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통과하는 일
• 댓글 63개 보기지금은 직접 본 사람을 찾기 어렵지만, 과거 미국에서는 '호보 기호'(hobo signs)라는 게 있었다. 호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 존재했던 유랑 노동자를 말한다. 특히 대공황 직후에 급격하게 늘었던 이 사람들은 집이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현대의 홈리스, 노숙인과 혼동하기도 하지만,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녔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어느 농장에서 일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에 가서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머무르며 식사와 숙소를 제공받고, 일감이 떨어지면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식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마을에 이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호보들로서는 어느 마을, 어느 집에서 호보를 적대시하고, 어떤 곳에서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호보 기호'는 그런 필요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으로, 특정 지역을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남겨 놓는 표식이었다.

여기에 가면 다양한 호보 기호와 그 의미를 볼 수 있는데, "이 집에 사나운 개가 있다," "여기에 머무르는 게 좋다," "이 집은 피하라," "공짜로 전화를 쓸 수 있다," "주인이 총을 가진 집이다" 같은 다양한 메시지를 일반 주민들은 알아볼 수 없는, 자기들만의 기호로 남겨두는 거다. 알아볼 수 있다면 지울 테니 암호를 사용한 셈이다.
그걸 적는다고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닌데, 왜 애써 그런 표시를 남겼을까? '인간은 왜 기록하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흥미로운 문화였던 건 분명하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이유는 호보들은 비록 서로를 몰라도 같은 처지에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는 거다. "노인들이 자신이 앉을 일 없는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를 심을 때, 그 사회는 위대해진다"는 말처럼, 앞서 지나간 사람이 남긴 기호로 도움을 받은 사람이 뒤에 올 사람을 위해 기호를 남길 때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한국 스타트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퍼블리(Publy)를 창업한 박소령 대표가 자신이 경험을 솔직하게 담은 책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출간하는 것을 보고 나는 '한국의 스타트업씬이 성숙기에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 개인이나 사회가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건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고, 성숙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가 퍼블리를 세우고 10년 동안 이끌어 온 CEO이기 이전에 글솜씨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을 제법 알고 있지만,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거의 잔인할 만큼 자신에게 솔직한 실패담을 책으로 쓸 사람은 쉽게 떠 오르지 않는다.

나는 현대 세계에서 성공한 기업가가 영웅(hero)처럼 묘사되는 건 자본주의가 승리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각자 다양한 동기에서 일을 시작했겠지만, 기업가도 궁극적으로 자기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한 사람일 뿐이다. 다만 성공한 기업가들이 많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그들을 영웅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윤색해서 자랑하고, 일부는 책으로 출간하기도 한다.
하지만 1989년에 나와서 서점가를 휩쓴 김우중 회장의 책,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에 나온 얘기만 읽었다면, 그렇게 위대한 기업이 왜 10년 후에 부도가 나고 그룹 해체를 겪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김우중은 열심히 일했겠지만, 그는 IMF 구제금융 사태 이전 한국의 고도 성장기에 올라탄 많은 기업인 중 하나다. 그가 진정으로 후세에 교훈을 남기고자 했다면, 그는 1999년에 책을 썼어야 했다.
박소령 대표는 김우중이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박소령 대표가 퍼블리를 창업하고 전력질주하던 10년 전, 나는 그와 비슷한 "유니버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던 뉴미디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는 퍼블리의 초기 투자자가 세운 회사였고, 둘 다 빠르게 성장하는 디지털 미디어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한국의 미디어가 여전히 종이 신문과 지상파, 케이블 TV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뉴미디어에서 희망을 본 사람들은 업계에서 서로 잘 알거나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였다. (책 뒷부분에 나오지만, 퍼블리의 멤버십 서비스를 인수한 뉴닉은 우리가 초기 투자한 스타트업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당시 퍼블리와 박소령 대표는 미디어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덩치는 크지만 디지털 진출을 두려워하던 대형 미디어 기업들은 자기들이 원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일을 업계 경험도 없는 사람이 거침없이 시도하는 걸 감탄과 질투가 섞인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흔히 "레거시 미디어"라고 부르는 전통 미디어 사람들은 대화 중에 박소령 대표의 이야기가 나오면 "대단하다"는 말로 시작하지만, 언제나 "그게 될지..."라는 뉘앙스로 말을 끝냈다.

이제 퍼블리는 사업부를 모두 매각했고, 창업자가 퇴사했으니 그들의 '우려'가 적중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퍼블리를 비롯해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미디어 스타트업씬에서 뛰었던 기업들은 많은 경험을 축적해 남겼고, 기존의 미디어 기업들은 그걸 지켜보면서 경험을—대개는 인력을 통해—흡수할 수 있었다.
어차피 실패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스타트업이 사라질 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안 되는 게 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열 명이 모인 미디어 스타트업이 사업을 접는 것과 직원 1천 명이 넘는 방송사가 사업을 접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큰 기업이 쉽게 변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대대적인 변신을 하는 대신 작은 사내 벤처를 통해 변화를 시도해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실패를 통과하는 일'의 초점은 다르다. 거의 전적으로 스타트업을 창업하려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이 책을 읽고 사업에 도전해 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업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가 이 책에 나오는 얘기에 겁을 먹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사업은, 특히 스타트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자의 이야기에 겁을 먹는다면 하지 않는 게 좋다. 책의 앞부분에 소개되지만,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만약 다시 서른 살로 돌아간다면 회사를 시작했겠느냐"는 질문에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백만 배는 더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엔비디아는 훌륭한 기업이고, 젠슨 황은 뛰어난 경영자이지만, 엔비디아의 성공은 챗GPT의 등장과 함께 바뀐 시장의 덕을 크게 봤다.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읽으면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은 "경영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을 이길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소령 대표는 시장을 잘못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퍼블리 내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의 경쟁자가 없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만큼 돈이 안 되니까 아무도 안 들어오는 거야"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눈을 떼기 힘든 이유는 퍼블리가 그렇게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통과하는 일'은 스토리의 마지막을 먼저 보여주는 영화처럼, 박소령 대표가 사직서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는 뛰어난 글솜씨를 갖고 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자기가 배운 것이 뭔지 빼놓지 않고 이렇게 쓴다. "대표 이사가 퇴사할 때는 사인이 아니라 개인인감을 찍어야 하고, 개인 인감증명서까지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인트로가 암시하듯,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배운 교훈으로 가득하다. 그 교훈을 남기는 게 이 책을 쓴 이유이기 때문이다.
창업하게 된 계기와 과정은 2장(Scene #2)에 처음 등장하고, 그 후에는 스타트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상황과 고민점들을 주제별로 묶어 전개한다. 공동창업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저자는 '공동창업자'보다 '동업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원배분이 왜 중요하고, 왜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CEO가 여기에 실패하는지,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경험인지 등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생생하냐면, 5년, 7년, 10년 전에 나눈 대화들을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적혀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일기를 꼼꼼하게 쓰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너무나 힘들고 치열해서 (마치 PTSD처럼) 기억에 생생한 게 아닐까?

저자의 기억력만큼 인상적인 것은 솔직함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퍼블리에 관해 가졌던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그중에는 퍼블리가 왜 그런—내 눈에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궁금함도 있었다. 실행력이 뛰어난 박소령 대표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뛰기보다 뛰면서 생각하는 스타일에 가깝고, 그 장점은 때로는 그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퍼블리가 커리어리 서비스를 "블리츠스케일링"한 것이 그런 예다.) 하지만 박소령 대표는 그런 실수를 모두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물론 솔직함에도 분명한 한계는 있다. 회사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고, 회사의 이야기는 곧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이야기하다가도 동료에 관해 말할 때는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지거나 장점 위주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 보여주는 교훈이다. 지분으로 얽힌 비즈니스 파트너와 헤어지는 것은 이혼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스타트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얼마든지 있다고 믿는다. 제2, 제3의 박소령은 나올 것이고, 그들은 선배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멀리 갈 거다. 🦦
이 책을 출간한 북스톤 출판사에서 오터레터 구독자들에게 10권을 선물합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수요일(12일) 오전에 추첨해 발표하겠습니다. 이메일을 꼭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