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오래동안 "고아 수출국"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었다.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국제입양 송출국'이라고 불러도 그 의미까지 부드러워지는 건 아니다. 한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가 문화와 인종이 다른 나라에서 자라면서 겪을 문제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아이의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국제입양은 한 사람, 아니 여러 사람의 인생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왜 한국이 오래도록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남아 선호 사상 때문에, 친혈육에 대한 중시 때문에 입양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비판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현재 상황에 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 최근 폴리티코에 게재된 기사 ‘Did Something Happen to Mom When She Was Young? (어머니가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는 한국 입양 문제를 단순히 한국 전쟁과 사회 복지의 부족, 남아 선호 사상 만으로 설명할 수 없음 보여준다.

제시카 베이트먼(Jessica Bateman)이 쓴 이 기사는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아주 비슷한 국제, 국내 정치적 경험을 한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많은 아이들을 국제입양시킨 사례를 이야기한다. 한국은 한국 나름의 사정이, 그리스는 그리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그리스의 사례를 보면 한국의 국제입양 문제를 조금 다른 틀로 생각해 보게 된다.


데이비드 웰런(David Whelan)의 어머니 조언(Joan)이 정신병 증세를 처음 보인 것은 데이비드가 아직 아기였던 1986년이다. 데이비드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정신병원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봤다. 조언은 조울증 장애(bipolar disorder) 진단을 받았다. 데이비드는 혹시 어머니가 과거에 겪은 일이 정신질환의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어머니의 과거는 어릴 때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부모(데이비드의 외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어린 데이비드는 그게 무슨 일이었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26살이던 2016년, 대학원 방학 때 집에 갔다가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어머니의 과거에 관해 물었다. "어머니가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때부터 몇 달 동안 조른 끝에 아버지가 비로소 "네 엄마가 네게 말해줘도 좋다고 했으니"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네 외할아버지는 그리스에서 총살형을 당했단다. 정치적인 문제였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는 데이비드에게 외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망확인서 사본을 건네주었다.

데이비드는 외할아버지의 이름, 엘리아스 아르지리아디스(Elias Argyriadis)를 구글에서 검색해 봤다. 그리스에서 공산주의 지도자였고, 간첩혐의로 1952년에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수수께끼 같았던 어머니의 과거가 드디어 풀렸다는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궁금증 하나가 풀리자, 더 많은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법정에 앉아있는 엘리아스 아르지리아디스 (이미지 출처: Politico)

외할아버지가 그리스에서 처형당했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미국 가정에 입양된 거지? 어머니를 입양한 양부모—지금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친부모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까? 그리스에 아직도 어머니의 친척들이 살아계실까?

데이비드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감춰진 역사—미국에 살고 있는 수백 명의 삶에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는 냉전 시대의 정치와 비밀, 거짓말이 얽혀있는 역사—를 밝혀내려 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시점에 5,000마일 떨어진 대서양 너머에서 누군가 데이비드 어머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었다.

냉전 시기의 입양 산업

데이비드의 어머니 조언이 미국 가정에 입양된 건 우연히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1949년, 그리스의 내전이 끝난 후에 일어난 거대한 현상의 일부였다. 그리스 내전은 냉전 기간 중 벌어진 첫 번째 대리전(proxy war)이었다. 후에 일어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만큼 잘 알려진 전쟁은 아니지만,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정부와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좌익 게릴라 사이에 벌어진, 전형적인 대리전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내전은 세계 최초의 국가 간 입양 산업을 만들어 냈다. 1950년대와 60년대, 약 4,000명의 그리스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고, 그중 대부분은 미국인의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게다가 정당한 절차였는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었다.

초기에 입양된 아이들은 전쟁 중에 죽은 좌익 반군 세력의 자식들이었다.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 정치인들은 그 아이들이 친 서구적이고, 반공정신을 갖고 자라도록 "재교육"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1950년대 미국의 경제가 호황을 겪고, 핵가족이 교외 지역에 사는 게 미국인들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되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들은 그리스의 고아들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미국 백인들의 눈에 그리스인은 백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의 고아들이 도착하는 모습을 소개하는 당시의 기사 사진 (이미지 출처: Politico)

처음에는 부모가 없는 고아들에게 가정을 주자고 시작된 일이 점점 커지면서, 그리스의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노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완전히 유아 인신매매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근래 들어 밝혀지고 있다. 그리스의 엄마들에게 낳은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고, 아이를 입양하려는 부모들은 내라는 돈만 내면 양부모로 적절한지에 관한 선별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을 공산주의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냉전 시기의 사고방식과 전쟁을 겪은 그리스가 미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던 상황은 그리스에서는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미국에서는 아이가 없는 가정들이 그리스 아이들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테네 카포디스트리안(Kapodistrian)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 크리스토 트리안타필로우(Triantafyllou)는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문맥이 아니면 (미국으로의) 입양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공산주의는 질병으로 받아들여졌고,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야말로 그리스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보내진 아이들은 "그리스가 올바른 편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상징했다."

그 시절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그리스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금도 그리스에 있는 자기 가족들에 대해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복잡한 '대리 입양(proxy adoption)' 절차를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출생증명서에 부모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그리스에 있는 자기 친부모가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고 동의서에 서명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1996년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포함한 보도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들의 나이가 이제 80, 90대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뒤늦게 가족을 찾아 나선 입양아 중에는 부모 중 한 분, 혹은 둘 다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듣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는 미국의 외교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반공에 몰두하면서 평범한 시민—정치와 무관한 사람들,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삶을 잔인하게 파괴했는지 보여준다. 아이 수출은 그리스를 넘어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했고,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그리스의 모델을 고스란히 사용했다.

갈등 지역에서의 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입양은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러시아는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아이들 수천 명을 우크라이나에서 데려갔다. 과거에 미국으로 입양된 그리스 아이들은 미국 시민으로 자라 지금은 60, 70대의 나이가 되었고, 아직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을 찾고 있다.

동생들을 찾는 에피

에프터피 아르지리아디스(Efterpi Argyriadis)는 줄여서 에피(Efi)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기자와 처음 만났을 때 에피가 앉아 있던 소파 위 벽에는 에피의 아버지 엘리아스—데이비드의 외할아버지—사진이 걸려있었다. 사진 속 엘리아스는 법정에 앉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카메라를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에피의 거실에는 그리스 역사와 공산주의 정치에 관한 책들이 가득 꽂힌 나무 책장이 줄지어 있었다. 에피는 84세의 나이에도 경찰이 자기 두 동생을 끌고 간 1951년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오아나(Ioanna)는 6살, 올림피아(Olympia)는 3살이었다.

아버지 엘리아스 아르지리아디스가 체포된 직후에 나온 기사 속 에피의 모습 (이미지 출처: Politico)

그리스는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끔찍한 통치를 겪었다. 그리스의 무장 반군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함께 독일, 이탈리아와 싸웠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그리스의 공산당을 지지했다. 나치가 패해서 물러나자 반군 전사들은 해방된 그리스에서 발언권을 요구했지만, 서구 국가들은 이들이 그리스 정치를 이끄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유럽과 중동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그리스가 공산화되는 건 그들에게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에 내전이 발발하자 서구 국가들은 나치를 상대로 함께 싸웠던 이들에 등을 돌리고, 독재체제에 가까운 우익 정부를 지지하게 된다.

내전에서 승리한 정부군은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까지 모두 잔인하게 박해했다. 그리스 공산당(KKE)는 불법단체로 지정되었고, 당원들은 구속되거나 해외로 망명했고,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도 했다. 당시 그리스의 주 수입원은 미국의 마샬플랜(Marshall Plan)에 따른 해외 원조였기 때문에, 그리스 정치는 미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1944년 그리스의 "빨치산(partisans)"이 체포되는 모습 (이미지 출처: Politico)

좌익인사의 아이들도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좌익과 우익은 서로 상대방이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페레데리카(Ferederica) 여왕은 전국에 고아원을 운영했는데, 명목상으로는 고아원이지만, 여기로 보내진 아이들은 죽거나, 망명했거나, 투옥된 좌익인사의 아이들이었다. 좌익 가정들은 자녀를 소련이 지배하는 철의 장막(Iron Curtain) 너머로 보내 교육받게 했다.

에피의 아버지 엘리아스는 KKE의 고위 당원이었다. 에피의 가족은 아테네 외곽에 위치한 닭 농장에서 살았는데, 집에는 비밀 벙커가 있어서 아버지는 그곳에서 무선으로 동유럽으로 망명한 동지들과 교신했다. 1951년 11월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소련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아내 카테리나 달라(Katerina Dalla)와 함께 투옥된다. 달라는 에피의 어린 두 동생, 이오아나와 올림피아의 엄마였다. (에피는 이들에게 배다른 언니였던 것으로 보인다—옮긴이)

달라는 며칠 후 석방되었는데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바이스(vise, 공작물을 단단하게 조이는 장치)에 머리를 끼우고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집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달라가 자살한 지 3일 만인 1951년 11월 30일, 당시 그리스 아동 보호국 국장이던 리나 트살다리(Lina Tsaldari, 훗날 사회보장부 장관이 된다)는 우익을 대변하는 신문의 1면에 쓴 글에서 "[아르지리아디스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라고 물으면서, "공산주의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도 그리스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1952년 3월 1일, 법정은 엘리아스 아르지리아디스와 다른 두 명의 다른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는 국제적인 문제가 되어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같은 인물들이 나서서 구명운동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세 사람은 눈가리개를 거부한 채 형장에 들어섰다. 당시 재판 소식을 전하는 언론 보도. (이미지 출처: Politico)

당시 13살이던 에피는 두 동생과 남아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집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관들에게 돈을 주고 식료품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고, 동생들에게 할머니가 만들던 미트볼을 요리해주었다. 하지만 12월 7일이 되자 모든 게 바뀌었다. 에피는 그날을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었다고 말한다. 지프차 한 대가 집 앞에 서더니, 네 명의 경찰관이 나왔다. 에피는 소리를 지르며 이들에 저항했지만 경찰관은 결국 이오아나와 올림피아를 데려가 버렸다.

경찰이 데려간 두 아이는 멀지 않은 교외 지역에 있는 양육 가정에 임시로 맡겨졌고, 에피는 삼촌, 고모와 함께 집에 남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에피가 동생들을 데리고 있던 가정을 찾아갔지만 아이들은 없었다. 그곳 사람들은 이오아나와 올림피아가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무리 애써도 에피는 동생들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두 아이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다.

에피는 그날로 두 동생을 찾는 것을 자기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어머니의 비밀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