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영화가 땡길 때" 보는 영화가 있고, 쉬고 싶을 때 보는 영화가 있다. 전자와 후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고르기 힘들까? 쉬고 싶을 때 별생각없이 볼 수 있는 영화가 훨씬 더 고르기 쉬울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보고 싶을 때는 평점 10점 만점에 7점, 아니 6.5만 넘어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피곤해서 영화로 휴식을 찾으려면 아주 잘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어렵거나 예술적이어도 안 되고,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너무 단순해도 즐기기 힘들다.

우리는 이럴 때 예전에 본 적 있는 영화를 찾는다. 완벽하게 다 기억하지는 않아도 줄거리를 대략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이미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도 작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에 재미있게 본 영화를 다시 보고 실망할 가능성도 커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지만,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다시 보면 실망스러운 작품으로 전락하는 게 있고, 시대를 넘어 고전(classic)으로 승화하는 작품이 있다.

얼마 전에 옛날 영화, 'Lost in Translation'(2003)을 다시 보면서 이를 새삼 깨달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너무 어처구니없는 번역이라 이 글에서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라고 옮기기로 한다. 원제 속 표현은 통역을 할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의미의 실종이다.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와 1:1 대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번역과 통역은 언제나 근사치에 불과하고, 원어의 의미, 느낌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올해로 나온 지 20년이 되는 이 작품을 다시 보기로 한 건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을 봤기 때문이다. "20 Years Ago, Millennials Found Themselves 'Lost In Translation'." 이 제목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20년 전, 밀레니얼 세대가 이 영화를 발견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20년 전,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예전부터 이 영화가 그 이후로 등장한 어떤 트렌드의 영화들을 대표하는 첫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사의 제목을 보는 순간 큰 호기심이 생겼고, 기사를 읽기 전에 영화를 복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20년 만에 다시 본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은 내가 가지고 있던 좋은 기억보다 훨씬 더 잘 만든 영화였다. 그때는 특이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면, 다시 보니 흔히 하는 말처럼 '시대의 공기를 잡아낸' 영화였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 (이미지 출처: Focus Features)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은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가 감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대부(Godfather)' 등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딸이기도 한 소피아 코폴라는 1999년에 영화 'The Virgin Suicides'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분들을 위해 약간의 복기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플롯이 중요하지 않은 이 영화의 특성상 특별히 스포일러라고 할 게 없으니 아직 안 보신 분들도 안심하고 읽으시면 된다.)

이 영화는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여자 주인공은 유명 영화배우와 뮤지션들의 사진을 찍는 잘나가는 남편과 함께 도쿄에 와서 보내는 며칠 동안의 일을 그리고 있다. 일에 바쁘고 아내에게 무관심한–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에만 관심이 많은–남편이 일과 관련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된 주인공은 우연히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나이 든 헐리우드 배우(빌 머레이)를 만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진지한 배우는 광고를 찍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던 미국에서는 배우들이 일본에 가서 광고를 찍는 일이 흔했다. 어차피 일본 내에서만 보여지는 광고이기 때문에 진지한 배우로서의 명성을 다칠 일이 없었고, 헐리우드 배우를 극진하게 대접했던 일본에서 VIP 대접을 받으며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남자배우도 그렇게 왔다가 문화적인 충격을 겪고 있었다. 특히 일본인이 생각하는 서양인의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를 연기하는 건 무척 어색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돈은 벌어야 했고, 그렇게 괴로워하며 지내다가 우연히 여자 주인공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래는 위에서 언급한 기사의 번역이다. 영문 에스콰이어(Esquire)에 실린 글로, 글쓴이는 헨리 웡(Henry Wong). 이 기사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다른 글도 찾아보게 할 만큼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을 갖고 있다. 한번 느껴보시길 바란다.

인터넷에서 인스타그램 영화 계정만큼 슬프고 불쌍한 곳도 찾기 힘들다. 이런 계정들은 다들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뽀샤시하게 잘 나온 한 컷을 고른 후, 영화 속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사 한 줄을 자막으로 넣는 거다. (새벽 2시쯤 그런 계정에서 사진을 보면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리포스트를 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폴더에 저장한다. 인터넷에서 두 번째로 슬픈 곳이 인스타그램 폴더다.) 인스타그램에서 인기 있는 영화 주제는 오로지 사랑이다. 그것도 가슴 아픈 사랑.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인스타그램 아니면 어딜 가겠나?

이 대사("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움을 느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대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쉽게 고를 수 있는 대사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인스타그램 영화 계정들만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세상에 나온 영화는 몇 편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만큼 소수의 영화만이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끈다.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3부작,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그레타 거윅이 만든 모든 영화들, 그리고 유일한 TV 시리즈가 있다면 '노멀 피플(Normal People)'이다. 전부 짝사랑이거나, 잃어버린 사랑, 그리고 쉽게 깨지는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 있다.

인스타그램용 영화의 표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지 출처: lifefilmlove)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 나온 지 벌써 20년이 되었지만, 지금 보면 작년에 나온 영화처럼 느껴질 만큼 신선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서두르지 않고 전달하는(unhurried, impressionistic vision)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스타일을 지금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도 이 영화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일 거다.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이 연기하는 주인공 샬럿은 스스로를 "못돼먹은(mean)" 예일대 졸업생이라고 묘사한다. 샬럿은 출장 온 남편 존을 따라 도쿄에 오게 되었다. 존을 조반니 리비시(Gionvanni Ribisi)가 연기하는데, 이런 작은 역에 완벽한 배우다. 샬럿은 전성기를 지난 나이 든 배우 밥 해리스를 호텔 바에서 몇 차례 마주치게 된다. 빌 머레이(Bill Murray)가 연기하는 밥과 샬럿은 몇 차례 대화를 나누다가 친해진다. 미국에서 와서 시차로 고생하는 이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홍보담당자, 캘리포니아에서 온 (남편 주변의) 여자들, 잔소리하는 아내, 관계가 멀어지는 배우자–로 지친 상태였다. 젊은 여성과 나이 든 남성의 관계("May-December relationship")는 그렇게 꽃을 피운다. 둘 다 아는 게 전혀 없는 낯선 도시에서 함께 노래방에 가고,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한다.

사실 대부분의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과 동일시하기 힘들다. 유명인을 그렇게 쉽게 만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이들이 묵고 있는 호텔(도쿄의 Park Hyatt)의 엄청난 숙박료와 그런 도시에서 아무런 돈 걱정 없이 일주일을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The Life and Times of Ben Weinberg)

400만 달러의 적은 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1억 2,000만 달러의 수익을 냈고, 소피아 코폴라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본상(Best Original Screenplay)을 받았다. 도쿄에 가면 이 영화와 관련한 장소를 방문하는 투어에 참여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 중요한 레거시를 남겼다. 영화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의 주인공 조이 데이셔넬(Zooey Deschanel),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의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의 케이트 윈슬릿(Kate Winslet)은 모두 샬럿의 남긴 흔적을 공유하는 캐릭터들이다.

위에서 부터 '500일의 썸머,' '엘리자베스타운,' '이터널 선샤인'

여자 주인공 캐릭터뿐 아니라 션 멘데스(Sean Mendes)의 2018년 뮤직 비디오 "Lost In Japan," 요한슨이 유행시킨 핑크색 가발, 그리고 영화에 사운드트랙으로 들어간 프랑스의 대표적인 뮤직밴드 피닉스(Phoenix)가 미국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모두 이 영화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피닉스의 리드 싱어 토마스 마스는 코폴라 감독과 2011년에 결혼했다.)

(이미지 출처: EW)

'밀레니얼, 자신을 보다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