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가 제프리 엡스틴과 관련한 자료의 추가 공개를 거부하고 더 이상 이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큐어넌 음모론자들은 물론이고, 범 MAGA 진영이 분노했다. "엡스틴 음모론은 생각 있는 사람들의(thinking man's) 큐어넌"이라는 말이 있다. 큐어넌 음모론 전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엡스틴의 범죄와 사망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즉, 엡스틴 파일의 공개를 요구하던 사람들은 큐어넌 음모론자들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이런 분노를 접한 트럼프는 태도를 갑자기 바꿔,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을 두고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며 무시하는 말을 쏟아냈다. (참고로, 엡스틴이 죽은 건 2019년이고, 트럼프는 지금도 오바마 정권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믿을 만한 정보는 모두 공개된 거 아니냐며, "나쁜 사람들(pretty bad people)이나 이 문제에 집착한다"며, 오히려 자기를 지지하던 사람들을 공격했다. (아래 영상)

트럼프가 하는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트럼프의 충복 하워드 러트닉(Howard Lutnick)는 엡스틴 파일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듯 킥킥거린다.

트럼프는 2주 전부터 엡스틴 문제를 '지나간 옛일'로 취급하고 있었다. 장관들과 함께 앉은 자리에서 팸 본디 법무부 장관이 기자들에게서 (엡스틴 파일에 대한 수사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공개 메모와 알렉산더 어코스타가 언급했다는 정보기관 연루설에 관한 질문을 받자, 트럼프가 끼어들어 텍사스 홍수 문제와 전쟁 같은 중요한 이슈들이 많은데 "사람들은 아직도 그 변태(creep)에 관해 이야기하느냐"며 "믿어지지 않는다(Unbelievable)"고 했다. 뒤에 이어진 본디의 대답도 2월에 했던 큰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악한 엘리트들과 딥스테이트를 소탕하고 세상을 구원해 줄 거라 믿었던 트럼프에게서 '쓸데없는 문제에 집착하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은 큐어넌이 이를 좋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너무 화난다.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투표한 게 아니다," "트럼프야말로 딥스테이트인 게 분명해졌다," "이제 트럼프의 말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우익 미디어에 쏟아지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분노다. 그들을 상대로 엡스틴 파일과 딥스테이트라는 음모론을 꾸준히 전파해 온 MAGA 인플루언서들로서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지난 선거에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한 극우 인플루언서 닉 푸엔테스(Nick Fuentes)는 자기 방송에서 트럼프에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트럼프는 이제 와서 '너희들, 엡스틴 문제를 덮어버리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너네 지지를 원하지 않아. 약해빠진 것들'이라고 하네? 엿먹어(Fuck you)! 엿이나 먹어! 넌 진짜 형편없는 놈이야. 살은 쪄가지고... 너라는 인간은 코미디야. 넌 멍청하고, 웃기지도 않아. 넌 네가 똑똑한 줄 아는데, 그거 아냐.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이 제 프로그램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이번 일은 이게 전부 사기극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미국 포퓰리즘 역사에서 MAGA 운동이 최대의 사기극으로 기록될 겁니다. 리버럴들이 맞았어요. MAGA 지지자들은 속은 겁니다. 정말이에요."

하지만 모든 마가 인플루언서들이 푸엔테스처럼 트럼프를 공격하는 건 아니다. 엡스틴 파일을 공개하라고 외쳐온 대표적인 MAGA 팟캐스트 진행자인 찰리 커크(Charlie Kirk)는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꿔, "당분간 엡스틴 얘기는 그만하려 합니다. 저는 트럼프 행정부 사람들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해야 할 일을 할 거라고 믿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의 아이러니를 한 코미디언이 정확하게 지적했다. 연방 정부와 딥스테이트를 의심하던 음모론자들에게서 '정부를 신뢰하겠다'는 말을 듣는 날이 왔다는 것.

나중에 전해진 바에 따르며 트럼프는 찰리 커크에게 직접 전화했다고 한다. 트럼프의 부탁을 받고 엡스틴 파일 이야기를 그만하기로 한 것이다. (푸엔테스에게는 전화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비슷한 일은 일론 머스크가 지난 5월 말, 연초부터 이끌던 정부효율부(DOGE)를 떠나면서도 일어났다. 트럼프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을 비판하며 트럼프와 대립하던 머스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래와 같은 트윗을 올렸다.

"큰 폭탄을 터뜨릴 때가 되었군: 엡스틴 파일 안에 트럼프가 있어. 파일을 공개하지 않는 진짜 이유가 그거야. 좋은 하루 보내세요, 도널드 트럼프!"

지금은 삭제된 일론 머스크의 트윗(X)

트럼프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머스크는 트윗을 며칠 만에 삭제했고, 사과까지 했다. 물론 그러기까지는 트럼프의 다양한 위협이 있었다. 즉, 트럼프는 여론을 좌우하는 인플루언서들을 상대로 일일이 대인방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그가 지지자들의 인기를 끌 때와 사뭇 다르다. 그가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2015년만 해도 그를 의미 있는 후보로 생각하는 미디어는 없었지만, 그는 드러내지 않을 뿐 자기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샤이 트럼프")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우익 미디어와 인플루언서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기 시작한 건 트럼프 지지 유권자들의 존재가 분명해진 다음의 일이다.

다시 말하면, 우익 인플루언서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오디언스 기반은 트럼프가 먼저 깔아놓은 것이다. 우익 인플루언서들과의 관계에서 트럼프가 항상 우위에서 "인터뷰를 허락하는" 입장에 있었던 건, 그들이 자기 지지자들을 통해 먹고 산다는 걸 트럼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서 트럼프가 인플루언서들에게 엡스틴 파일 언급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자기를 지지했던 미디어와 인플루언서의 이탈을 모두 막지는 못한다. 샌디훅(Sandy Hook) 총격 사건이 조작이라고 주장해서 미국에서도 최악의 음모론자로 꼽히는 알렉스 존스(Alex Jones)나, 인플루언서로 트럼프의 최측근이 된 로라 루머(Laura Loomer) 같은 사람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에 실망과 분노를 숨기지 않았고, 폭스뉴스 출신으로 우익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은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이 "국민의 지능을 무시하는" 모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물론 이들이 트럼프의 바람을 무시하고 트럼프의 결정에 대한 강한 분노를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자기들의 오디언스인 트럼프 지지자들이 분노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만들어 준 오디언스이지만 그들이 트럼프에 등을 돌린다면? 이들은 트럼프와 오디언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MAGA 진영이 갈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ucker Carlson channels Maga rage over Epstein files – and opens rift with Trump
As Maga supporters revolt over the Epstein scandal, figures like Tucker Carlson are now a gadfly of the White House’s handling of the controversy
터커 칼슨은 엡스틴이 이스라엘의 정보기관과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MAGA 운동이 갈라지게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반면 트럼프의 충복인 마조리 테일러 그린, 토머스 매시(Thomas Massie), 낸시 메이스(Nancy Mace) 같은 의원들은 엡스틴 파일 비공개 결정에 분노하면서도, 인플루언서들과 달리 이를 가지고 트럼프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삼가려는 기색이 뚜렷하다. 트럼프의 뜻에 따라 정치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 정치인들은 트럼프를 공격하는 대신 (그의 명령을 이행했을 뿐인) 팸 본디 법무부 장관을 공격하며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지자들의 분노와 트럼프의 생각 변화 사이에서 어느 쪽도 건드리지 않고 제3의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당내 지지 세력이 없어 트럼프의 명령을 철저히 따르는 마이크 존슨(Mike Johnson) 하원 의장도 엡스틴 파일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트럼프가 반대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엡스틴 파일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민주당 의원들이 (에즈라 클라인 기자의 표현처럼) "피 냄새를 맡고" 파일 공개를 요구하는 법안 통과를 추진하고,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가세한 기미를 보이자 존슨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하원의 여름 휴회(summer recess)를 앞당겨 오늘 금요일에 (상원은 예정대로 8월 2일) 휴회에 들어간다.

불은 꺼질까?

트럼프 진영 내 다양한 반응을 고려해도, 트럼프의 등장 이후로 MAGA 진영이 이렇게 분열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을 깨달은 트럼프는 새로운 내러티브를 들고 나왔다. 이 모든 것이 민주당 탓이며, 민주당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hoax), 사기(scam)인데, "멍청한 공화당 지지자들이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전혀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큰 분노만 불러왔다. 이게 일주일 전의 일로, 백악관이 당황한 기색이 분명해진 것도 이때다.

분노한 지지자들에게 뭐라도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트럼프는 법무부에 지시해 엡스틴 재판 과정에서 확보한 대배심 녹취록 공개를 법원에 요청하게 했다. 이 글을 쓰는 오늘(23일) 플로리다 법원에서는 이런 종류의 녹취록은 공개한 예가 없다며 이를 기각했지만, 이 소식이 나오기 전에도 사람들은 그 정도의 기록 공개로 분노한 지지자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을 거라고 전망했다.

앞다투어 단독 보도를 내놓는 언론들

언론도 트럼프에 대한 압력을 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주 단독 보도를 통해 엡스틴이 50세가 되던 2003년 생일에 트럼프가 그에게 외설스러운 내용과 그림이 담긴 카드를 보냈다고 전했다. (기사에 카드의 이미지는 없지만,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체 여성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고, 음모에 해당하는 부분이 트럼프의 사인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에게 외설스러운 카드를 보낼 수도 있다고 해도, 트럼프가 기록 공개를 거부한 상황에서 나온 이런 보도는 그가 공개를 거부한 이유가 자기가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든다.

참고로, 월스트리트저널은 폭스뉴스와 함께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뉴스 코프(News Corp)의 자회사일 뿐 아니라, 기업의 입장에서 트럼프를 최대한 옹호해 온 신문이다. 그런 신문이 단독 보도까지 하면서 트럼프를 공격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트럼프는 월스트리트저널이 허위 보도를 했다며 고소했지만, 이는 오히려 트럼프의 실수라는 분석도 있다. 이 문제가 법정으로 가면 모든 증거물이 공개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이 입수한 카드 외에도 많은, 트럼프에게 불리한 자료들이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전략적 판단이 빠른 머독이 그런 계산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게 언론 기자들의 생각이다.  

뉴욕타임즈의 오늘 단독 보도에 따르면 팸 본디 법무부 장관이 앱스틴 파일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트럼프와 자주 만나 직접 보고했고, 그 파일 안에 트럼프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트럼프에게 알렸다고 한다. 트럼프의 이름은 이미 공개된 엡스틴 관련 자료에도 등장하지만, 대통령과 연관된 문제로 조사를 하고 있는 법무부 장관이 진행 과정을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그것도 대통령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보고한 것은 과거 정권에서는 그 자체로 커다란 스캔들이 될 만한 이익의 충돌이다. (뉴욕타임즈은 익명을 요구한 세 명에게서 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매일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루는 오바마가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주장을 하고, 다음날은 인종차별 문제로 팀 이름을 레드스킨스(Redskins)에서 커맨더스(Commanders)로 바꾼 워싱턴의 풋볼팀의 이름을 되돌리라고 명령을 하고, 그다음날은 케네디 센터의 오페라 하우스를 '멜라니아 트럼프 오페라 하우스'로 바꾸겠다고 하는 등 매일 논란거리가 될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렇게 하나라도 문제가 커지면 그것으로 엡스틴 파일 문제를 가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게 트럼프의 위기 탈출 방법이었고, 트럼프는 항상 성공했다. 하지만 과거에 그가 처했던 곤경은 MAGA의 본질과 무관했다. 엡스틴 파일 문제는 MAGA 세력의 정체성에 가깝다. 트럼프가 그들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트럼프도 그걸 직감하는 듯, 엡스틴 파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내 옛날 지지자들"(my PAST supporters)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관계를 끊겠다는 것이다.

그들 없이 트럼프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많은 기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트럼프의 본질은 기업인도, 정치인도 아닌, 엔터테이너다. 오디언스를 잃은 엔터테이너는 더 이상 엔터테이너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