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이 사퇴하면 ②
• 댓글 5개 보기민주당이 대선 후보를 교체하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바이든이 자기를 대신할 후보를 지명하고 사퇴하는 것이다. 미국 역사에는 그런 사례가 있다. 가장 유명한 예가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이 1968년 대선에서 후보를 사퇴한 것이다. 존 F. 케네디의 부통령이었던 존슨은 1963년 케네디의 암살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케네디의 잔여 임기를 마치고 1964년에 대선에 출마해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임기 말에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면서 재선에 임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1968년은 여러모로 미국 정치사상 최악의 해였다. JFK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민주당 후보가 되는 게 확실시되는 시점에 암살당했고, 그해 8월에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시위와 폭력으로 대혼란을 겪었고, 결국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그해 11월 대선에 승리했다.
지금의 민주당은 그때와 달리 단합이—적어도 아직까지는—잘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바이든이 물러날 경우 다음 주자가 누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내부적 합의가 된 상태다. 따라서 가장 깔끔한 방법은 바이든이 후보를 사퇴하면서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을 지지한다"라고 발표하는 것이다. 그러면 민주당이 가진 절차에 따라 해리스를 중심으로 단합해서 4개월 동안 선거운동을 하게 된다.
문제는 앞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해리스의 인지도가 너무나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바이든은 자기가 트럼프와 맞붙어서 승산이 없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물러나는데 자기보다 더 승산이 없는 해리스 부통령이 후보가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실제로 바이든은 카말라 해리스가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싶다고 했고, 그걸 보지 못하면 자기는 트럼프와 대결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재 전당대회
미국에서 정당의 대선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 contested convetion)'의 가능성이다. 다소 거칠게 설명하면, 당내 경선에서 후보가 확정되지 않을 경우 당 지도부, 핵심 당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전당대회에서 후보를 결정하는 게 중재 전당대회다. 공화당이 이 제도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건 1948년, 민주당은 1952년으로, 현재 미국 정치인 중에 중재 전당대회를 경험해 본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령, 민주당 의사(議事) 운영 위원회(rules committee)에서 오래 활동했고, 브루킹스 연구소의 연구원이기도 한 일레인 카마크(Elaine Kamarck)가 이 제도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즘 여러 매체에 불려다니며 "바이든이 사퇴할 경우" 민주당에서 밟게 될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그가 폴리티코와 뉴욕타임즈에서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일레인 카마크는 바이든이 민주당의 후보 교체 작업을 돕고 싶다면 8월 19~22일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우연하게도 시카고에서 열릴 예정이다)까지 기다리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후보를 사퇴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이든은 이미 경선을 거쳐 대선 후보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가 다음 후보를 지목하지 않고 사퇴할 경우 민주당 내에서 이른 시일 내에 후보를 찾아 결정해야 한다.
바이든은 이미 당내에서 대의원을 확보하고 있고, 이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바이든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지만, 바이든이 후보에서 사퇴하는 순간 개인의 의지대로 후보를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카마크는 그들이 바이든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바이든이 지지하는 후보에 투표할 것으로 본다. 이렇게 진행되면 중재 전당대회는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바이든 지지율/인기도를 이유로 카말라 해리스를 지지하지 않고 물러나는 경우다. 사실 민주당 내에서 바이든의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리스를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8월 전당대회에 모이는 4,000여 명의 당원들이 말 그대로 "체육관에서"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중재 전당대회가 열리게 된다.
한국에서 "체육관 선거"는 비민주적인 선거, 독재의 산물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1972년에 유신헌법을 선포한 후 직접 선거 방식을 폐지하고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이후의 한국의 독재자들이 이런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재자들은 미국에서도 체육관에서 모여 대선 후보를 결정한다는 이유로 그걸 흉내내 정당한 절차처럼 포장했고, 그 결과 한국 사람들에게는 미국에서 당원들이 모여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중재 전당대회를 비민주적인 절차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의 인식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앞서 말한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그해 각 주에서 열린 예비선거(당내 경선)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중진과 린든 존슨의 지지로 대의원을 싹쓸이했다. 당 지도부가 일반 유권자의 민의와 다른 결정을 하는 동안 민주당 지지자들은 전당대회 행사장 밖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과 충돌해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까지 미국 정당의 대선 후보 결정은 사실상 당내 중진들이 결정해 왔기 때문이다. 몇몇 주에서 예비선거나 코커스가 개최되기는 했어도, 그 결과가 지금처럼 후보 선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 특정 후보가 주요 격전지에서 열리는 예비선거에서 인기를 끌면 본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음을 증명할 수 있었고, 그걸로 당내 중진("party boss")들과 협상을 벌여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고, 영향력이 큰 중진이 지지를 결정하면 대의원을 보장받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민주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1968년의 유혈사태 후 미국의 두 정당은 대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당원/정당 지지자들의 의견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절차를 수정했고, 그게 현재 사용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트럼프를 만들어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정당이 존재하는 이유는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신 일종의 '피어 리뷰(peer review, 동료 평가)'를 거치기 위함인데, 후보를 오로지 민심에 따라 결정하다 보니 트럼프처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후보까지 당선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방식이 처음 사용된 1972년, 민주당은 오로지 민심에 따라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가 재선에 도전한 닉슨 대통령에게 참패한다. 특정 정당, 특정 후보를 좋아하는 정당 지지자의 생각을 반영한 결과, 일반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하게 된 것이다. 미국 정치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해가 미국 정당이 후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해이며, 트럼프가 후보가 되는 2016년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도 잊히다시피 했던 중재 전당대회 이야기가 한국 언론에도 오르내리게 된 건 2016년, 트럼프가 공화당 지지자들의 민심을 장악하면서다. 트럼프처럼 문제가 많은 후보가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당내에서 일어나면서 중재 전당대회를 통해 트럼프를 막자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민심을 거스르는 걸 두려워했던 공화당은 중재 전당대회로 트럼프를 꺾는 비장의 카드를 사용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그렇게 해서 공화당을 자기 손에 넣었다.
민주당이 지금 중재 전당대회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건 전혀 다른 이유에서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대선 후보가 된 바이든을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야 하는데, 바이든이 말을 듣지 않는 거다. 카말라 해리스의 본선 경쟁력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바이든이 해리스를 지목하지 않고 물러나야 당내에서 "미니 경선"를 진행해서 후보를 결정할 수 있는데, 바이든이 전당 대회까지 버티다가 물러날 경우, 어쩔 수 없이 중재 전당대회를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1968년처럼 중재 전당대회를 비민주적인 절차라고 생각하고 분노할까? 일레인 카마크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중재 전당대회를 이끌 4,000여 명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미 민주적인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여서 바이든을 대신할 후보를 찾아낸다면, 반트럼프 진영은 쉽게 결집할 수 있다. 문제는 트럼프에 대해 호의적인 중도층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바이든이 산소호흡기를 달고 병원에 누워서 출마해도 뽑겠다"고 하지만, 중도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래서 민주당은 지금 흥행이 필요하다. 조용히 새로운 후보를 뽑는 게 아니라, 떠들썩한 전당대회에서 쟁쟁한 후보들이 경쟁하고,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설득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후보가 뽑혀 당이 연합하는 드라마를 만들기 원한다. 8월 민주당 전당대회가 많은 뉴스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이 경우는 중재 전당대회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경쟁 전당대회(contested convention)에 해당하고, 조지 W. 부시 시절에 인기를 끌었던 정치 드라마 웨스트윙(West Wing)에 나온 아래 장면이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자세한 차이는 일레인 카마크의 설명을 참고.
그렇다면 누가 이런 경쟁에 뛰어들까? 민주당 지지자들은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외에도 개빈 뉴섬(Gavin Newsom) 캘리포니아 주지사, 그레첸 휘트머(Gretchen Whitmer) 미시건 주지사, 피트 부테지지(Pete Buttigieg) 교통부 장관, J.B. 프리츠커(Pritzker) 일리노이 주지사, 앤디 베쉬어(Andy Beshear) 켄터키 주지사 같은 사람들이 경쟁에 나서길 바라고 있다. 이들 중 누가 되어도 트럼프만 막을 수 있다면 열정적으로 지지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까지는 두 가지 장벽이 있다. 하나는 누가 카말라 해리스에 도전장을 내겠냐는 것. 개빈 뉴섬은 민주당 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백인 남성이다. 그런 그가 인도계 흑인 여성을 제치고 후보가 될 경우 받게 될 따가운 눈총과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백인 여성인 그레첸 휘트머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조용히 기다리면 다음 대선에서 자기에게 기회가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지금 나서서 해리스를 제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 카말라 해리스는 정말로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없을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바이든의 후보 사퇴를 원하는 여론이 증가하면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해리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선 토론회 직후 바이든의 후보 사퇴를 가장 먼저 주장하고 나온 뉴욕타임즈는 펜실베이니아와 버지니아에서 해리스의 대(對) 트럼프 승리 가능성이 바이든을 넘어섰다는 조사 결과를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 트럼프 암살 시도가 있기 전에 실시한 조사이고, 두 개의 주에 제한된 것이지만, 해리스가 유일한 대안이 된다면 앞으로 4개월 동안 그가 성장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과연 민주당은 그런 가능성만으로 해리스를 바이든의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아직 알 수 없다. 아니, 바이든이 거국적 양보를 할지도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트럼프에게 필패라는 위기의식도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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