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텔의 장난감 상자 ②
• 댓글 2개 보기해즈브로는 이 영화의 제작을 유니버설 픽처스에 맡겼다. 마이클 베이(Michael Bay)가 감독한 '트랜스포머'로 재미를 본 해즈브로와 유니버설은 잔뜩 고무되어 이듬해인 2008년에 6년짜리 계약을 체결한다. 이 계약으로 유니버설은 해즈브로가 지식재산권을 가진 장난감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영화화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해즈브로가 장난감 기업이라고 해도 가장 유명한 제품들은 대개 보드게임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노폴리(Monopoly),' '배틀쉽(Battleship)'이 해즈브로의 히트 상품. 트랜스포머 같은 캐릭터는 자연스럽게 액션 영화로 만들 수 있지만, 보드게임을 영화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어려운 작업을 얕잡아 본 유니버설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스토리라인으로 2012년에 영화 '배틀쉽'을 선보였다가 흥행에 참패하고 "영화 역사상 가장 멍청한 영화 중 하나"라는 혹평을 받았다.
'배틀쉽'의 실패로 유니버설이 얻은 교훈은 사전인지가 아무리 중요한 요소라고 해도 흥행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장난감의 영화화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유니버설은 수백만 달러의 위약금을 내고 해즈브로와 맺은 계약을 취소했다. 유니버설이 마텔의 저작권을 받아 만들던 '바비'를 포기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레타 거윅
유니버설, 소니 같은 외부 스튜디오에 '바비'의 제작을 맡기지 않기로 한 마텔은 유명 감독, 제작자, 작가들을 캘리포니아 엘세군도(El Segundo)의 본사로 초청해서 둘러보게 하고 함께 일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J.J. 에이브럼스(J.J. Abrams), 빈 디젤(Vin Diesel) 같은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그렇게 마텔을 "순례"했고, 그중에 배우 마고 로비(Margot Robbie), 그리고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노아 바움백(Noah Baumbach)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거윅이라는 감독과 그가 만든 작품들('프랜시스 하,'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텔이 거윅에게 '바비'를 맡긴 것도, 거윅이 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것도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거윅의 작품들은 평론가들의 사랑을 받는 영화들이지,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파트너이자 감독인 바움백도 '결혼 이야기'(2019)처럼 작고 뛰어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데, 마텔은 이 두 사람에게 대본을 맡기고, 감독은 거윅이 하게 한 것이다.
처음에는 마텔도 망설였다. 마텔 필름(Mattel Films)의 총책임자인 로비 브레너(Robbie Brenner)는 두 사람에게 대본을 전적으로 맡기는 대신 먼저 쓰게 하고 내용을 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했다. 거윅과 바움백이 자신들에게 전권을 주지 않을 거면 작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을 빼겠다고 하자 이 두 사람의 에이전트가 브레너에게 "거윅과 바움백이 바비를 만들겠다고 허락한 것만으로도 내게 찾아와 감사해야 할 일인데 (대본을 사전 심사하겠다니) 미쳤냐?"며 강하게 항의했고, 이 말을 들은 마텔은 두 사람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그럼 작고 뛰어난 영화를 만들던 거윅은 무슨 생각으로 반드시 흥행해야 하는 영화, 그것도 바비처럼 페미니스트들의 비난을 오랫동안 받아온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을까? 거윅은 언제까지나 작은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제 큰 영화를 만들 시점이라고 판단했고, "가장 성공한 여성 감독이 아니라, 대형 스튜디오의 감독(not the biggest woman director, but a big studio director)"이 되고 싶었다. 물론 그가 돈을 보더니 변심했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2019년에 '작은 아씨들'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을 만든 거윅에게 '바비'는 스토리를 가지지 않은 캐릭터에 새로운 스토리를 부여하는 "지적인" 도전이었기에 '작은 아씨들' 다음 작품으로 적절했다는 거다.
바비, 1959
여기에서 잠깐, 바비라는 인형이 가진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비가 처음 출시된 건 1959년이다. 이 인형을 만들어 낸 사람은 마텔의 공동 창업자인 루스 핸들러(Ruth Handler). 한때 파라마운트 영화사에서 비서로 일한 경험이 있던 핸들러는 바비를 기획하면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데려다가 바비의 얼굴을 다듬었다고 한다. 훗날 "비정상적인 몸매"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핸들러의 작업은 오히려 미국 여성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긴 속눈썹과 부풀어 오른 입술을 가진 헐리우드 배우의 이미지를 없애는 데 초점이 있었다.
게다가 이 인형이 나올 때만 해도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은 하나같이 아기나 어린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아기인형만 보던 여자아이들에게 '성인(adulthood)'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게 마텔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아예 광고에도 "나는 너야(I am you)"라는 말이 등장했다.
마텔은 더 나아가 바비를 통해 여자아이들에게 일하는 여성의 모습–비록 그 묘사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을 소개해 왔다. 미국에서는 여성 대통령이 선출된 적이 없지만 대통령 바비는 존재한다. 미국의 여성들이 남편의 허락 없이는 신용카드를 만들 수도 없었던 시절에 바비는 우주인으로 로켓에 탑승하기도 했다. 아무리 바비가 비판받아도 실제 여성들보다 훨씬 진보된 세상을 살아온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바비가 진보적인 캐릭터라고 하는 건 무리다. 비정상적인 신체 비율로 여자아이들에게 그릇되고 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심어주는 바비를 일컫는 가장 흔한 표현은 빔보(bimbo), 즉 매력적이지만 머리에 든 건 없는 여성("골 빈 미녀")이라는 비하적인 단어다. 그런데 거윅처럼 페미니스트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여성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다면? 바비에 대한 통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마텔의 걱정이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작품과 감독은 좋은 평을 받는 대신 마텔의 대표 상품인 바비라는 브랜드가 다치게 된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마텔의 책임자는 영화 촬영이 대부분 이뤄진 영국으로 날아가서 거윅과 긴 대화를 나누기를 대여섯 번을 했다. 여자아이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을 두고 무려 6시간 가까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단다.
영화에서 마텔의 기업 역사에서 일어난 다양한 실수가 언급되는 것도 마텔을 긴장시켰다. 기업으로서는 숨기고 싶은 걸 굳이 내용에 넣으려는 감독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거윅은 다르게 생각한다. 지금의 바비 인형을 보면 당연한 결과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텔이 다양한 시도를 했고, 그 결과 실패한 것들을 제외한 것이 지금의 바비라는 거다. 따라서 그런 과거를 언급하는 것이야 말로 바비 인형, 혹은 브랜드에 대한 존중일 수 있다. 적어도 거윅은 그렇게 생각한다.
마텔 필름의 미래
현재 미국 시장에서는 곧 개봉될 '바비'와 '오펜하이머,' 그리고 '미션 임파서블 7'을 이번 여름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션 임파서블'은 톰 크루즈가 흥행을 보장하고 있고,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흥행을 보장해 주지만, '바비'는 다르다. 마고 로비는 인기 배우이지만 독자적인 흥행력이 보장된 배우가 아니고, 거윅은 흥행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윅의 '바비'는 벌써 화제 몰이를 하고 있다. 주연 배우 마고 로비를 닮은 바비 인형은 50달러나 하는 비싼 가격에도 예고편이 나온 이후로 매진되었고, 바비가 영화 속에서 타는 코르벳 자동차 모형은 75달러의 가격으로 팔아도 매진되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영화 연계 마케팅이 진행되고 있어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덕을 톡톡히 보는 중이다.
조지 루카스(George Lucas)가 '스타워즈'의 첫 작품을 만들면서 수당을 적게 받는 대신 연계 상품의 판권을 독점하는 계약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극장 티켓이나 스트리밍을 통해 돈을 버는 영화가 있고,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연계 상품으로 버는 영화가 있다. 궁극의 장난감 기업인 마텔이 어느 쪽 수익에 관심이 더 큰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장난감을 더 잘 팔기 위해서는 영상 콘텐츠가 없으면 안 된다. 마텔은 이 사실을 이미 오래전, '히맨(He-Man)'이라는 캐릭터 장난감을 팔면서 배웠다.
남자아이들을 위한 인형을 계획하던 마텔은 리서치를 통해 남자아이들은 "힘(power)"에 매료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근육질의 캐릭터 히맨 인형을 만들었다. 그런데 장난감 매장 주인들이 "아이들이 이 캐릭터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른다"라고 불평하자 마텔은 장난감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을 후다닥 만들었다. 워낙 급하게 만들다보니 앞뒤도 맞지 않은 엉성한 작품이 나왔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고 좋아했다.
이번에 나오는 '바비'나 현재 계획 중인 '폴리 포켓(Polly Pocket)' 역시 히맨처럼 이미 팔리고 있는 장난감에 스토리를 입히는 작업인 셈이다.
아무리 아이들이 주요 관객이라지만 이렇게 나온 콘텐츠는 결국 돈을 내고 봐야 하는 상품 광고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타 거윅 같은 감독을 데려다 최선을 다해 만든다면 얘기가 다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작업은 이미 만화나 소설로 존재하는 콘텐츠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 영화가 원작과 다르면 시비를 거는 골수 팬들이 없는 것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거윅이 말한 것처럼 기존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으니 작가와 감독이 자유자재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스타워즈나 마블 프랜차이즈처럼 새로운 세계, 세계관을 만드는(world-building) 것이다. 관객의 '사전인지'의 대상이 만화나 소설이 가진 스토리인지, 아니면 장난감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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