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여신 ②
• 댓글 1개 보기프라사드가 계획해 온 영어의 여신상과 신전을 막은 사람은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선임 장관 쿠마리 마야와티였다. 마야와티는 달리트 출신으로, 그 지역 달리트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였고, 그런 이유로 마야와티의 동상들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인도의 28개 주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우타르 프라데시주(1억 9천만 명)에서 선임 장관(Chief Minister)을 여성, 그것도 달리트 출신 여성이 여러 차례 맡았다는 건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마야와티의 인기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인도의 주지사는 한국의 도지사나, 미국의 주지사와 달리 대통령이 임명하는 명예직에 불과하기 때문에, 선출직인 선임 장관이 실질적인 행정 권력을 갖고 있다.)
인기가 있었으니 가능했겠지만, 마야와티 본인이 자기의 동상—대개는 그의 상징과 같은 핸드백을 든 동상—이 곳곳에 세워지는 걸 좋아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마야와티는 '달리트의 여신'은 자기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랬던 마야와티가 2012년에 퇴임하자 프라사드는 영어의 여신상과 신전 건축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5년 후인 2017년에는 우타르 프라데시주에서는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 정당이자 현재 집권당인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 BJP) 소속의 승려 요기 아디티야나트가 당선되면서 프라사드의 꿈은 더욱 멀어졌다. 인도인민당은 영어에서 멀어지려 하기 때문이다.
인도인민당을 이끌며 2014년 이후로 인도 총리를 연임하고 있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구자라티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공식적으로는 힌두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의 어린 시절인 1950, 60년대 인도에서는 힌두어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통합 노력이 시작되어 학생들에게 초중고등학교에서 힌두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는 힌두어를 잘 구사한다.
사실 인도가 독립한 후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를 비롯해 대부분의 총리가 힌두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그들도 힌두어로 공식적인 소통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부터 영어는 고학력층, 특히 법이나 정부와 관련된 기관에서 일하는 엘리트의 언어였으며, 인도 총리 대부분은 영어로 교육받았기에 공식 석상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게 편했다. 게다가 힌두어를 사용하지 않는 인도의 동부와 남부 지역 사람들은 총리가 힌두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는 교육받은 인도인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제1외국어로서 안전한 선택이었다.

기차역에서 차(茶)를 파는 상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모디가 속한 카스트는 인도에서 OBC(Other Backward Classes), 즉 '기타 사회적, 교육적으로 열악한 계층'으로 분류된다. (OBC는 우리에게 익숙한 네 개의 카스트 중에서는 가장 하위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네루나 인디라 간디 등 많은 총리들이 상류 카스트인 브라흐민 출신인 것과 대비되지만, 그렇다고 모디가 OBC 출신의 첫 총리는 아니다.
모디 총리가 다른 총리와 크게 다른 점은 그가 비종교적(secular)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추구하던 과거 정권들과 달리 인도를 힌두교 국가로 설정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고, 그 과정에서 힌두어를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기관의 웹사이트 주소를 힌두어로 만드는 것도 그 일환이다. 예: गृहमंत्रालय.सरकार.भारत) 그가 생각하는 영어는 제국주의의 유산인 동시에, 독립 후에는 민중과 유리된 엘리트들의 언어인 반면, 힌두어는 인도의 소중한 유산인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된 진짜 인도 민중의 언어다.
문제는 힌두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전체의 절반도 안 되는 43%에 불과하다는 사실. 타밀어를 사용하는 인도의 남쪽 끝에 있는 타밀 나두주에서는 힌두어 중심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고, 이런 정책이 다양한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몰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이건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동 완성 ④ 쿼티 효과'에서 다룬 것처럼, 중국에는 북경어와 광둥어 외에도 많은 방언이 존재하고, 이들은 한국의 사투리 이상의 큰 차이를 갖고 있어서 문자(한자)를 사용하지 않고는 대화가 불가능한 수준의, 거의 다른 언어다. 중국 정부는 이렇게 다양한 말(구어)을 북경어 하나로 통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지난 3월 1일 영어를 미국의 공식 언어로 만드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모두 국가 통합이라는 이유로 문화적 다양성을 희생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언어학자인 만비어 싱 교수는 힌두어를 '인도의 언어'로 만들려는 모디 총리와 달리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영어 사용을 장려하는 프라사드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완전히 반대이지만, 영어가 가진 위력에 대해서만큼은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영어는 마치 힌두교의 트리무르티(브라흐마, 비슈누, 시바가 통합되어 일체화된 브라흐만의 신)처럼 창조와 보존, 파괴를 할 수 있는 힘을 모두 갖고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영어가 "인지적 헤게모니"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그 힘을 두려워해서 억누르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 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이용하려는 것이다.
영국에 거주하는 인도 작가 사만스 수브라마니안(Samanth Subramanian)은 "Should a Country Speak a Single Language?"(한 국가에서는 단일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글에서 "인도에서는 2마일(3km)을 가면 물맛이 변하고, 8마일(12km)을 가면 언어가 변한다"라는 인도의 속담을 소개하면서, 자기 어머니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다섯 개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인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언어는 22개이지만, 센서스를 보면 1,300~1,600개의 언어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모두 힌디어를 익히게 되면 과연 모디의 바람처럼 인도의 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싱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 따르면 영어에—혹은 언어에—사고방식을 바꾸는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힘이 사회를 통합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영국은 수 세기 동안 통치의 편의를 위해 인도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강요했지만, 결과적으로 인도인들이 영국화 된 게 아니라, 영어가 인도화 되었다.
싱이 예로 든 인도인들이 사용하는 영어 표현을 보자: “Kindly do the needful and prepone our meeting to tomorrow itself, na?”를 일반적인 영미권 영어로 바꾸면 그냥 "Could you reschedule our meeting to tomorrow?" (우리 미팅을 내일로 재조정할/앞당길 수 있을까요?)이다. Kindly do the needful은 Could you do me a favor? 정도에 해당하고, prepone은 인도인들이 만들어낸 postpone의 반대말이다. 이런 현상은 영어가 많이 사용되는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힌두어를 강요해서 인도의 모든 지역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고 해도 그들이 모두 "같은 힌두어"를 쓴다고 할 수 있을까?
언어는 권력과 분리되기 힘들다. 모디가 힌두어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통합은 겉으로는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강조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지역 언어와 문화의 침묵이 전제된다. 반면 프라사드가 믿는 영어는 억눌린 계층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와 엘리트주의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다. 싱은 언어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만큼, 사람의 생각이 언어를 바꾼다고 본다. 언어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 언중(言衆)의 사고 변화를 따른다. 그 변화는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이지, 일방적인 영향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인도나 중국, 미국처럼 다양한 민족이 섞인 거대한 나라들은 언어를 통해 나라를 통합할 수 있다는 꿈을 꾸는 것 같다. 하나의 언어를 쓰는 것이 과연 진정한 통합인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사회가 잘 통합되는지, 그런 사회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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