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큐어넌 음모론은 이상한 사람들이나 믿는 이야기로 취급되었고, 언론에서도 그저 신기한 현상처럼 다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포챈과 같은 인터넷의 어두운 구석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왔다. 특히 배우인 제임스 우즈(James Woods)나 로잰 바(Roseanne Barr),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설적인 투수 커트 실링(Curt Schilling) 같은 유명인들이 믿으면서 이전에는 이상하게만 여겨졌던 이야기가 이제는 정상적인 사람들도 한번쯤 귀를 기울여볼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큐어넌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2019년 8월 제프리 엡스틴의 사망과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엡스틴의 사망 경위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엡스틴은 자살하지 않았다"는 말을 쉽게 할 만큼 음모론을 키우는 완벽한 토양이었다. 그러니 이미 미국의 엘리트들이 아이들의 피를 마신다고 굳게 믿고 있던 큐어넌 음모론자에게 엡스틴의 미심쩍은 사망은 자기가 믿고 있던 이론이 맞다고 확인해 주는 증거로 작용했다.

제임스 우즈, 커트 실링, 로잰 바는 이제 미국인들에게 큐어넌 음모론을 믿는 트럼프 지지자로 익숙하다.

게다가 엡스틴이 사망한 지 반년만에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지 못하면서 거의 모든 소통을 인터넷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런데 2020년의 인터넷은 과거와 달리, 확산 알고리듬으로 작동하는 소셜미디어가 지배하고 있었고, 우연히 빠진 음모론의 토끼 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이 내려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음모론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알게 된 인플루언서들은 더욱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팬데믹은 음모론의 특이점(singularity)"이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는 상황에 미국에서는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 한국에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의 관심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트럼프는 애초에 피자게이트와 같은 음모론의 덕을 본 사람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10여 년 동안 인기 리얼리티쇼(The Apprentice)를 진행하면서 여론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가 없는 정치인으로 유명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높이 올려줄 기류를 만나면 재빠르게 올라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큐어넌 음모론이 힘을 받는 걸 눈치챈 것이다. 2020년 초의 일이다.

트럼프는 큐어넌 음모론을 믿는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다. (그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읽은 문서를 잘게 찢는 버릇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큐어넌 사람들이 아동 성 착취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면 나쁜 일이 아니지 않겠나"라는 식의 '인정'만으로도 큐어넌 신봉자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게다가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마조리 테일러 그린 같은 큐어넌 정치인들의 주장을 리트윗하면서 큐어넌 음모론을 퍼뜨려주기도 했다. 그동안 주변에서 미치광이 취급을 받던 음모론자들은 이제 "대통령도 인정한" 단체의 일원이라는 자부심까지 갖게 되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트럼프가 만든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을 운영하던 캐시 파텔(Kash Patel, 현 FBI 국장)은 큐어넌 음모론을 믿지는 않지만, 트루스 소셜이 그들이 활동하는 플랫폼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고, 댄 본지노(Dan Bongino, 현 FBI 부국장)도 큐어넌 음모론을 믿지는 않지만, 인기 극우 팟캐스트를 운영하면서 제프리 엡스틴의 죽음에는 거대한 음모가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즉, 트럼프와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큐어넌 음모론을 믿지는 않지만, 그들의 파괴력, 즉 기득권을 파괴할 수 있는 거대한 불신의 힘을 포기할 수 없었다.

캐시 파텔 FBI 국장과 댄 본지노 부국장

엡스틴의 수수께끼

제프리 엡스틴이 미성년자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의심하는 미국인은 없다. 그는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 제도에 있는 작은 섬 하나(Little St. James)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곳에 어린 여성들을 데려와 머물게 하면서 영국의 앤드루 왕자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돈 많고 힘 있는 남성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사람이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동의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해서 여전히—심지어 이를 오래 취재해 온 기자들도—모르는 구석이 많다. 우선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중퇴한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베어스턴스(Bear Stearns)에 들어가 옵션 트레이더가 되었고, 나중에 재무 관리 회사를 세웠다고 하지만, 어떻게 섬을 두 개나 소유하고 전용기를 탈 정도의 부를 축적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월스트리트를 잘 아는 사람도 엡스틴이라는 헤지펀드 매니저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반드시 그에게 특별한 물주가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러한 비약적 해석은 음모론자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가 억만장자들의 돈을 관리하면서 부를 축적했다는 2019년 기사가 있다.

제프리 엡스틴이라는 이름이 대중에 알려지게 된 건 그의 성범죄가 밝혀지면서다. 과거에도 나이 어린 여성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대학 중퇴 후 잠시 교사로 일하며 여고생들에게 접근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2005년에 한 십 대 피해자의 어머니가 신고하면서 경찰이 그의 미성년자 인신매매 혐의를 수사하게 되었다.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을 놀라게 한 건 그의 엄청난 인맥이었다. 트럼프나 앤드루 왕자 같은 사람들이 엡스틴의 섬을 드나든 것이 1990년대였으니 2005년에 수사를 하던 경찰이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심각한 혐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경찰이 수사하다가 결국 연방수사국(FBI)으로 이첩되어 30명이 넘는 피해자를 찾아냈다.

2000년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사진. 트럼프와 멜라니아(2005년 결혼) 옆에 있는 두 사람은 제프리 엡스틴과 길레인 맥스웰(Ghislaine Maxwell)이다. 맥스웰은 한 때 엡스틴의 여자 친구였다가 나중에는 어린 여성들에게 접근해 데려오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하지만 엡스틴이 고용한 변호사도 엄청난 사람이었고, 당시 검사들은 고위층으로부터 "너무 깊이 수사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엡스틴의 수사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당시 수사를 진행하던 연방 검사인 알렉산더 어코스타(Alexander Acosta)는 일부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형을 감량해 주는 유죄협상(plea deal)을 통해 엡스틴이 가벼운 혐의 두 개만 인정하고 징역 13개월이라는 가벼운 형을 받게 해준 것이다. 어코스타 검사는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에게 유죄협상 진행을 고지해야 하는 원칙도 어겼다.

2005년에 시작해서 2008년에 끝난 이 수사는 권력층에서 손을 쓴 흔적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에 음모론자가 아닌 사람들도—여기에는 언론도 포함된다—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지금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일은 몇 년 후에 일어났다. 트럼프가 2017년 첫 임기 때 알렉산더 어코스타를 노동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다.

어코스타의 2008년 유죄협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분노했다. 엡스틴과 가깝게 지내고 그의 섬을 드나들던 트럼프를 보호해 준 대가로 장관 자리를 얻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트럼프의 엡스틴 성범죄 연루설이 다시 불거졌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공화당에서 그의 장관 자격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2008년 엡스틴 재판을 앞두고 왜 그렇게 가벼운 혐의로 유죄협상을 해줬느냐"고 질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코스타의 대답이 흥미로웠다. "엡스틴은 정보(intelligence) 기관에서 관리하는 자산(asset)이니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알렉산더 어코스타 노동부 장관

어코스타가 그렇게 말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한 익명의 공화당 인사가 언론에 전달한 내용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엡스틴을 둘러싼 많은 음모론 중에서도 '이스라엘 정보기관 연루설'을 키웠다. 그가 미성년자들을 고용해 정치인, 기업인 등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하고, 그걸 약점 삼아 정보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소위 '허니트랩(honey trap, 미인계)' 작전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전 여자 친구이자 성매매의 동업자였던 길레인 맥스웰의 아버지(Robert Maxwell)가 생전에 이스라엘, 소비에트 연방의 정보기관과 연루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이런 음모론에 기름을 부었다. 특별히 큰돈을 번 것 같지도 않은 엡스틴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되었는지를 이런 정보기관 연루설로 설명한 것이다.


'마가 내전 ④'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