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oad
• 댓글 남기기이 글의 짧은 버전이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 게재되었습니다.
시니어와 주니어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인권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의 풀 네임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이지만,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 마이클 킹(Michael King)의 이름을 받아 마이클 킹 주니어였다.
조지아주 침례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는 교회의 도움으로 유럽과 이집트, 이스라엘 등을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당시 나치 치하의 독일에 들렀다가 16세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유적지를 방문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마틴 루터 킹’으로 바꾸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아들의 이름도 마이클 킹 주니어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로 바꿔 주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은 킹 (주니어) 목사가 인권운동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세계관을 형성한 사람은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였다. 그는 아들에게 백인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너의 의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일찍부터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했지만, 사람들이 가장 쉽게 기억하는 건 그가 1963년에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기념관 앞 계단에서 했던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다큐멘터리나 유튜브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의 연설은 흔히 ‘미드 센츄리(mid-century)’라 불리는 20세기 중반에 흔했던 약간 느리고 엄숙한 톤을 갖고 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 녹음을 들어봐도 비슷한 톤이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마이크와 스피커의 성능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요즘은 정치인들이 TV나 소셜미디어로 대중과 소통하기 때문에 크지 않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지만, 당시에는 소리를 메아리치듯 퍼뜨리는 작은 스피커를 통해 연설을 해야 했기 때문에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연설, 혹은 웅변의 기본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웅변대회와 웅변학원이 남아 있었고, 초등학생도 이승만 대통령이나 킹 목사가 사용하던 방법을 사용해야 했었다.
그런데 그런 옛날식 연설법을 사용한 킹 목사의 목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나이를 종종 착각하곤 한다. 킹 목사가 1968년에 암살당했을 때의 나이는 39세였다. 앞서 언급한 그를 대표하는 연설은 킹 목사가 34세 때 했던 거다. 우리나라에서 최연소 주요 정당 대표라고 하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나이가 36세인 것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킹 목사는 20, 30대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인권운동을 하고 세상을 떠난 거다.
1968년 4월에 일어난 킹 목사의 암살, 그것도 백인에 의한 암살은 미국을 흔들었다. 미국에서는 각 도시에서 분노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건물이 불에 탔고, 이에 놀란 백인들은 ‘법과 질서’를 외치던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흑인들의 항의를 규탄하고 법과 질서를 강조하던 닉슨은 재선을 앞두고 상대 후보의 선거운동본부를 불법 침입, 도청하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었지만, 킹 목사의 죽음은 미국 도시들에 조금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게 된다. 바로 길 이름이다.
MLK Jr. Blvd
미국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불리바드(Boulevard), 애비뉴(Avenue), 파크웨이(Parkway) 같은 도로가 없는 주를 찾기 힘들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무려 41개 주에 900개가 넘는 도로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한다. 2006년에 730개였던 것이 그렇게 늘었으니 아마도 현재는 최소 1000개가 넘는 도로가 그의 이름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지역에서 그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붙일까. 조사에 따르면 주로 중서부와 남부 지역에 많이 있고, 도시 중에서도 흑인들이 밀집된 지역에서 그의 이름이 붙은 도로들이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최근에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디어드라 마스크의 ‘주소 이야기’(Disclosure: 나는 이 책 한글판 뒤에 짧은 서평을 썼다)에 따르면 흑인들은 “새로운 도시로 이사가서 흑인 커뮤니티를 찾고 싶으면 ‘마틴 루터 킹 스트리트가 어디냐’고 묻기만 하면 된다”라는 말을 할 만큼 킹 목사의 이름과 흑인 커뮤니티는 동일시된다.
하지만 이는 부정적인 함의를 갖기도 한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은 여전히 인종에 따른 경제력 격차가 심각하고, 흑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은 도시에서도 유난히 낙후된 슬럼가인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그 결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라는 이름이 붙은 도로 주변은 하나같이 가난한 우범지대”라는 말도 있다. 오죽했으면 인기 흑인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모르는 곳을 지나다가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을 가진 길을 만나면 무조건 뛰어 달아나라”라는 농담까지 했을까.
사진작가 수전 버거(Susan Berger)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로들의 모습을 담는 'Martin Luther King Dr.'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래 웹사이트에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별다른 어젠다를 가지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아니었고, 사진 속의 모든 동네가 가난한 건 아니지만 많은 사진들이 가난을 보여주는 게 사실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미국에서 가장 흔한 길 이름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킹 목사의 이름을 딴 도로가 많은 남부는 백인 우월주의자, 흑인을 싫어하는 백인들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소 이야기’를 보면 백인들이 자기 동네에 킹 목사 이름이 붙는 게 싫어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얘기가 나온다. “마틴 루터 킹의 이름을 붙이려면서 그 길의 절반은 제임스 얼 레이(킹 목사의 암살범)라고 붙이라”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고, 길이름 표지판 속 킹 목사의 이름 위에 ‘로버트 E. 리’(남북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라고 낙서를 해놓는 경우도 있다.
이런 갈등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킹 목사의 고향인 조지아주 애틀랜타다. 그곳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등장한 것은 킹 목사가 암살당한 후 무려 8년이 지나서였다. 이에 반해 바다 건너 네덜란드의 할렘시에서는 암살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독일 마인즈에서는 3주일 만에 킹 목사의 이름 붙은 길이 등장했다. 이렇듯 전 세계인이 애도하는 인물의 고향에서조차 그의 이름 붙이기를 거부할 만큼 미국 백인들은 강하게 저항한 것이다. 이를 달리 생각하면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킹 목사가 왜 그토록 흑인 인권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왜 흑인이 사는 동네는 항상 가난한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흑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 아니냐는 것. 하지만 근래 나오는 연구와 탐사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대도시들은 흑인들을 낙후된 지역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막는 한편, 가난한 백인들은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각종 혜택과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1970년 공황을 거치면서 흑인들이 사는 지역은 경제적으로 회복하지 못한 채 슬럼가로 남게 되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이름이 들어간 도로 주변이 도심빈민가로 변한 현실은 그 자체로도 가슴이 아프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킹 목사가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던 행사의 이름을 알면 더욱 그렇다. 그 행사는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이었다. 킹 목사는 흑인의 인권은 그들의 경제적 권리, 일할 기회와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고, 흑인이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진정한 평등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 붙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라는 도로명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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