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의 또 다른 회사 ①
• 댓글 1개 보기미국에 사는 사람이 아시아(정확하게는 동아시아) 식재료를 구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가장 흔한, 그리고 좋은 방법은 대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아시아계 수퍼마켓에 가는 거다. 과거 한아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H마트로 불리는 한인 식료품점(grocery)이 대표적이다. 중국계 식료품점도 있고, 일본계 식료품점도 있지만, 중국계나 일본계 미국인들도 동아시아 식재료를 사러 H마트에 올 만큼 한인 식료품점은 빠르게 이 분야의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H마트 같은 아시아 식료품점도 대도시에서나 찾을 수 있지, 조금만 멀어지면 아시아 식재료를 구하는 건 쉽지 않다. 배달이 발달한 요즘은 온라인으로 주문할 수도 있고, 작은 도시라도 자그마한—거의 구멍가게 수준의—아시아 식료품점이 있으니 그렇게 구할 수도 있지만 큰 마트를 돌아다니며 식자재를 고르는 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치트키가 있다. 어느 동네에나 존재하는 대형 식료품점의 외국 식료품 코너를 이용하는 거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는 "외국 식료품"이라는 표현보다는 민족(ethnic) 식료품에 가깝고, 유대계부터 인도, 히스패닉, 동아시아까지 특정 문화에서 먹는 다양한 음식들을 모아둔 곳이다.
요즘은 일반적인 식료품점에서 파는 아시아 식품, 식재료도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 직수입한 것들이 많지만, 이런 변화는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가령 일본의 기꼬만(Kikkoman)이나 한국의 농심, 대상, 홍콩의 이금기(李錦記) 같은 브랜드의 경우 동아시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그 품질을 인정하지만, 미국 동네의 세이프웨이(Safeway)나 퍼블릭스(Publix), 스탑앤샵(Stop & Shop) 같은 유명 체인에서 그런 브랜드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경제력이 좋아지고 식문화가 세계로 수출되면서 유명 브랜드가 미국에 상륙하기 전까지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만든 아시아 식료품 브랜드를 사야 했다.
그런 브랜드 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 이야기하려는 라초이(La Choy)다.
내가 미국 식료품점에서 항상 봤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브랜드 라초이. 나는 이 브랜드가 중국 브랜드이거나, 적어도 중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만든 기업이라고 생각했다. LA CHOY라는 로고 글씨가 묘하게 완톤폰트(여기에 대해서는 오터레터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풍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듯 옆에 동녘 동(東) 한자를 넣어 두었기 때문이고, 이 회사에서 파는 식재료가 한국식이나 일본식이 아닌 중국 요리에 특화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런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지금도 미국 매장에서 제품을 팔고 있는 라초이는 한국계 이민자와 백인인 그의 친구가 함께 세운 기업이다. 그리고 그 한국계 이민자는 우리가 잘 아는 유일한(柳一韓, 1895~1971)이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바로 그 유일한 말이다.
한국에서 제약회사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 미국에서 식료품 회사, 그것도 중국 음식용 식료품 회사를 만들었다는 건 분명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 배경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검색을 하다가 흥미로운 글을 읽게 되었다. 이 글에는 유일한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게 된 배경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식료품 회사를 세우게 되었는지, 왜 성장하는 회사를 친구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자세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중국 음식이 미국 사회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다양한 관점에서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읽는 순간 오터레터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개하기로 했다.
이 글의 제목은 '미국인들에게 차오몐 요리법을 알려준 한국인 이민자와 미시건의 농촌 총각(The Korean Immigrant and Michigan Farm Boy Who Taught Americans How to Cook Chow Mein)'이다. 글 전체를 옮기는 대신 설명과 편집을 넣어 압축해서 소개한다.
미국의 수퍼마켓에서 민족 음식 코너(ethnic aisle)를 지나다 보면 멕시코 음식, 인도 음식, 한국 음식 제품들 사이에서 꼭 보게 되는 브랜드가 있다. 찹수이(chop suey)용 야채를 담은 캔, 병에 든 간장, 데리야키 소스, 포춘 쿠키, 그리고 바싹 튀긴 면을 담은 캔... 모두가 한 회사, 라초이(La Choy)에서 나온 것들이다. 로고에 동쪽을 뜻하는 한자(東)가 적혀있는 라초이는 중국이 아닌 미국 중서부에서 시작된 회사다.
미시건 대학교를 함께 졸업한 두 친구가 1922년에 세운 라초이는 100년 넘게 미국에서 중국 식재료를 대량 생산해 왔다. 이 회사가 1958년에 발행한 요리책—식재료를 파는 업체들은 자기 제품을 활용할 수 있는 간단한 레시피를 제공하곤 했다—을 보면 "식탁에 새로운 맛을 더하세요(add spark to your meal planning)"라거나, "맛있고, 색다른 차이나타운의 음식" 같은 문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창업자 두 사람 중 누구도 중국계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중국 음식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기사를 보면 대개 비슷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본토에서 이민 온 중국인들이 많은 제재와 차별을 겪으면서도 끈질김과 근면함으로 무장하고 부족한 재료를 가지고 창의적으로 중국 음식을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했다는 얘기이고, 이런 기사에 등장하는 중국 음식은 독립된 작은 식당에서 파는 음식들이었다. 그런 중국 식당에서 팔던 찹수이(chop suey: 중국어로는 杂碎잡쇄라고 표기하지만, 미국에서 개발된 음식)나 제너럴조 치킨(General Tso's chicken, 左宗棠雞좌종당계라고도 하지만 역시 미국에서 개발된 메뉴)은 미국에서는 중국 음식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외식이나 주문 음식이 아니라 집에서 중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하고 친숙한 브랜드는 라초이다. H마트에서 팔리는 한국 브랜드들처럼 미국인들 사이에 빠르게 알려지며 성장하는 브랜드는 아니어도 지난 100년 동안 굳힌 인지도를 통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라초이에서 제공하는 각종 밀키트, 캔에 든 채소, 차오몐 레시피가 중국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계 미국인들만 이 브랜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아시아계 사람들, 특히 중국계 미국인들의 눈에 라초이는 자기네 음식 문화를 가져가 돈을 버는 미국 기업이고, 이는 심하게 말하면 문화전유(cultural appropriation은 특히 요즘 미국에서 민감한 이슈다)라는 생각까지 한다. 미국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라초이는 알지만 그 회사 제품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라고 하고, 심하게 말하면 "미국 중서부의 백인 주부들(Midwestern white moms)이나 사는" 제품 취급을 하기도 한다. 라초이는 정말로 그렇게 형편없는 가짜 중국 음식 브랜드일까?
이 회사가 아시아계에게서 푸대접을 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앞서 말한 출발점, 즉 비중국계 창업자들이 세웠다는 사실일 거다. 하지만 미국이 경제 대공황에 빠졌던 시절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유일한과 월러스 스미스(Wallace Smith)가 세운 라초이는 어쨌거나 미국인들에게 중국 음식을 신기한 외식 메뉴가 아닌, 누구나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일한은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Ilha New'라고 표기했다. 지금은 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Yoo나 Yu라는 표기를 사용하지만, 당시만 해도 '유柳'씨는 '유'가 아닌 '류'로 발음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New 표기를 택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원래는 본명이 유일형(柳一馨)이었지만, 미국인들이 발음을 힘들어하고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유일한柳一韓)으로 바꾸겠다고 결정했고, 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동생들의 돌림자도 모두 '한'으로 바꿨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라초이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창업자들은 이 회사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유일한은 회사를 동업자 월러스 스미스에게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가 유한양행을 차렸고, 라초이를 맡아서 키운 스미스는 약 10년 후 번개에 맞아 숨졌기 때문이다.
'유일한의 또 다른 회사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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