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군중 ①
• 댓글 6개 보기미국은 폭력적인 사회다. 사람들이 개인 간의 거리와 예의를 잘 지키고 (대도시를 제외하면) 낯선 사람에게도 쉽게 인사를 건네기 때문에 미국 사회가 가진 폭력성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건 중산층 이상이 모여 사는 지역이나 농촌의 얘기일 뿐, 도시의 어두운 곳이나 쇠락한 도시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물론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 위험할 수 있다. 총기가 허용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총기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 봐도 미국 사회의 폭력성이 단순히 도시 슬럼의 범죄자들에만 국한될 거라는 기대가 착각임을 알 수 있다. 미국에는 "흑인 아이가 총으로 누군가를 죽였다면 마약, 갱단과 관련한 보복 범죄이고, 백인 아이가 살인을 했다면 학교에서 하는 총기 난사"라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은 이제 한 해에만 80건이 넘게 발생한다. 사실상 매주 일어난다는 얘기다.
며칠 전 위스컨신주 매디슨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은 그 범인이 15세 여학생이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미국의 학교에서 누군가 총기를 난사했다면 예외 없이—대개는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서 자란—남학생이기 때문이다. 위스컨신주에서 다른 학생과 교사를 죽이고 자살한 여학생의 범행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총기 소유가 다양한 인구 집단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범인의 다양화도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느닷없는 계엄령으로 온 국민이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시점에 미국에서는 한 살인사건이 온 국민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었다. 뉴욕시 맨해튼 한복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의 피해자는 매출 기준으로 세계 5위 기업인 유나이티드헬스(UnitedHealth)의 CEO 브라이언 톰슨(Brian Thompson)이었다. 애플의 팀 쿡이나, 삼성의 이재용이 길거리에서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면 그 충격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애플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의 CEO가 이른 아침에, 뉴욕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묵어 봤거나 건물 앞을 지나쳤을 만큼 유명한 맨해튼 힐튼 호텔 입구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정정합니다: UnitedHealthcare는 UnitedHealth Group 산하의 회사입니다. UnitedHealth는 보험회사인 UnitedHealthcare와 의료 서비스 회사인 Optum이라는 두 회사로 구성되어 있고, 사망한 브라이언 톰슨은 최대 의료보험 회사인 UnitedHealthcare의 CEO입니다.
미국에서 길거리 감시 카메라가 가장 많은 도시는 워싱턴 D.C.이고, 그다음이 뉴욕시라고 알려져 있다. 힐튼 호텔 주변에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범인이 총을 꺼내 톰슨을 살해하는 장면은 고스란히 녹화되어 인터넷에 퍼졌다. (아래 영상은 톰슨이 쓰러지는 장면이 보이지 않도록 편집된 것이다. 하지만 범인의 행동을 통해 이게 얼마나 계획된 행동인지 확인할 수 있다.)
용의자가 체포되기까지는 5일이 걸렸지만, 범행 동기는 사건 발생 직후에 알려졌다. 범인이 브라이언 톰슨을 쏜 현장에 떨어져 있던 탄피에 하나씩 새겨 넣은 세 단어가 단서였다. Deny(거부하라), Defend(방어하라), Depose(제거하라). 언론에서는 처음에 이 단어들이 미국의 의료 보험 회사들이 환자의 치료비 지급을 피할 때 사용해 온 방법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해석했다. 비슷한 제목의 책이 있기 때문이다. 'Delay, Deny, Defend (시간 끌고, 거절하고, 방어하라)'라는 이 책의 부제는 "왜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불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면 범인은 이 책의 제목을 빗대어 어떤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살해당한 브라이언 톰슨은 미국에서 가장 큰, 그리고 어쩌면 가장 악랄한 의료 보험사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과 범인이 마치 청부살인업자처럼 냉정하게 살인만 저지르고 현장을 떠난 모습을 고려했을 때, 톰슨의 살해가 의료보험과 관련된 원한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 사건 자체보다 더 큰 관심을 끌었다. 보도를 접한 미국인들은 일제히 범인의 행동을 옹호하며 살해된 CEO를 조롱하기 시작한 거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테러 사건이 일어나거나 심지어 어린 학생들이 총기 난사로 죽어도 온갖 음모론이 퍼지고, 그걸로 돈을 버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미국인들은 싫어도 그게 자유를 누리는 대가라고 생각하고 귀를 닫고 만다.
그런데 브라이언 톰슨 살해 사건은 달랐다. 온라인에서 톰슨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의견을 보기 힘들 만큼 압도적으로 범인을 옹호하고, 응원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공개적으로는 말을 삼가는 사람들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고 말하는 일이 흔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람들은 범인의 옹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죽은 톰슨과 유나티드헬스를 조롱하는 농담들이 경쟁적으로 인터넷에 퍼지며 거대한 밈 공장이 만들어졌다. 견해가 다르면 죽은 사람에 대한 조롱을 서슴지 않는 미국인들이지만, 나는 25년 동안 미국에 살면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언론에서는 이런 "놀이"를 일제히 비난했다. 생각이 다른 건 알지만, 죽은 사람을 조롱하고 살인 행위를 찬양하는 건 문명인이 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꾸지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꾸지람은 CNN이나 뉴욕타임즈처럼 정치적 진보로 분류되는 매체부터 폭스뉴스나 인기 팟캐스트 진행자 벤 샤피로(Ben Shapiro)처럼 우익 매체까지, 모든 곳에서 나왔다.
가령 벤 샤피로의 경우, "좌파들이 (기업인의) 살인을 축하한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뽑은 영상을 올리고, 그런 톰슨의 죽음을 좋아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급진좌파의 악당들"이라고 주장했다. 평소 세상의 모든 문제를 좌익의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그에게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논평이었다. 그는 정치인을 암살하는 것과 기업인을 암살하는 건 다른 문제라면서, 기업인을 암살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악"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면서 "기업인을 길에서 살해해도 된다는 건 결국 혁명을 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샤피로의 비난에 팬들은 전혀 뜻하지 않은 반응을 했다.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들을 보면 "당신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으로 커리어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당신 매체의 구독을 끊는다"거나, "한 번도 고생해 본 적이 없는 부자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줄 모르고 하는 말"이라는 성난 말들이다. 어떤 이는 "여러분, 벤 샤피로는 우리보다 (죽은) CEO와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라고 하기도 했다.
평소 논쟁을 즐기고, 논란의 중심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벤 샤피로지만, 그가 자기 구독자와 팬들에게서 이렇게 혹독한 소리를 듣는 건 처음 보는 일이다.
범인에 대한 대중의 환호는 용의자가 5일 만에 체포되면서 폭발적으로 커졌다. (여기에는 용의자 루이지 맨지오니(Luigi Mangione)가 잘생긴 26세의 이탈리아계 청년이라는 사실도 한 몫을 한 게 사실이다.) 사건 후 버스를 타고 뉴욕을 빠져나와 자기가 사는 펜실베이니아주로 이동한 용의자는 맥도날드에서 음식을 먹다가 미디어를 통해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매장 직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직후 많은 사람들이 이 매장의 온라인 리뷰에 남긴 글과 평점을 보면 한국의 계엄령 모의가 롯데리아의 매장에서 이뤄졌다는 보도 직후에 나온 한국인들의 반응과 닮았지만, 그보다는 훨씬 공격적이었다. 사람들은 그 직원과 매장을 쥐(rat, 밀고자)로 부르며 욕했다.
용의자의 용모와 함께 화제가 된 것이 그의 성장 배경이었다. 언론의 취재와 소셜미디어에 쏟아진 제보에 따르면 루이지 맨지오니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1년에 학비만 우리 돈으로 5,500만 원에 달하는 사립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대학도 아이비리그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를 나와 세계를 여행했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테크기업에서 데이터 엔지니어로 일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미국에서 아무 부러울 게 없는 환경에서 자라고 생활하는, 앞날이 유망한 부자 청년이라는 거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Bret Stephens)의 심기를 건드렸다. 스티븐스는 지난 12일에 발행한 칼럼에서 루이지 맨지오니를 마치 부자들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영웅인 것처럼 생각하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냐며, 그를 우상화하는 대중을 나무랐다. 동부의 부잣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맨지오니와 비교하면 오히려 살해당한 CEO 브라이언 톰슨이 진정한 노동자 계급의 영웅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아이오와주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농장에서 기계 설비 책임자였고, 어머니는 미용사였다. 브라이언도 자라면서 들판에서 잡초를 제거하거나 돼지 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했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도 공립, 주립학교에 다녔다.
그가 보기에 (하와이에 아파트를 갖고 서핑을 즐기는 맨지오니에 비하면) 브라이언 톰슨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대기업의 CEO 자리까지 올라간 진정한 "영웅"이다.
브렛 스티븐스의 비판적인 시각은 단순히 두 사람의 성장 배경 비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9/11을 비롯한 각종 테러로 많은 사람을 죽인 오사마 빈라덴, 그리고 1970년대 '자칼(Carlos the Jackal)'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테러리스트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를 예로 들면서 루이지 맨지오니도 그들처럼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 과격하고 허무주의적인 사상에 빠져서 테러리스트가 된, "분노한 부잣집 아이들(angry rich kids)"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스티븐스의 주장에서 사실 관계에는 오류가 없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는 그 칼럼 밑에 댓글창을 닫아두었고, 칼럼이 나온 직후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결국 뉴욕타임즈도 부자들의 편을 드는 매체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미국의 매체들이 이렇게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동일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것도 드문 일이지만, 대중이 평소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이들 매체에 분노한 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미국인들은 언론인들이 보는 것처럼 이제는 원칙도, 도덕도 모르는 뻔뻔스러운 군중이 된 걸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내가 뉴욕 한복판에서 사람에게 총을 쏴도 내 지지율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트럼프의 말에 비판은커녕 오히려 환호한 미국인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트럼프를 지지하는 매체도, 트럼프를 비판하는 매체도 눈치채지 못한 중요한 변화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갑자기 등장한 변화가 아니라 언론이 무시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오래된 특징일 수도 있다.
'웃는 군중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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