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어넌 음모론자들이 제프리 엡스틴이 이스라엘의 정보 자산이었다고 생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트럼프, 빌 클린턴, 앤드루 왕자 외에도 많았다. 빌 게이츠를 비롯해 미국의 첨단 테크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엡스틴 사건이 크게 불거졌을 때, 유명한 MIT 미디어랩(Media Lab)이 엡스틴에게서 기부금을 받은 게 드러나 디렉터였던 조이 이토(Joi Ito, 우리나라에도 책이 번역되어 인기를 끌었다)가 사과문을 쓰고, 사임한 일도 있었다.

당시 미디어랩이 비판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엡스틴에게서 기부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2008년에 성범죄자로 형을 선고 받은 후, 즉 그가 성범죄자 판결을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기부금을 받았고,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은폐(cover-up) 시도가 문제를 더 키우는 일이 흔하다. 일단 그런 시도로 불신을 사게 되면 사람들은 밝혀진 것보다 문제가 더 클 것으로 짐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짐작과 달리 밝혀진 게 전부인 경우도 흔하지만, 은폐 시도는 음모론을 키우는 온상이다. 추락한 UFO의 잔해를 보관하고 있다는 음모론으로 유명한 네바다주에 있는 51구역(Area 51)이 대표적인 예다. 2013년, 미국 정부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1950년대 미국 정부가 이곳에서 무기를 개발, 시험하는 과정에서 이를 숨기기 위해 거짓 해명을 하는 과정에서 UFO 잔해 음모론이 탄생했다고 밝혀졌다.
51구역으로 알려진 네바다주의 무기 실험장

엡스틴의 비행기를 타고 그의 섬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매매를 했다고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구글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은 당시 약혼자를 포함한 여러 일행과 함께 방문했다가, 그 섬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약혼자의 말에 따라 곧바로 섬을 떠났다고 한다. 엡스틴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투자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그의 초대에 응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렇게 초대된 손님이 아니었고, 엡스틴이 10년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큐어넌 음모론자들은 트럼프와 엡스틴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트럼프야말로 엡스틴 같은 사람들로부터 아이들을, 그리고 세상을 구원해 줄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큐어넌을 연구한 윌 소머는 이를 우리의 상식이 아닌, 큐어넌 특유의 사고방식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트럼프가 엡스틴과 함께 어울리는 동영상을 보면서도 '트럼프가 성범죄의 현장에 접근하려는 시도'라고 믿는다. 내부에 잠입해서 범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장면이라는 거다.

그럼, 엡스틴을 강력하게 처벌하기는커녕 유죄협상을 해준 검사 알렉산더 어코스타를 장관으로 등용한 건 어떻게 해석할까? 그 일 이후에 조용히 지내고 있던 어코스타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여론을 엡스틴 사건에 다시 주목시키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2017년에 장관이 된 어코스타는 2019년, 엡스틴 수사와 관련한 비판에 직면해 사임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큐어넌 음모론자들이 보기에 트럼프는 엡스틴과 그의 주변에 있는 엘리트 성범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다.

Trump Endorsed QAnon Because He’s Stuck
He’s grasping at straws, not solidifying his political base.
지지율을 높여야 했던 트럼프가 큐어넌 음모론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시점은 2022년 9월이다.

큐어넌 음모론자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뒤틀린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트럼프를 좋게 이해하려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그들의 음모론에 귀를 기울인(혹은 기울이는 척이라도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워싱턴을 움켜쥐고 있는 딥스테이트(Deep State) 세력"을 몰아내겠다고 외치는 사람이다. 게다가 트럼프가 말하는 "딥스테이트"는 대개 민주당 정치인이거나 민주당/진보 성향의 관료들이다. 따라서 피자게이트 이후로 민주당 쪽 사람들이 성범죄자라고 믿어 온 음모론자들과 트럼프는 공동의 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큐어넌 음모론자들의 논리적 점프가 필요한 부분은 트럼프의 엡스틴 사건 개입 의혹뿐이다. 그 부분만 논리를 뒤틀어 통과할 수 있으면 트럼프는 큐어넌과 같은 적,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

분노하는 큐어넌

올해 초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오자, 그에게 기대를 걸고 지지했던 큐어넌 음모론자들은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지지를 받아서 대통령이 되었으니 트럼프는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음모론자들은 소위 엡스틴 파일을 언제 공개할 거냐고 재촉했다.

엡스틴 파일의 공개를 요구한 건 큐어넌 음모론자들만이 아니다. 부통령인 J.D. 밴스와 (앞의 글에서 얘기한) FBI 국장과 부국장, 그리고 올해 초 뉴스를 장식했던 정부효율부의 일론 머스크까지, 트럼프 주위의 인물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엡스틴 파일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트럼프가 임명한 법무부 장관 팸 본디(Pam Bondi, 트럼프는 원래 자신을 철저하게 지지하는 맷 게이츠라는 공화당 의원을 법무부 장관에 지명했지만, 미성년자들을 상대로 한 성범죄 혐의로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표가 많아 물러났고, 결국 본디가 장관이 되었다)는 지난 2월 21일 폭스뉴스에 등장해서 엡스틴의 고객 리스트가 나오는 거냐는 질문을 받고 "(그 리스트는) 지금 책상 위에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살펴보는 중이라고 대답해서 음모론자들의 기대를 더 키웠다. (본디는 엡스틴 파일 외에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서 킹 목사 관련 파일들도 비밀 해제를 위해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Bondi says Epstein client list ‘sitting on my desk right now,’ and is reviewing JFK, MLK files
U.S. Attorney General Pam Bondi told ‘America Reports’ host John Roberts that she is reviewing the Jeffrey Epstein list, which is “sitting on my desk right now,” along with the JFK and MLK files.
팸 본디 법무부 장관이 리스트가 지금 자기 책상 위에 있다고 말하는 모습
여기에서 잠깐, 트럼프가—자기 이름이 엡스틴의 자가용 비행기 탑승자 명단에 종종 들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도 불구하고—정말로 엡스틴 파일 전체를 공개하기 원했을까? 대선 선거운동 중이었던 지난해, 트럼프는 한 방송에 출연해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사건 기록을 비밀 해제하겠다고 했다. 인터뷰어가 "9/11 테러 관련 파일을 비밀 해제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렇다"고 했고, "JFK 암살과 관련한 파일을 비밀 해제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쉽게 대답했지만, "엡스틴 파일을 비밀 해제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갑자기 멈칫하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이렇게 머뭇머뭇 덧붙인다.
"음, 그건 좀 조심스러운데요(I guess I would I think that less so), 왜냐하면 사실이 아닌 내용도 있기 때문에 그걸로 많은 사람들 삶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요. 그쪽 동네(that whole world)에는 가짜 뉴스가 많잖아요." 인터뷰어가 대답을 재촉하자, 트럼프는 "다른 파일들은 공개하겠지만, 엡스틴 파일은 잘 모르겠어요"라고 다시 얼버무렸다. 영상 속 트럼프의 반응만 보면, 그가 엡스틴 파일 공개를 꺼리는 태도가 분명하다.

하지만 트럼프가 그들의 기대를 잔뜩 키워놨고, 취임 직후에 법무부 장관까지 TV에 출연해서 "리스트가 내 책상 위에 있다"고 했으니, 트럼프 행정부는 큐어넌 음모론자들에게 뭐라도 건네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다. 이 상황에서 트럼프와 팸 본디 장관은 음모론자들을 무시하는 듯한 결정을 내린다.

본디는 엡스틴 파일의 공개를 강하게 요구해 온 극우 팟캐스트 진행자와 인플루언서들을 백악관에 초대해 두툼해 보이는 바인더를 하나씩 나눠줬다. 바인더 표지에는 '엡스틴 파일: 1단계'(The Epstein Files: Phase 1)라는 제목과 함께 '비밀 해제'(DECLASSIFIED)라는 워터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역사상 가장 투명한 정권"이라는 트럼프 특유의 표현이 적혀있었다.) 사진만으로는 트럼프가 약속을 지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돌아가서 바인더 속에 있던 파일들을 살펴본 이들은 크게 실망했다. 바인더 안에는 이미 언론에 공개된 내용을 담은 문서밖에 없었고, 그나마 일부 정보는 볼 수 없게 검게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이 바인더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1단계(Phase 1)라면, 2단계, 3단계 파일들이 뒤를 이어 나오지 않겠냐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법무부가 나눠준 "엡스틴 파일"을 들고 백악관을 나서는 극우 인플루언서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공개된 내용만 던져줘도 음모론자들이 구분 못 하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음모론자들의 기대와 집착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팸 본디는 자기 발언이 오해되었다며, 엡스틴의 고객 리스트를 공개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고 했고, 캐시 파텔 FBI 국장은 조 로건(Joe Rogan)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엡스틴 수사 자료에는 피해자들이 등장하는 영상도 있다며, 모든 기록을 공개하면 피해자들에 2차 가해를 할 수 있으니 "내가 비난을 받아도 그건 공개할 수 없다"고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했다.

더구나 이들은 제프리 엡스틴이 살해당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자살이 맞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들도 미심쩍은 구석은 분명히 있지만,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엡스틴은 자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트럼프와 주변 인물들은 이제까지 큐어넌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자살이었다고 의견을 밝힌 것이다.

트럼프 주위 인물들의 태도 변화에 당황했던 큐어넌 음모론자들을 분노하게 한 발표는 지난 8일에 나왔다. 법무부와 FBI가 작성한 공개 메모에서 "자료를 체계적으로 살폈지만, 엡스틴의 '고객 리스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철저한 수사를 진행한 끝에 제프리 엡스틴은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이미지는 절대로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큐어넌 음모론자들을 포함해 엡스틴 파일의 공개를 기다려 온 많은 트럼프 지지자들은 결국 트럼프가 딥스테이트 아니냐며 큰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에 분노해 MAGA 모자를 태우는 모습

마지막 편 '마가 내전 ⑤'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