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정치적인 입양은 1955년경에 끝났고, 그 이후부터 진행된 해외 입양은 대부분 경제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었다. 혼다 반 스텐 교수가 대조한 미국의 비자 기록에 따르면 1948년부터 1962년 사이에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의 숫자는 3,116명으로, 외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의 16%에 달했다. 반 스텐은 "그리스 아이들은 마셜 플랜(미국의 유럽 원조 계획)이 시작한 물자와 서비스 교환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 아이들의 미국 입양을 주선하던 단체 AHEPA은 그리스계 부모를 선호하던 방침을 바꿔 비 그리스계 부부를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입양 한 건당 2,800달러, 지금 가치로 3만 달러(약 4,100만 원)의 비용을 청구했다.

당시 미국으로 입양되어 오던 아이들은 "고아(orphan)"나 "버려진 아이(foundling)"로 분류되었다. "버려진 아이"에 관해 가장 전형적인 이야기는 고아원 앞에 놓인 바구니 안에 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류되어 미국에 도착한 아이들은 태어난 그리스에서의 기록이 없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정말로 버려진 아이들도 있겠지만, 반 스텐 교수는 그런 아이 중 상당수가 마리아의 생모처럼 강제나 회유에 의해 생모가 포기하게 된 아이들일 것으로 본다.

AHEPA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한 불만은 1950년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이 단체가 양부모에 대한 자격심사를 하지 않고, 아동복지 전문가와 일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959년, 그리스의 좌파 신문인 엘레프테리아(Eleftheria)는 세 편에 걸친 탐사보도를 통해 아동 거래와 대리인을 통한 입양의 위험을 폭로했다.

그 기사가 나온 후 그리스 여론이 들끓었고, AHEPA 회장이자 뉴욕의 유명한 치안판사 스티븐 스코파스(Stephen S. Scopas)가 아동 인신매매 혐의로 체포되었다. 1959년 뉴욕타임즈를 보면 "스코파스, 아기 매매로 체포"라는 기사가 나온다. 스코파스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리 입양이 그리스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뉴욕 법정의 관할 구역을 벗어났다는 이유였다.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무렵, 그리스–미국 입양은 일 년에 1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1950, 60년대의 그리스 아이들 입양은 미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AHEPA 회장이 인신매매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뉴욕타임즈 보도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마리아의 생모 찾기

2021년 5월 마리아 파파도폴루와 딸 알렉시스, 아들 매디슨은 아테네에 도착했다. 긴장한 마음으로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 앞에 택시가 한 대 도착했고, 나이 많은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150cm 정도 되는 작은 키의 이 할머니는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붉은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고, 귀에도 같은 모양의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한 마리아와 자녀들 (이미지 출처: Politico)

걸어오는 노인의 눈은 마리아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엄마와 자기가 얼마나 닮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리아는 항상 자기가 작고 단단한 (구식) 냉장고를 닮았다고 농담을 했는데, 처음 보는 생모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마리아의 생모가 낳은 다른 아이들—마리아와 아버지가 다른 동생들—도 성인이 되어 각자 자식들을 대동하고 함께 나타났다.  

마리아를 향해 걸어 오는 노인은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팔을 벌려 마리아를 붙잡고 절대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 만난 가족들이 함께 가까운 식당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마리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가족들은 메제(meze)를 먹으면서 그리스어와 영어가 뒤섞인 대화를 나눴다. 마리아의 그리스인 조카가 통역을 맡았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평생 마리아를 찾고 싶었지만 찾을 방법을 몰랐다면서, 마리아를 감쌌던 애기 담요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마리아는 언젠가 자기가 태어난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2년 후인 2023년, 자기의 그리스 동생의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확인해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어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더라면..."

마리아를 붙들고 걸어가는 마리아의 어머니 (이미지 출처: Politico)

에피의 동생 찾기

에피는 두 동생을 경찰에 빼앗긴 후 25년을 이오아나와 올림피아의 생사도 알지 못하고 살았다. 관계 당국에 동생들의 행방을 물어봐도 정보를 주지 않았고, 요청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에피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리스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군사독재 아래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1980년, 과거에 처형당한 공산주의자들을 다룬 영화 '카네이션을 든 남자(The Man with the Carnation)'가 극장에 개봉하게 되면서 에피는 언론의 관심을 끌 기회라고 판단하고 좌익 성향의 매체와 인터뷰를 한다. 이 신문은 사설을 통해 좌익 인사의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에피는 한 기자와 힘을 합쳐 관료들을 압박했고, 결국 한 장관이 에피에게 그리스 정부 내에서 어떤 부처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귀띔해 주었다. 기자와 에피는 해당 관청에 찾아가서 "입양"이라고 적힌 팻말을 보게 되었고, 기자는 문서실로 직행했다. 한참을 뒤지던 기자는 손에 파일을 들고 에피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찾았어요."

파일 속에 있는 서류는 에피가 알고 싶었던 내용을 모두 담고 있었다. 이오니아와 올림피아가 어떻게 입양을 가게 되었는지는 물론이고 양부모의 이름도 적혀있었다. 에피는 미국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와 연락해서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이오니아의 주소를 찾아냈다. 그렇게 해서 에피는 1980, 90년대에 조언에게 편지를 여러 번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대서양의 반대쪽에서 편지를 받은 조언의 남편—데이비드의 아버지—이 에피가 보낸 편지를 가로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노력

데이비드는 반 스텐 교수에게서 이모인 에피가 살아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직접 만나기 위해 2014년 여름, 아테네로 떠났다. 에피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자기를 기다리는 에피를 봤다. 에피의 등 뒤로 집 안에서 밝은 빛이 후광처럼 에피를 감싸고 있었다. 데이비드를 본 에피는 그를 꽉 껴안고 몇 분 동안 놓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간 데이비드는 거실 벽에서 외할아버지 엘리아스의 사진을 발견했다. 깎아 만든 듯한 코와 둥근 뺨, 그리고 엄숙한 표정이 낯익게 느껴졌다. '엄마와 똑같은 모습이네.'

에피가 앉은 소파 옆 벽에 데이비드의 외할아버지 엘리아스의 사진이 보인다. (이미지 출처: Politico)

그리스에 머무는 며칠 동안 데이비드는 진한 그리스 커피를 마시며 에피와 에피의 남편, 딸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머니 이오니아/조언의 동생이자 데이비드의 이모인 올림피아/캐스린도 몇 달 후 그리스를 방문하기로 했다. 올림피아는 가족이 흩어지기 전, 에피가 만들어 주던 미트볼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오니아/조언이 에피와 재회하는 것에 반대하던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설득 끝에 전화 통화에 찬성했다. 미국과 전화가 연결되자 데이비드는 에피의 가족들과 함께 침대 한쪽에 앉아서 그리스어로 이야기하는 에피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통화는 약 3분 정도 지속되었는데, 조언은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이야기했다. 데이비드는 어머니가 그리스어를 쓸 수 있는 줄 몰랐다. 그리스어로 얘기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피가 통화를 마치자 가족들이 달려가 에피를 안아 주었고, 거실로 나가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 데이비드는 아버지께 메시지를 보내어 어머니는 방금 나눈 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느냐고 물었다. 아버지에게서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네 엄마는 방금 누구랑 이야기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데이비드에게 그해 여름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고, 심각한 기억 손상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데이비드는 기쁨에 찬 그리스 가족들에게 방금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몰라 괴로웠다. 이들이 느끼고 있는 행복감을 터뜨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생각을 바꿨다. "이 모든 고통이 결국 사람들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죠. 저까지 그런 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식구들이 모인 거실로 가서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 순간, 들떳던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언의 치매는 데이비드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급격하게 나빠졌고, 조언은 2020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많은 조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그리스의 가족들과 재회까지 했지만, 데이비드는 여전히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무리 몰랐던 사실들을 찾아내고, 잊혀진 사람들을 만나도 서로 떨어져 지낸 세월을 다시 채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메울 수 없는 틈이 반드시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빈틈을 둘러싼 액자를 최대한 아름답게 가꾸는 것뿐이라는 게 제가 얻은 교훈입니다." 🦦

이오니아/조언의 어린 시절 모습 (이미지 출처: Politi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