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의 인준을 받아 대법관으로 임명된 데이비드 수터는 첫해에는 보수적인 판결을 내놓으며 공화당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인디애나주에서 누드 댄싱을 금지한 것을 합헌으로 판결한 것이다(Barnes v. Glen Theatre, Inc.). 연방 대법원은 인디애나주의 결정이 발언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수터는 이에 동의하는 의견을 낸 것이다.

하지만 첫 회기를 보내고 여름이 되자 수터 대법관은 정신적으로 몹시 지친 듯했다. 그는 동료인 해리 블랙먼(Harry Blackmun) 대법관에게 그동안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앞으로 되도록 혼자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의 전기를 쓴 틴즐리 야브로우는 수터가 임명되는 과정에서부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왜 하필 블랙먼에게 그런 얘기를 했을까? 수터는 대법원 첫 해 동안 블랙먼 대법관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졌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맨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블랙먼 대법관, 그의 옆에 있는 두 사람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이다. (이미지 출처: RBG)

블랙먼은 자기가 함께 일하는 8명의 동료 중에서 수터 대법관이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람(normal person)"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연방 대법원이 워낙 유별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특정한 동료가 유일하게 정상적이라고 말할 때는 그의 생각에 공감하거나 동의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둘은 공통점이 있었다. 블랙먼은 공화당 대통령(아이젠하워)이 임명한 보수 판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념적인 좌표가 변하면서 진보적인 대법관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진보적이었냐면, 1973년에 문제의 로 대 웨이드 판결문을 작성한 대법관이 바로 블랙먼이었다.

공화당과 보수 세력의 간절한 기대를 받던 수터는 그런 블랙먼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봤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듬해인 1992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재검토하게 하는 사건이 연방 대법원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조지 H.W. 부시와 공화당, 그리고 미국의 보수 기독교 세력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것이다. 이는 수터에게는 보수 대법관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이는 '플랜드페런트후드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사건으로, 임신중지를 비롯해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일을 하는 단체인 플랜드패런트후드가 펜실베이니아주의 밥 케이시(Bob Casey)주지사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주는 여성이 임신 중지 시술을 받으려면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남성에게 먼저 알려야 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의사의 설명을 들어야 하며, 24시간의 유예를 두어야 한다고 규정했고, 플랜드페런트후드는 그런 규정이 연방 대법원이 내린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위반하고, 여성의 자율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존 스누누를 비롯한 공화당 사람들은 데이비드 수터가 다른 보수 대법관 4명과 함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수터는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수터의 재판연구원으로 일한 사람들에 따르면 그건 착각이었다고 한다. 수터는 자신의 어젠다에 의거해 판결을 내리는 운동가(activist) 판사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법원은 급격한 변화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법원은 사회에 균형을 잡는 조정자(moderating force)였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철학이 사실은 그의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이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뉴잉글랜드 세일럼에서 시작된 마녀재판 (이미지 출처: Wikipedia)

수터의 조상 중에는 미국이 독립하기 전,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치안판사(magistrate)였던 인물이 있다. 그는 세일럼에서 시작된 악명 높은 마녀재판의 열기가 자기 마을까지 퍼져 주민들이 특정 여성을 마녀로 지목해 재판해달라고 찾아오자 "우리 마을에서 그런 재판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고 한다. 마을이 집단 히스테리에 빠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게 수터가 생각하는 법관의 역할이었다.

헤더 거켄은 수터가 영미법(common law) 전통을 따르는 법관이었음을 강조한다. 이 전통에서는 판사가 수 세기 동안 쌓인 판례를 기반으로 판결하는 것이지,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가 되어서 원칙을 정하고 상명하달식으로 판결하지 않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수터가 강조한 선례구속의 원칙(Stare Decisis, 스타리 디사이시스에 대해서는 '선을 넘은 대법원 ➃ 대법원의 자기 모순'에서 설명했다)이다.

수터는 왜 선례(판례)를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가 사회의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수터는 개별 판사, 대법관보다 집합체로서의 법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정 대법관이 선임 대법관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태도를 거부한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그는 1973년에 내려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1992년에 뒤집을 생각이 없었다. 이미 20년 동안 미국인들은 그 판결을 기준으로 살아왔는데, 이를 뒤집는 건 국민이 가진 연방 대법원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공화당의 무너진 꿈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고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뺏으려던 플랜드패런트후드 대 케이시 사건에 대한 판결문은 특이하게도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세 명의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or), 앤서니 케네디(Anthony Kennedy), 데이비드 수터가 작성했다. 그리고 이들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공화당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1992년 로 대 웨이드 뒤집기에 실패한 공화당은 결국 30년을 더 기다려 2023년에 성공했지만, 그사이에도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다. 1992년의 보수 대법관들이 반대한 뒤집기를 2023년의 대법관들이 해냈다는 사실은 새롭게 들어온 대법관들이 얼마나 과격한 보수(모순어법처럼 들리지만)인지 보여준다.

레이건이 임명한 여성 보수 대법관인 오코너는 "우리(대법관들) 중에는 임신 중지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가진 도덕심으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라며, "우리의 임무는 모든 국민의 자유를 정의하는 것이지, 자기가 가진 도덕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여성이 태아가 독자적 생존력(viability)을 갖기 전에 임신을 중지하는 것, 그리고 국가의 부당한 개입 없이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임을 재확인한다."

수터 대법관은 로 대 웨이드를 방어하는 논리를 조금 다르게 제시한다.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선례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례구속의 원칙은 사법 체계의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안정된 사회가 기대하는 법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 개인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처럼, 법원의 정당성도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증명해야만 한다(Like the character of an individual, the legitimacy of the Court must be earned over time)."

그렇다고 이들이 로 대 웨이드의 판결을 온전히 지킨 것은 아니다. 24시간의 유예 등 일부 제한은 합헌으로 판단했고, 이를 통해 로 대 웨이드를 뒤집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무효화할 것으로 예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판결은 진보 진영의 승리였고, 여성 권리의 보장이었다.

1992년 대법원 판결은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 뉴스였다. (이미지 출처: Philadelphia Inquirer

수터가 미국의 보수층을 실망시킨 건 이 판결만이 아니다. 같은 해인 1992년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을 기도(prayer)에 참여하게 하는 게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결했을 때도 수터는 진보적인 대법관들과 함께 다수의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모든 판결 중에서도 공화당을 가장 실망시킨 것은 임신중지를 여성의 권리라고 재확인해 준 판결이었다. 이 판결에 수터 대법관이 손을 들어준 것이 알려지자, 공화당에서는 수터를 추천한 존 스누누 대통령 비서실장을 탓했다. 스누누는 지금도 수터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수터가 대법관이 되고 싶어 자기 생각을 숨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터의 재판연구원들은 생각이 다르다. 상원 인사 청문회 때 그가 뭐라고 했는지 보라는 거다. 하지만 그를 대법관 후보로 밀었던 공화당과 보수 세력은 더 이상 수터와 같은 사람이 나와서는 안된다며 "No More Souters"를 외쳤다. 보수 시늉을 하며 대법원에 들어가서 진보적인 판결을 하려는 대법관을 걸러내라는 말이다. 진보 진영에서 "수터를 막지 못하면 여성들이 죽는다"고 외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더 이상 수터는 안된다"는 주장이 보수 진영에서 나오게 된 것은 양쪽 다 수터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는 얘기다.

그때부터는 공화당에는 수터처럼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절대 후보로 만들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은퇴했던 2006년이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자기 집안과 가까운 판사인 해리엇 마이어스(Harriet Miers)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려 하자, 보수 진영에서는 "마이어스는 치마를 입은 수터(=수터의 여자 버전)"라며 반대했다. 보수적으로 보이는 인물인 건 맞지만, 임신 중지 같은 이슈에 대해서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공화당 어젠다에 동의하면서 상원 청문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 로버트 보크처럼 인준에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공화당은 어떻게 과격한 보수 판사들을 대법원에 밀어 넣는 데 성공했을까?

그들은 데이비드 수터의 플레이북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기로 했다.


마지막 편 '수수께끼 대법관 ⑤'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