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대법관 ③
• 댓글 남기기전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로버트 보크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려다가 크게 실패하는 모습을 부통령의 위치에서 지켜봤던 조지 H.W. 부시는 1990년 자신에게 기회가 오자 보수적인 가치(=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빼앗을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민주당이 눈치채지 못할 "스텔스 후보"를 원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의회의 대법관 인사청문회 때는 후보 판사의 과거 판결 기록은 물론 발언까지 자세히 검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수터는 원래 공개석상에 나서서 발언하는 걸 꺼리는 인물이었고, 그가 임신 중지 등에 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이건 공화당에 유리했다. 단, 그가 정말로 보수적인 어젠다를 갖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부시는 비서실장 존 스누누가 수터를 추천했을 때 그의 판단을 믿었던 것 같다. 스누누는 뉴햄프셔주의 주지사였고, 수터는 줄곧 뉴햄프셔주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부시가 수터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을 때 기자들은 임신 중지에 대한 수터의 견해를 알고 싶었다. 유명한 백악관 출입 기자 헬렌 토머스(Helen Thomas, 케네디부터 오바마 정부까지 취재했다)는 부시에게 "수터 판사에게 임신중지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물어보셨나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를 비롯해 요즘 쟁점이 되는 문제들에 관해 물어보셨습니까?"라고 물었고, 부시는 "아닙니다. 저는 딱 그분을 딱 한 번 만나 뵈었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인) 제가 특정 이슈에 대해서 판사님께 물어보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다른 기자는 "그럼 수터가 대법관이 되면 임신 중지 문제를 어떻게 판결할 거라 예상하십니까?"라고 물었고 부시는 "여러분이 제게 임신 중지 문제에 관해 하루 종일 물어보셔도 제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 부시는 왜 수터가 자신의 어젠다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스누누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대신해서 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수 있었고, 그 질문을 받은 수터는 스누누에게 "임신 중지는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누누와 부시는 이 대답을 바탕으로 그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참고로, 스누누가 인용한 수터의 말은 원문으로 "Abortion is an abomination"이다. Abomination은 기독교 성경, 특히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반드시 고어(古語)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은 거의 예외 없이 기독교인이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할 때다. 스누누는 임신 중지를 두고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은 당연히 보수 기독교적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스누누가 추천한 후보는 수터만이 아니었고, 수터는 그가 생각한 최고의 후보도 아니었다. 공화당(과 보수 기독교인들)에 중요한 이슈와 관련해 내린 판결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시는 수터가 가장 마음에 들었고, 대통령이 제일 선호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부시가 고른 후보는 당연히 임신 중지에 반대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어젠다를 가진 사람이지만, 그렇게 말을 하고 다니지 않아서 기록이 없을 뿐이라고 넘겨짚은 것이다.
그렇게 부시 대통령은 수터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고, 의회에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이번에도 민주당의 조 바이든 상원의원이 이끄는 청문회였다.
이 청문회에서 데이비드 수터는 자신과 관련해서 나온 많은 신문기사를 언급하면서 "그 많은 신문 기사가 발행되기 위해 숲에서 잘려나간 나무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환경 문제라면 요즘 미국의 분위기라면 보수주의자들 머리에는 경고등이 켜졌겠지만, 그때는 달랐던 것 같다.) 물론 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공화당이 추진하던 로 대 웨이드 판결 뒤집기를 수터가 해낼 것이냐에 있었다. 위원장인 바이든 상원의원이 그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수터가 3년 전 로버트 보크처럼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밝힌다면–그리고 그의 의견이 임신 중지에 부정적이라면–바이든과 민주당은 총력을 다해 그의 인준을 거부할 것이었다.
수터의 답변은 이랬다. "제가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이후로 모든 사람이 그 하나의 이슈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제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대법관이 된 후에 자기가 어떤 판결을 할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의원들은 그의 생각을 알아내려고 물고 늘어졌지만, 수터는 끝까지 답을 하지 않았다. 가장 원론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건에 대한 판결은 그 사건을 살펴본 후에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수터의 이런 답변 태도를 본 공화당 사람들은 그가 민주당 의원들의 질문에 확답을 거부하면서 교묘히 빠져나갔다고 좋아했다.
그를 추천한 스누누 비서실장은 당시만 해도 "수터 지명은 홈런"이라고 좋아했다. 수터가 그에게 말한 게 맞다면 그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는데 청문회에서 영리하게 답변하면서 인준을 받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진보 진영에는 수터가 대법관이 되는 것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는 것을 의미했다. 보수 대법관이 5명이면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데, 수터가 그 다섯 번째 인물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터가 청문회 서두에 한 발언을 귀 기울여 들었다면 생각을 달리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기가 평생 살아온 뉴햄프셔주의 작은 마을 위어(Weare)는 동네 사람들이 아주 가깝다며, 그렇게 이웃끼리 가깝게 지내는 곳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상원의원들에게 자기 아이들의 양육권을 빼앗긴 후 이를 되찾으려 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법은 궁극적으로 고상한 철학과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임을 설명한 것이다. "대법원이든 그보다 하위 법원이든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누군가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판결의 결과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게 된다면, 우리의 사고력과 마음, 우리의 존재를 모두 동원해 올바른 판결을 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수터의 재판연구원으로 일하고 현재 예일 법대학장으로 일하는 헤더 거켄은 수터가 인용한 적 있는 그리스 신화를 예로 들었다. 거켄은 그 이야기를 수터가 쓴 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한다.
"그리스 신화에 안타이오스라는 괴물이 나옵니다. 이 괴물은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그 힘은 그 괴물의 발이 땅에 닿아있을 때만 발휘됩니다.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와 싸우면서 밀리다가 결국 그를 번쩍 들어 올려 땅에서 떨어지게 한 후에 제압할 수 있었죠. 수터 대법관은 그 이야기가 법관이 하는 일의 시금석이 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창한 법의 일반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두 발을 땅에 딛고, 삶 속의 팩트와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수터는 그런 법관이었습니다."
'수수께끼 대법관 ④'에서 이어집니다.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