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ndom Come
• 댓글 2개 보기오는 3월 10일에 개최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작 리스트가 발표되었다. 원래 후보작이 발표되면 어느 작품이 리스트에 들어갔고, 어느 작품이 빠졌는지가 화제가 되지만 어제 발표된 내용은 그 어느 때보다 큰 뉴스가 되었다. 지난 한 해 가장 큰 화제가 되었던 작품 '바비(Barbie)'를 만든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이 감독상 후보에, 주인공 바비를 연기한 마고 로비(Margot Robie)가 여우 주연상 후보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심작이 후보에도 들지 못할 경우 사용하는 표현("Oscar snub")이 있을 만큼 이런 일은 흔히 있지만, AP 통신이 "근래 들어 가장 충격적인 일"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레타 거윅과 마고 로비의 후보 탈락은 뜻밖의 일이다.
그렇다고 '바비'가 완전히 무시당한 건 아니다. 13개 부문에서 후보로 오른 '오펜하이머'나 10개 부문에서 후보로 오른 '플라워 킬링 문' 수준은 아니지만, '바비'도 8개 부분에서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영화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여성 감독과 여성 주연이 후보에서 빠지고, 유명 남자 배우인 라이언 고슬링(Ryan Gosling)은 남우 조연상 후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결정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여론을 잘 설명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이언 고슬링이다. 그는 후보 발표 직후에 아래와 같은 글을 공개했다.
켄은 바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 '바비'는 그레타 거윅과 마고 로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두 분은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하고 영화사를 새로 쓴 이 작품이 탄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재능과 집념, 천재성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 참여한 그 누구도 후보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두 분이 감독상과 여우 주연상의 후보가 되지 못한 사실은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노출이 많은 옷을 입은 영혼 없는 인형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과연 성공할까 싶었지만, '바비'는 그런 우려를 잠재우며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들었고, 문화의 범위를 넓히며 역사에 새로운 장을 썼습니다. 그레타 거윅과 마고 로비가 이뤄낸 업적은 다른 후보자들과 나란히 인정받아야 합니다. (전문)
온라인에서 일어난 여론은 고슬링보다 훨씬 더 신랄했다. '바비'를 대표하는 세 사람 중에서 남자만 유일하게 후보가 된 상황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달하려던 메시지였다며, 영화가 표현한 부조리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복해서 보여준 아카데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다. 그렇다면 아카데미는 왜,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남자들이 회의실에 모여서 이 두 사람을 배제하기로 했을까?
먼저, 아카데미가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상(혹은 오스카상)을 말할 때의 '아카데미'는 AMPAS(The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라는 단체를 간략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1만 명이 넘고, 그중에서 후보작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자는 약 9,500명이다. 이들이 우편으로 투표를 하기 때문에 한 자리에 모여서 '작당모의'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바비'는 작품상 후보에는 들어갔고, 감독상 후보에서는 빠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는 10개의 작품상 후보를 정하고, 5명의 감독상 후보를 정한다. 특정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는 건 말 그대로 작품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품의 제작을 총지휘한 감독은 자연스럽게 감독상의 후보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두 상에 배정된 후보의 숫자가 다르기 때문에 작품상 후보가 된 10개의 영화 중 절반은 감독상 후보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럼 나머지 다섯 작품은 감독이 없이 저절로 만들어졌느냐"라는 불평이 나오지만, 관례상 감독상 후보 티켓은 다섯 장밖에 배정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더 중요한 건 다섯 개의 감독상 후보를 선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번 일을 설명한 뉴욕타임즈의 기사에 따르면 작품상의 경우 9,500명이 모두 투표할 수 있는 반면, 감독상 후보는 아카데미 회원 중 감독 분과에 속한 587명에게만 투표권이 있다. 그런데 그중 남성이 75%를 차지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남자 감독들만 선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번에 감독상 후보작이 된 '추락의 해부(Anatomy of a Fall)'를 감독한 사람은 쥐스틴 트리에(Justine Triet)라는 여성이다. 다섯 명 중 한 명이 충분하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게다가 백인 남성들의 클럽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던 아카데미는 2021년과 2022년 연속으로 여성 감독(클로이 자오, 제인 캠피온)에게 감독상을 안겼다. 이는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수상과 함께 아카데미가 오명을 벗으려고 애쓰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줌아웃해서 살펴보면, 도합 74번 수여된 아카데미 감독상 중에서 여성 감독이 받은 경우는 3번 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 감독(캐스린 비글로우)이 처음 이 상을 받은 게 2010년이다. 뉴욕타임즈 기사는 아카데미가 근래 들어 다양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전통적으로 1) 남자 주인공이 주도하는 영화를 선호하고 2) 코미디 영화를 회피해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바비'는 여자 주인공이 주도하는 코미디 영화이니 아카데미의 사랑을 받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기준, 혹은 편견을 갖고 있다고 해도 '바비'가 문제없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면 감독과 주연 여배우가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사실은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또 하나의 설명은 아카데미 감독상이 전통적으로 주류 흥행작품을 회피한다는 주장이다. 근래에 이 상을 받은 영화들 중 많은 작품—가령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 '노매드랜드(Nomadland),' '로마(Roma)'—이 극장에서의 흥행과는 거리가 있는 영화들이다. 그런데 '바비'는 지난해 전 세계 최대 흥행작이기 때문에 아카데미가 좋아하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조지 밀러(George Miller)가 감독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는 주류 흥행작이면서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역시 남자가 감독한 로맨틱 코미디 '라라랜드(La La Land)'는 감독상을 받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역량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바비'로 골든 글로브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6년 전 데뷔작 '레이디 버드(Lady Bird)'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가 된 사람이다. 무엇보다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고 오래도록 비난 받아온 바비 인형을 주인공으로 하는 실사 영화를 만들면서, 이를 통해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흥행까지 대성공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오터레터에서 '마텔의 장난감 상자'를 통해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상을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느냐는 게 헐리우드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가진 의문이다.
BBC는 이번 결정에 성차별(sexism)적인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설명한다.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바비'는 장난감으로 가득한 세상을 묘사하면서 큰 수익을 낸 영화이지만, 핑크색 가득한 화면 뒤에는 기존의 문화를 뒤집는(subversive) 메시지가 숨어있다. 세상이 여성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을 깰 뿐 아니라, 이를 메타(meta) 유머를 통해 전달하는 영화인데, 아카데미는 이를 '흥행한 코미디 영화'라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BBC 기사의 설명이다.
'바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카데미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이 작품의 대본을 함께 쓴 그레타 거윅과 그의 남편 노아 바움백(Noah Baumbach)을 각본상(screenplay)이 아닌, 각색상(adapted screenplay) 후보로 올린 것이다. 각색상은 소설 등 기존에 있는 작품(원작)을 바탕으로 뛰어난 대본을 만든 작가에게 돌아가는 상이다. 하지만 '바비'는 원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기존에—단지 인형으로—존재하던 캐릭터라는 이유로 스토리를 처음부터 창작한 두 사람을 각색상 카테고리로 넣어버렸다는 거다.
영화 '바비'가 나왔을 때 뉴욕타임즈는 이 영화가 가치 전복적인 영화인지, 아니면 장난감 기업의 돈벌이용 흥행 영화인지에 대해 평론가들의 의견이 갈린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런 평론가들의 갈등은 평론가들이 단순한 이분법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여자 감독이 그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지난 14일에 열린 크리틱스 초이스상(Critics' Choice Movie Awards) 시상식에서—감독상은 '오펜하이머'의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 받았다—최우수 창작곡상(Best Original Song)은 영화 '바비'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부른 "I'm Just Ken"이 받았다. 그런데 수상작이 발표되는 순간 고슬링이 지은 표정이 큰 화제가 되었다.
자기가 부르고도 '왜 이 노래가 상을 받지?'라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곡도 인기가 있는 곡이었다. 하지만 '바비'에 수록된 노래로 함께 후보작에 오른 다른 두 곡은 인기 가수 두아 리파(Dua Lipa)가 부른 "Dance the Night"과 또 다른 인기 가수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가 부른 "What Was I Made For"였다. 남자 배우가 인기 여자 가수들보다 반드시 노래를 더 못 한다고 할 수는 없고, 평론가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있겠지만, 고슬링의 노래와 두아 리파의 노래, 그리고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를 직접 들어 보고, 팬들의 반응을 보면 라이언 고슬링이 수상 소식을 듣고 지은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 노래에 상을 준 평론가들은 여성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빌리 아일리시, 두아 리파의 노래보다 여자 주인공에 밀려난 켄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고슬링의 노래에 더 공감했던 걸까?
참고로, 미국 영화 평론가들의 성비는 남자 81%, 여자 19%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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