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들의 행방

에피는 모르고 있었지만, 투철한 반공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그리스의 복지 기관들은 이오아나와 올림피아를 미국에 사는 한 그리스계 부부에게 입양시키려 하고 있었다. 남편 폴 스캉가스(Paul Scangas)는 유제품을 파는 사업가였고, 아내 아테나(Athena)는 가정주부였다. 매사추세츠주 교외 지역에 있는 거대한 저택에 살던 이들 부부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1980년 한 그리스 신문의 기사에는 이오아나와 올림피아의 입양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스캉가스 부부는 두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이들 양부모는 이오아나의 이름을 영어식 조언(Joan)으로 바꿨고, 올림피아는 캐스린(Kathryn)으로 바꿨다. 두 아이는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친척들에 따르면 그 아이들의—그리스에서의—과거는 집안에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이오아나/조언은 자라면서 정신질환을 앓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더더욱 과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괜히 말했다가 충격으로 증세가 더 심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올림피아/캐스린은 2021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정신질환은 앓지 않았다. 하지만 양부모가 노여워할 것이 두려워 친부모의 행방을 찾지 않았다.

입양 당시 양부모와 함께 찍은 이오아나(맨 오른쪽)와 올림피아(가운데)의 사진 (이미지 출처: Politico)

조언의 아들인 데이비드는 아버지에게서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듣고 구글에서 검색해 보자마자 어머니가 입양된 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친척과 관련한 정보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단 미국 쪽 가족들은 아는 게 거의 없거나, 알아도 모르는척 했고, 온라인이나 책에 등장하는 정보도 없었다. 결국 데이비드는 현대 그리스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기 가족사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의 이메일을 받은 사람 중 하나가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그리스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혼다 반 스텐(Gonda Van Steen)이었다. 이때가 2013년이다.

혼다 반 스텐 교수 (이미지 출처: Flickr)

반 스텐 교수는 데이비드의 이메일을 처음 받고 놀랐다. 구글에서 "illegal Greek adoptions(그리스 아이 불법 입양)"를 검색해 보니 1990년대 기사들이 여럿 등장했는데, 그 안에는 과거 입양 단체들이 아이들을 빼앗아 미국으로 보냈는지에 관한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 역사 서적에서는 그와 관련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반 스텐 교수가 확인한 그리스 신문 기사 아카이브에서는 두 동생의 행방을 찾는 에피가 정보를 요구하며 했던 인터뷰를 여럿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인터뷰 기사도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소개되지 않았다.

조사가 깊어지면서 반 스텐은 조언의 입양이 빙산의 일각임을 알게 되었다. 1950년대의 그리스는 전쟁이 남긴 여파로 고생하고 있었던 반면, 미국의 경제적으로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입양 수요는 증가했지만, 국내에서는 이를 충족할 만큼의 아이들이 없었다. 반 스텐은 토끼 굴처럼 이어지는 이 문제를 연구해 그 결과를 2019년에 책으로 출간했다. 'Adoption, Memory and Cold War Greece: Kid pro quo? (입양과 기억, 냉전시기의 그리스: 아이 거래?)'

그리스 아이들의 해외 입양 문제를 다룬 혼다 반 스텐의 책 (이미지 출처: The Pappas Post, Amazon)

반 스텐이 알게 된 바에 따르면 프레데리카 여왕의 "재교육"을 위해 운영하던 고아원들은 가난한 미혼모가 맡긴 아이들로 가득했고, 운영비를 감당하기에 벅찬 상황이었다. 이때 외국의 입양단체들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프레데리카에게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다. 당시 21세기 폭스 영화사 회장이었던 그리스계 미국인 스파이로스 스쿠라스(Spyros P. Skouras)다. 프레데리카와 스쿠라스는 힘을 합쳐 미국 전역에서 "여왕 고아 기금(The Queen's Orphans Fund)"을 조성하는 화려한 이벤트를 개최했고, '라이프'와 '타임' 같은 잡지가 이와 관련한 호의적인 기사를 게재하도록 힘썼다. 당시 기사를 보면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나 제인 러셀(Jane Russell) 같은 헐리우드 스타들이 그리스 고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당시 신문에서는 고아들이 미국에 도착하는 기사를 쉽게 볼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구출된 아이들이라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러셀은 국제 입양 세계 기금(World Adoption International Fund)을 창립했고, 헐리우드에서 유명인들이 아이를 입앙하는 유행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Newspapers.com, BBC)

이런 입양은 대부분 AHEPA(American Hellenic Educational Progressive Association)라는 단체에서 주선했다. AHEPA 원래 그리스 이민자들을 "미국화(Americanize)"하는 것을 목표로 조직된 단체로, '대리 입양(proxy adoption)' 모델을 처음 만들어 낸 곳이다. 대리 입양이란, 부모가 직접 가는 대신 대리인을 해외에 보내 아이를 데려오는 것으로, 이는 양부모가 아이를 보지도 않고 입양했고, 부모가 복지단체의 적부심사를 거치지도 않았음을 의미했다.

냉전 시대의 정치는 이민법을 느슨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난민구호법(Refuge Relief Act)를 통해 공산주의에 반대하거나 공산주의의 피해를 입은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쉽게 만들었다. 이는 국제 입양을 가속화했고, 그리스 입양아를 위한 비자는 이 법을 근거로 주어졌다.

같은 해, 그리스와 미국은 미국이 그리스에 투자와 안보를 강화하는 상호 조약을 체결한다. 경제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게 된 그리스는 입양아를 꾸준히 미국에 공급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스의 정치인들은 입양아들이 훌륭한 외교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초기만 해도 AHEPA는 그리스 입양아들이 스캉가스 부부처럼 풍족하고 보수적인 그리스계 미국인 가정에 보내지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이런 방침은 곧 바뀌게 된다. 아이를 간절하게 원하는 미국 가정에 입양아를 보내면 훨씬 큰돈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47년 당시 그리스의 고아원 교실 모습 (이미지 출처: Politico)

마리아의 사연

마리아 파파도폴루(Maria Papadopolou)가 자기와 세 명의 남동생이 그리스에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건 10살 때였다. 마리아를 입양한 부부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사는 신앙심 깊은 몰몬교 부부였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아내의 오빠에게 그리스에서 입양할 만한 아이들을 물색해달라고 부탁했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교수였던 오빠는 그리스를 자주 여행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고아원에 있던 한 살짜리 마리아는 그렇게 발견되게 되었다.

양부모는 마리아에게 생모가 원하지 않아서 고아원에 맡겨진 거라고 했고, 그 생모는 교육받지 못한 무책임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그리스에 남아있었다면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입양된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몰몬교 문화에서 자라난 어린 시절이 "지옥" 같았다고 말한다. 양부모는 전형적인 A타입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여러 아이를 입양할 경우 발생할 문제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마리아는 20살에 집을 나왔다. 양어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며 "아무런 도움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마리아는 기자에게 양부모의 이름이 아닌, '파파도폴루'라는 자기의 그리스 이름으로 적어달라고 했다.)

마리아는 성장해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자기를 낳은 부모에 대한 궁금증을 지우기 힘들었다. 자기 얼굴은 누구를 닮은 것인지 궁금했다. 입양인의 문제를 다룬 책 'The Best Possible Immigrants: International Adoption and the American Family (최상의 이민자들: 국제 입양과 미국 가정)'의 저자 레이첼 윈슬로우(Rachel Winslow)에 따르면 그리스 입양아들은 백인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입양을 바라는 부부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북유럽계 백인 후손이 압도적인 유타주에서 그리스계 마리아는 금방 눈에 띄었다. 마리아를 본 사람들은 마리아가 무슨 인종인지 궁금해했고, 심지어 스페인어로 말을 걸기도 했다.

마리아의 큰 아이인 딸 알렉시스(Alexis)는 33살. 그는 엄마의 그리스 가족을 찾기로 결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엄마의 삶은 아주 힘들었어요. 저는 엄마가 당연히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회복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알렉시스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미국에 있는 그리스 영사관에도 연락해 봤지만 도무지 정보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2021년 어느 날, 반 스텐 교수의 책을 언급한 기사를 접하고,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반 스텐은 알렉시스가 보여준 마리아의 입양 문서를 열자마자 생모의 이름을 발견했다. 문서에 똑똑히 적혀있었지만, 마리아나 아이들 누구도 그리스어를 읽거나 말할 줄 몰랐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을 확인한 지 닷새 만에 페이스북에서 마리아의 그리스 가족들을 찾을 수 있었다.


마리아가 스탠포드 교수였던 삼촌(마리아를 아테네 고아원에서 발견한 양어머니의 오빠)이 출간하지 않고 보관 중이던 회고록 원고를 살피면서 그리스에 있는 생모 가족과 나눈 이메일과 인터뷰를 대조했더니, 자기가 듣고 자란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생모는 20대 초, 그가 일하던 농장의 주인에게 강간당해 마리아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가 살던 보수적인 농촌 사회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임신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생모는 수도 아테네로 떠나 그곳에서 병원 청소일을 하며 살았다. 일하는 동안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고아원에 맡겼지만 매일 아기를 보러 들렀다. 중요한 건, 마리아의 생모는 고아원측에 아기를 입양시키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1948년 그리스의 난민촌 모습 (이미지 출처: Politico)

마리아의 (양)삼촌은 1953년, 아테네의 고아원을 방문해서 마리아를 보게 되었다. 마리아는 그가 보기에 "가장 건강한 축에 드는" 아기였다고 했다. 생모의 동의만 받으면 데려가도 좋다는 말을 들은 삼촌은 변호사와 함께 생모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양육 동의서에 서명을 하라고 압박했다. 아이가 미국 가정에 입양되면 여기에서는 불가능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삼촌의 회고록에는 아기 엄마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생모의 동의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그리스 아기가 몰몬교 가정에 입양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그리스 아이들은 그리스계 미국인 가정에 입양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삼촌은 당시 미국 대사와 친구였고, 미국 대사는 그리스 정교회의 지도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그런 끈을 동원해 입양 절차를 마무리했다.

"저는 제 엄마가 저를 원하지 않았다고 듣고 자랐어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마리아의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아직 살아있었다.  


'어머니의 비밀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