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 일이지만, 헐리우드 인기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이 발병하지 않았는데도 유방 절제수술을 받은 게 큰 화제가 되었다. 졸리가 받은 '예방적 유방절제술'이 확산되기 시작한 건 BRCA1라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경우 유방암 발병 확률은 80%, 난소암 발병 확률은 40%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유방암 발병에 이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메리 클레어 킹(Mary-Claire King) 교수다.

아래 이야기는 킹 교수가 젊은 시절 겪었던 일을 더모스(The Moth)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는 내용인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준 것이지만, 그가 겪은 일은—그리고 힘든 순간에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들은—궁극적으로 킹 교수가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 중요한 연구와 무관하지 않다.


1981년 4월 첫 주는 시작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일요일 저녁, 남편은 제게 이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학원생 여자와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러면서 당장 내일 그 학생과 코스타리카로 떠나겠다고 말했죠.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저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33년이 흐른 지금도 저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편은 자기가 한 말에 충격을 받은 내게 위로랍시고 진공청소기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청중 웃음)

저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고, 4월이니 학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당장 다음날인 월요일에 저는 수업을 진행하러 출근해야 했습니다. 가서 수업을 진행하거나, 아니면 왜 못하는지 설명해야 했으니 차라리 그냥 수업을 하는 게 나았죠. 저는 5살이었던 딸아이 에밀리를 유치원에 내려주었습니다. 어딜 가나 에밀리를 충성스럽게 따라다니는 오스트레일리언 셰퍼드 '어니'와 함께요. 그리고 캠퍼스에 가서 아침 수업을 끝냈습니다. 9시 30분쯤이었죠.

교실에서 나오다가 학과장과 마주쳤는데, 잠깐 자기 사무실로 와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러겠다고 하고 따라갔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간 학과장은 "선생님이 테뉴어(tenure, 임기보장)를 받았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어요"라며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참고로, 이 학과장은 저보다 한 세대 위였고, 다 자란 아들만 셋이 있었습니다. 딸을 키워 본 경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저 외에는 젊은 여자 조교수와 함께 일해 본 경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1980년대 미국의 분위기를 보여준다—옮긴이) 울음을 터뜨린 저를 보고 놀란 학과장은 "테뉴어 받았다는 소식에 이런 반응을 하는 건 처음 봅니다"라고 했죠. (청중 웃음)

그는 제게 의자를 권하면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죠. 저는 테뉴어 소식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남편이 어제저녁에 이혼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학과장은 저를 쳐다보더니 자기 서랍을 열어서 커다란 잭 대니얼스 위스키병을 꺼냈습니다. 그러고는 위스키 잔의 반을 채우더니 "이거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라고 제게 권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대학교 캠퍼스에서 말이죠. (청중 웃음)

저는 정말로 위스키 잔을 비웠고, 학과장 말처럼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청중 다시 웃음) 그렇게 하루 반나절을 보내고 술도 깼죠. 오후 3시 30분이 되어 딸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오기 위해 캠퍼스를 나섰고, 에밀리와 어니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집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날 도둑이 들어와 집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뒤엎어 놓은 거죠.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남편은 집에서 일하는 날이 많아서 도둑이 털 집을 물색하다가 지나치곤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바로 그날 남편이 집을 나갔기 때문에 마음 놓고 들어와 물건을 훔쳐 간 겁니다.

곧바로 911에 전화했고, 젊은 경찰관이 도착했습니다. 그 경찰관과 함께 없어진 물건이 뭔지 파악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던 것이, 남편이 집을 나가면서 자기 물건들을 많이 가져갔기 때문에 뭐가 도둑맞은 거고, 뭐가 남편이 가져간 건지 알기 힘들었어요. 제 설명은 들은 경찰관은 천천히 확인해 보고 알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와 함께 2층에 올라가 에밀리 방에 들어갔습니다. 에밀리 방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바닥에 물건들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었죠. 서랍은 다 나와 있고, 침대, 커튼, 뭐 하나 온전한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밀리는 그런 자기 방을 쳐다보고는 경찰관에게 "도둑이 내 방에는 들어오지 않은 거 같아요." (평소 방 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뜻. 청중 웃음)

경찰관은 그 말에 웃음을 참고 "혹시 없어진 게 발견되면 내게 전화를 줄래?" 하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저는 그 주에 중요한 출장 약속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보건원(NIH)에 가서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교수가 NIH에서 큰 액수의 연구비를 따려면 NIH를 종종 방문해서 발표하게 했습니다. 5년의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제게는 몹시 중요했습니다. 제가 혼자서 그렇게 연구비를 신청하는 건 처음이었죠.

지금도 NIH는 미국에서 의료와 관련한 연구비를 가장 많이 지급하는 곳으로, 킹 교수가 받으려고 했던 연구비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주는 R01 Grant였던 것 같다. 보통 3~5년 동안의 연구비를 주기 때문에 실험실을 차리고 본격적인 자기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젊은 교수에게는 아주 중요한 기회다. 이 연구비를 따낸 교수와 그렇지 않은 교수의 운명이 갈린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미국 국립보건원 전경 (이미지 출처: MoCo360)

원래 계획은 이랬습니다. 제가 워싱턴 D.C.에 가서 발표를 하는 동안 에밀리는 아빠와 집에 있기로 했고, 시카고에 사는 저희 엄마가 화요일에 버클리에 와서 남편을 도와주기로 했죠. 물론 그건 남편이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기 전에 세운 계획이었고, 저희 어머니는 일요일 밤과 월요일 낮에 제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시카고 시간으로 늦은 밤에 그 모든 일을 이야기하느니 엄마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화요일에 엄마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고, 저는 에밀리와 함께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버클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 일요일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엄마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어떻게 가정이 쪼개지게 놔뒀느냐," "어떻게 애를 아빠 없이 자라게 만드느냐"면서—참고로, 제 아이는 그 이후로도 아빠 없이 자라지 않았고, 인생에 아빠가 항상 있었습니다—"가정이 네 일보다 더 중요한 건데, 너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남편과 이야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은 이미 코스타리카에 가 있다고 했고요.

엄마는 점점 더 흥분했고,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에밀리는 겁을 먹었습니다. 그런 엄마를 데리고 버클리 집에 도착한 저는 그 상황에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장을 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엄마는 제 집에 온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자기는 시카고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놔둔 걸 이해할 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 아이를 캘리포니아에 놔두고 출장을 가는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출장 포기하고 집에서 에밀리를 돌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메리 클레어 킹 교수 (이미지 출처: The Moth/YouTube)

33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저희 엄마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게 그보다 일 년 전이었고, 엄마는 그렇게 캘리포니아에 왔다가 시카고 집으로 돌아간 후 두 달 만에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그렇게 흥분한 게 완전히 비이성적인 건 아니었죠. 하지만 그 시점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제 출장은 취소하고, 내일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 편을 알아봐서 공항으로 모셔다드리겠다고요.

그리고 저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UCSF)에서 박사후연구원(posdoc)인 저를 지도해 준 멘토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먼저 출발해서 워싱턴 D.C.에서 종양학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었죠. 저는 그분에게 제 상황을 설명하고—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저를 잘 알고 있는 분이었죠—이번 출장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은—성인이 된 딸을 가진 분이었습니다—제 이야기를 다 듣고는, 그래도 무조건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럼 에밀리와 함께 오라고 했죠. 에밀리와 잘 아는 사이니까 제가 발표를 진행하는 동안 자기가 에밀리를 봐주겠다는 거였습니다. 자기는 손주들도 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다며,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제가 에밀리 비행기표도 없다고 하니까, 전화를 끊는 즉시 여행사에 전화해서 에밀리 비행기표를 사줄 테니까 어머니를 공항에 모셔다드리면서 항공사 창구에서 에밀리의 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셔도 괜찮겠냐고 하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다시 한번 저를 안심시키며, 여행사에 전화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전화를 끊겠다고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리지 (이미지 출처: eBay)

저는 시카고로 가는 어머니의 비행기표 날짜를 바꿔야 했습니다. 그때는 그런 일이 어렵지 않았죠. (청중 웃음) 제 기억에 어머니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오전 10시였고, 저희는 넉넉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일찍 버클리를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베이 브리지에 교통 정체가 엄청났고, 평소 45분이면 도착할 공항에 가는 데 1시간 45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늦게 도착하니 엄마의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는 15분 남았고, 저와 에밀리의 비행기는 45분 후 출발이었습니다.

비행기표를 받는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습니다. 게다가 에밀리의 표와 엄마의 표를 받는 줄이 다르니 더 난감했고, 둘 다 짐가방을 갖고 있었던 데다, 엄마는 벌써 병색으로 기력이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짐 검사 과정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혼자서 게이트까지 갈 수 없다며 제가 동행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밀리에게 "할머니를 게이트에 모셔다드리고 올 테니까 이 줄에 서 있어"라고 얘기했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어떻게 이렇게 어린애를 혼자 내버려둔다는 거냐!"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긴 다섯 살 짜리를 어른들 사이에 놔둔다는 게 무리이기는 했죠.

그런데 그 순간, 제 뒤에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제 귀에 익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Emily and I will be fine (제가 에밀리와 같이 있으면 됩니다)." 저는 그에게 고맙다고 했죠. 하지만 엄마는 "어떻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애를 맡길 생각이냐!"고 펄쩍 뛰었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조 디마지오(Joe DiMaggio)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 (청중 박수와 폭소.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 조 디마지오가 그들 바로 뒤에 서 있던 거였다—옮긴이)

메이저리그 야구의 전설 조 디마지오는 당시 67세의 나이였다. 마릴린 먼로와 결혼하기도 했던 그를 모르는 미국인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지 출처: Montreal Gazette)

조 디마지오는 내 얼굴과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에밀리를 향해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안녕, 에밀리. 나는 조 아저씨란다." 에밀리는 그와 악수하며, "안녕하세요, 조 아저씨. 저는 에밀리라고 해요."

저는 엄마를 끌고 게이트로 갔고, 무사히 비행기에 태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20여 분 만에 다시 에밀리에게 돌아왔습니다. 그새 줄은 많이 짧아져서 에밀리와 조 디마지오는 창구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에밀리는 디마지오의 도움으로 자기 비행기표를 받아 손에 쥐고 있었죠.

디마지오의 일행은 벌써 게이트로 이동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그는 "My pleasure (별말씀을요)"라고 대답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는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걸어가다 말고 저를 향해 그 긴 팔로 경례를 하고 커다란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와 에밀리는 워싱턴 D.C.에 무사히 도착했고, 인터뷰는 잘 진행되었고, 저는 연구비를 따낼 수 있었죠. 그게 유방암의 유전 요인을 밝히는 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 🦦


메리 클레어 킹은 1946년생이다. 이 세대 사람들의 20대는 세계가—특히 미국이—큰 정치, 사회적 변화를 겪은 때였다. 1967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킹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소비자 권익 운동을 이끌던 랠프 네이더(Ralph Nader)를 도와 농장에서 사용하는 살충제가 농장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 지도교수 앨런 윌슨(Allan Wilson)의 권유로 유전학으로 돌아선 킹은 박사과정 연구를 통해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가 99%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의 연구를 통해 인류와 침팬지가 진화 과정에서 갈라진 것이 500만 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킹은 유방암 유전자의 변이를 규명한 것 외에도, 청각장애, 조현병 등의 유전적 요인을 연구했다.

박사과정 중에 칠레의 산티아고로 가서 칠레 대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1973년 결혼한 남편은 생태학자인 로버트 콜웰(Robert K. Colwell)로, 두 사람은 함께 남미에서 머물다가 칠레의 정치 상황 변화로 버클리로 돌아왔다. (위의 이야기는 그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두 사람은 1983년에 이혼했다.)

킹은 그 후에도 남미 지역과의 인연을 이어갔고, 1984년부터는 아르헨티나의 인권운동 단체인 '마요 광장의 할머니들(Asociación Civil Abuelas de Plaza de Mayo)'을 도와 군부 독재에 의해 납치된 여성들이 감옥에서 낳았다가 강제 입양된 아이들(400~500명 추산)을 찾는 일을 도왔다. 킹은 이 아이들의 생모를 찾아주기 위해 유전자 데이터를 사용했고, 같은 기술을 사용해 엘살바도르, 아이티, 멕시코, 르완다 등의 지역에서 인권 활동을 펼쳤다.

'마요 광장의 할머니들'을 돕는 메리 클레어 킹 (이미지 출처: Lasker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