건
2. 플로리다 자택에 국가 기밀문서들을 빼돌리고 수사를 방해한 사건
3.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2021년 1월 6일 의회 난입, 폭동을 부추긴 사건
4. 2020년 대선 때 조지아주 선거에 개입해서 득표수를 조작하게 한 사건
5. 대출, 세금 면제 등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치를 조작한 사건
하지만 이번 사건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히 첫 번째 연방법 위반 기소 사건이라서만이 아니다. 트럼프를 중범죄로 잡아넣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확실한 사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번 사건은 다르다," "이번에는 트럼프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트럼프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플로리다 자택(마라라고 리조트)으로 돌아가면서 국가 기밀문서가 담긴 상자 수십 개를 챙겼다. 트럼프가 가져간 건 단순히 통치 기간 중에 나온 메모 정도가 아니다. '일급비밀(TOP SECRET)'이라는 마크가 분명하게 찍힌 문서들이고, 여기에는 핵무기와 관련한 내용도, 국방부의 유사시 군사 전략과 지도를 담은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대통령이 재임 중에 남긴 기록은 단순한 메모조차 버릴 수 없도록 법이 규정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회의가 끝나면 자신이 남긴 메모를 모조리 찢는 습관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끊임없이 불법을 저지르고, 소송에 휘말리니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이유로 몸에 밴 습관으로 알려져있다. 따라서 백악관의 비서들은 트럼프가 없을 때 휴지통에서 그가 찢은 문서를 꺼내서 일일이 테이프로 붙였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트럼프는 아예 꺼내지 못하도록 화장실에 버렸다. (이를 보여주는 사진과 기사)
트럼프가 국가 기밀문서를 훔쳐 가서 보관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가 기록원(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은 이 문서들의 반환을 요청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트럼프가 이 요청에 순순히 따랐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불법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실수였다고 둘러댈 여지를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상황에서 꼼수를 부리며 버텼고, 결국 연방수사국(FBI)이 그를 상대로 소환장(subpoena)을 발부했다. 가져간 기밀문서를 모두 반환하라는 명령이었다.
만약 트럼프가 소환장을 받은 후에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모든 문서를 반환했어도 이 문제는 더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기소하는 일은 워낙 중대한 일이어서 검찰도 웬만해서는 칼을 뽑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트럼프가 큰 무리수를 둔다.
정부 문서를 모두 반환하라는 FBI의 소환장을 받은 트럼프는 이를 따르는 대신 얼마 전에 고용한 변호사 에반 코코란(Evan Corcoran)을 플로리다로 불렀다. 트럼프는 코코란에게 자신은 FBI의 소환장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가져온 상자 안에 있는 문서들은 아무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소환장에 아예 응하지 않거나, 아니면 서류 상자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물론 이는 불법을 모의하는 행위이고 이는 나중에 이 사건의 전개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런데 코코란이 플로리다에 도착하기 전, 트럼프는 자신의 수행비서 월트 나우타(Walt Nauta, 트럼프와 공범으로 기소되었다)를 시켜 보관하고 있던 기밀문서 중 64개의 상자 분량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감췄다. 코코란이 트럼프를 만나 살펴본 상자는 그렇게 중요한 게 빠진 것이었지만, 여전히 기밀문서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코코란에게 이 서류를 호텔 방으로 가져가서 민감한 것들을 빼라는 지시를 했다. (트럼프는 이 대목에서 말로 하는 대신 서류를 뽑는 손짓을 했다고 한다.) 민감하지 않은 것만 FBI에 넘기고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코코란은 FBI에 서류의 일부를 건넸다.
이를 받아 본 FBI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의 문서만이 반환되었고, 트럼프 자택 주변을 감시, 촬영하고 이웃들의 증언을 수집한 결과 서류 상자들을 다른 곳으로 빼돌린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수사관들은 자택 압수 수색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판사를 찾아가 수색 영장을 받아냈다. FBI가 수색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트럼프의 추종자들은 "연방 정부의 압제"에 저항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사관들은 2022년 8월 8일, 트럼프가 집을 비운 사이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집 안 곳곳에 숨겨진 서류들을 찾아냈다.
트럼프는 이 서류들을 리조트 내 강당, 화장실, 샤워실 등에 아무렇게나 보관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국가 기밀 서류를 빼내서 보관하고 있었을까?
'No Way Out ②'에서 이어집니다.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