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정부가 유지해 온 모든 제도와 관습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하는 데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정해진 절차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다. 가령 트럼프가 종종 받는 건강 검진이 그렇다. 트럼프가 받은 검진에는 인지검사도 들어 있어서 언론의 관심이 되기 때문에 트럼프 본인이 원할 리 없지만, 받아야 한다. 건강 검진을 강제하는 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른 대통령은 다 했는데 고령의 트럼프가 하지 않는다면 뭔가를 숨긴다는 의심을 받아 정치적인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검사를 받고 (트럼프가 항상 하는 것처럼) "최고 점수를 받았다"고 과장해서 발표하는 게 받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관행을 따르게 된다.

지난 11월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도 다르지 않다. 이 문서의 경우 모든 대통령이 임기 중에 한 번은 발표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언제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하는 규정도 없다. 법적으로 요구되어도 처벌 규정은 없는, 즉 강제력이 없는 절차를 흔히 무시하는 트럼프지만, NSS만은 작성해서 발표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서가 발표된 직후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이 지켜 온 외교, 안보 원칙, 즉 자유를 수호하고, 세계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동맹국을 돕는다는 원칙을 대대적으로 수정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즈의 데이비드 생어(David Sanger) 기자는 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미국이 아틀라스(그리스, 로마 신화 속 티탄)처럼 전 세계 질서를 떠받들던 시대는 끝났다"라는 문장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