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0일,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시기, 미성년자 성 착취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제프리 엡스틴(Jeffrey Epstein)이 뉴욕 맨해튼 구치소 독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엡스틴이 체포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법정에서 입을 열면 많은 사람이 다칠 거라고 했고, 그래서 누군가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의 성 착취 혐의에는 정치인, 기업인 등 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그가 증언하기 전에 입을 막으려 할 거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가 구치소 독방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다.

그 소식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거 봐, 누군가 죽일 거라고 했지?"라면서 엡스틴의 죽음은 자살을 가장한 타살이라며 음모론을 들고나왔다.

맨해튼 남쪽 브루클린 다리 근처에 있는 뉴욕시 구치소 건물

음모론이 넘쳐나는 세상이고, 미국인이 원래 음모론을 좋아하지만, 엡스틴의 죽음은 평소 음모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도 타살 가능성이 있다고 믿을 만큼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먼저 이야기하자면,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많은 언론과 이 사건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경위를 살핀 후에 자살이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자살하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면 우연도 있었고, 교도행정 당국의 무책임한 행동도 있었지만, 엡스틴은 자살한 것이 맞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결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엡스틴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거고, 그가 죽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어느 쪽도 100% 확신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엡스틴은 정말로 자살한 것 같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죽기를 바란 사람들이 많았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타살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죽기를 바란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 사람들의 리스트를 보고 싶어 한다. 그 리스트에는 수많은 미성년자(1천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를 성폭행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을 게 분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 그 리스트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 연방 정부는 제프리 엡스틴을 두 번 수사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증거물을 압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증거물 어딘가에 엡스틴의 "고객 리스트"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그럴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사실로 확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근원설화: 아동 포르노

모든 신앙이나 신념 체계에는 그 시작을 설명해 주는 '근원설화'가 있듯이 제프리 엡스틴을 둘러싼 음모론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작을 구성하는 설화가 있다. 바로 큐어넌(QAnon)이라는 음모론이다. 이들에게 제프리 엡스틴의 죽음은 자신이 믿는 음모이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이자, 그들이 적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에게 큐어넌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큰 틀을 제공해 준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세계관에 가깝다. 그런데 이 세계관은 조금 어처구니없는 장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워싱턴 DC에 있는 코밋 핑퐁(Comet Ping Pong)이라는 피자 가게다.

큐어넌(QAnon) 신봉자들의 트럼프 지지는 유명하다.

발단은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개인 이메일 서버를 구축하고 사용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공직(국무부 장관)에 있는 사람이 개인 서버를 만들어 이용한 것 자체도 잘못이었지만, 이 일은 러시아가 클린턴의 이메일을 해킹하면서 더욱 커졌다. 러시아 측은 이를 위키리크스(Wikileaks)에 넘겼고, 위키리크스는 힐러리 클린턴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공개해 버린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었기 때문에 클린턴의 이메일에는 민주당계 공직자들이 나눈 대화가 담겨있었고, 오바마와 민주당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위키리크스에서 자료를 모두 다운로드해서 이들이 불법을 저지르거나, 공모하고 있는지 샅샅이 살폈다. 그런데 이 이메일을 분석하던 사람들 중에는 극우 성향의 이미지 게시판 사이트인 포챈(4chan) 사용자들과, 당시 대선운동 중이던 도널드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본부장인 존 포데스타(John Podesta, 빌 클린턴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오바마 대통령의 고문으로 활동한 민주당의 거물이다)의 이메일 메시지에서 "치즈 피자"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고, 이 단어가 피자가 아니라, 다른 뭔가를 가리키는 암호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쓰던 중, 한 사람이 치즈 피자(cheese pizza)의 머리글자 c.p는 아동 포르노(child pornography)라는 단어의 머리글자와 같다며, 힐러리 클린턴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고위 공직자들이 아동 포르노를 주고 받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음모론자들은 결론을 먼저 내린 후, 그걸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 "점은 연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근거 부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즈 피자와 아동 포르노를 연결한 이들은 민주당 인사들이 워싱턴 D.C.에 있는 피자 가게인 코밋 핑퐁의 주인이 존 포데스타를 비롯한 민주당 인사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식당이 아동 성착취의 중심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 주장은 #PizzaGate라는 태그를 달고 온라인에 퍼져나갔다.

코밋 핑퐁 피자 가게는 지금도 운영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황당한 주장이지만, 피자게이트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추리하는 과정에서 음모론은 더욱 심각해진다. 피자 가게 지하에는 비밀 통로가 있고, 그걸 따라가면 비밀의 방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민주당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는 부자들이 납치한 아이들을 사탄 숭배 의식을 행하면서 살해하고, 그 피를 나눠 마신다는 해괴한 주장이었다.

음모론을 믿어도 어느 정도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단계에서 선을 긋겠지만, 음모론 중에는 황당할수록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극우 커뮤니티에 피자게이트가 퍼지던 2016년, 노스캐롤라이나에 사는 20대 남성 에드거 웰치(Edgar M. Welch)가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코밋 핑퐁 피자 가게에 들이닥쳐 납치한 아이들을 꺼내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는 실탄을 쏘며 식당을 뒤졌지만, 아이들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출동한 경찰에 순순히 체포되었다. (웰치는 9년 후인 올해 초, 피자게이트와는 무관한 일로 경찰을 향해 총을 꺼내 들었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피자게이트를 믿고 피자 가게를 습격한 에드거 웰치와 출동한 경찰

피자 가게 습격 사건으로 미국 사회는 온라인에 퍼지는 음모론의 위험성을 깨닫게 되었지만, 음모론자들이 지지한 도널드 트럼프는 이미 대통령에 당선된 후였다. 음모론자들이 트럼프에 끌린 이유는 그가 기존의, 즉 제도권 정치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인들은 물론, 연방 정부 자체를 불신하는 이들에게 "썩은 워싱턴을 청소하겠다"며 등장한 트럼프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트럼프로서도 음모론자들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음모론자들이 아무리 황당한 주장을 해도 그 주장이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들어주었고, 맞장구를 쳐줬다.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면 음모론자들이 만족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선 트럼프 1기 때는 지금과 달리, 처음 정치를 하게 된 트럼프가 워싱턴에서 오래 일한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트럼프가 상대적으로 훨씬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것은 이들이 트럼프의 폭주를 저지했기 때문인데, 트럼프를 지지한 음모론자들은 그가 기존 세력의 '저항'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보기에 따라서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피자게이트를 넘어서는 '폭풍'(Storm)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큐어넌의 등장

미국 정치를 뒤흔드는 큐어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극우 음모론자들이 많이 모이는 포챈 사이트에 "Q Clearance Patriot"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2017년 10월부터 글을 남겼다는 사실만 알려졌기 때문에 '익명의(anonymous) Q'라는 의미로 큐어넌(QAnon)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처음 남긴 글의 제목이 '폭풍 전의 고요'(Calm Before the Storm)였기 때문에,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주장을 폭풍(The Storm)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화되었다.

익명의 Q가 사용한 아이디에서 "Q Clearance"는 미국 에너지부에서 최고 비밀(특히 핵무기 관련 비밀)의 취급 인가를 의미하고, "Patriot"은 애국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글을 읽는 음모론자들은 그가 정부 고위급 인사로, 일반인들은 모르는 연방 정부의 비밀과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애국자(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을 애국자라고 부르곤 한다. 한국의 보수층이 사용하는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믿게 되었다.

트럼프의 집회 사진에서는 큐어넌의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읽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암호처럼 난해한 소리였기 때문에 그가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음모론자들에게 힐러리 클린턴이 주고받은 이메일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보다, 그것을 암호로 취급해서 '해석한' 내용이 중요했던 것처럼, 익명의 Q가 남긴 메시지를 그들이 어떻게 해석했느냐가 중요하다.

음모론자들이 해석한 바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는 군부에서 선택한 인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아동들을 성폭행하고, 죽여서 피를 마시는 집단을 세상에서 몰아내라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트럼프의 집권을 저지해서 세계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딥스테이트(Deep State), 즉 숨은 정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마가 내전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