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놓친 기업들을 위한 변명
• 댓글 남기기이 글의 조금 다른 버전이 '세상은 이변의 연속... 어리석은 게 아니라 운이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세계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 두 개의 운영체제(OS)가 양분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스마트폰'을 처음 만들어낸 애플은 미국 시장에서 60%를 장악하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는 안드로이드가 87% 가깝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늦게 출발한 안드로이드가 더 많은 시장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제조사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탑재할 수 있도록 라이선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고, 삼성전자는 이를 사용해서 세계에서 애플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스마트폰의 강자가 되었다.
물론 삼성이 구글에게서 운영체제를 빌려 사용하는 대신 자신만의 운영체제를 갖고 있다면 훨씬 더 유리한 고지에서 사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하기 전에 삼성이 먼저 인수할 수 있었다. 2004년, 안드로이드 체제를 만들고 있던 앤디 루빈이 팀원 몇 명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삼성 측과 미팅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삼성의 임원이 "고작 여섯 명으로 그걸 만들겠다고 하느냐"며 웃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루빈은 바로 2주 후에 구글과 미팅을 가졌고, 구글은 50만 달러라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적은) 액수에 안드로이드팀을 사버렸다. 여기까지가 삼성이 안드로이드를 놓친 이야기다.
하지만 삼성이 그 때 안드로이드를 샀으면 지금의 구글과 같은 세계적인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폰을 닮은 운영체제가 아니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해서 몇 년 동안 열심히 개발한 후에 2007년에 선보인 첫 안드로이드폰은 당시 나오던 일반적인 스마트폰들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다. 반면, 같은 해에 애플이 내놓은 첫 아이폰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스마트폰이었다.
아이폰을 보고 충격을 받은 구글은 앤디 루빈의 안드로이드 계획을 포기하고 아이폰을 닮은 지금의 모양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삼성이 제 발로 걸어들어온 안드로이드를 차버렸다"고 말하기에는 2004년의 안드로이드는 너무나 달랐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안드로이드는 사실상 구글이 새롭게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보는 게 맞다.
2004년 서울에서 열린 미팅과 비슷한 미팅이 1962년 1월 1일에 오전 10시에 런던에서도 있었다. 장소는 세계적인 음반사인 데카(Decca) 레코드의 스튜디오. 당시 영국의 리버풀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네 명의 젊은 뮤지션들과 계약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녹음 세션이었다. 그룹 이름은 비틀즈. 보통 이 경우 다섯 곡 미만을 녹음하지만 이 날 비틀즈는 점심식사 후에도 녹음을 계속해서 무려 15곡을 녹음했다.
한 달 후 데카 레코드는 비틀즈와 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에 따르면 "기타(를 치는) 그룹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있고" "비틀즈는 쇼 비즈니스에서 미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데카로 부터 퇴짜를 맞은 비틀즈는 3개월 후에 EMI 레코드와 계약을 했고, 곧이어 비틀즈는 전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으며, 데카 레코드는 "비틀즈를 못 알아본 음반사"라는 조롱를 받아야 했다. 비틀즈는 그 해 6월 런던의 EMI 스튜디오에서 첫 녹음을 했다. 훗날 비틀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진은 바로 그 스튜디오가 있는 애비로드(Abbey Road)에서 찍은 거다.
데카 레코드는 왜 비틀즈와 계약을 하지 않았을까? 그 날 비틀즈가 부른 곡들을 들어보면 비틀즈의 잠재력을 확인하기 힘들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평가다. 훗날 잘 알려진 비틀즈 특유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다. 게다가 EMI와의 계약도 거의 불발되었다가 맺어졌다.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틴이 애를 썼지만 프로듀서들은 일제히 계약에 반대했고, 결국 EMI의 하위 브랜드인 팔로폰(Parlophone)이 비틀즈와 계약을 한 것이다.
혹자는 데카 레코드가 "기타 그룹은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고 말한 것도 사실은 비틀즈가 실력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걸 피하기 위해 가져온 핑계였을 뿐이라고 한다. 비틀즈가 실력이 없었다고?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팝송의 역사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그룹이라면 당시 인기였던 가수들과는 다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새로운 음악이 성공할 거라 믿고 계약을 하는 건 (음악계에서 아주 드문 일은 아니지만) 리스크가 큰 베팅일 수 밖에 없다.
1984년에는 스포츠용품을 만드는 아디다스가 데카 레코드와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그 해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세번째로 지명된 신인 선수가 대학선수 시절 즐겨신었던 아디다스와 계약을 원하는데, 키(198cm)가 작은 게 걸렸던 거다. 결국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그 선수는 아디다스 측에 "정말로 하지 않겠느냐"며 재차 확인했고, 아디다스는 그 말을 듣고도 그 선수와 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 선수는 NBA의 전설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이 아디다스에게 다시 물었을 때 그는 이미 나이키에서 오퍼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디다스에게 한 번 더 물어봤을 만큼 조던은 아디다스 브랜드를 사랑했다.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에서도 대학선수였던 조던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디다스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나이키가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에서 군림하게 된 시대였고, 그 원동력은 마이클 조던을 동원한 '에어 조던' 마케팅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만큼 조던은 지금의 나이키가 있게 한 중요한 요소다. 이제는 스포츠 스타를 동원한 마케팅이 자리를 잡았지만 현재의 마케팅 방법론은 사실상 나이키의 조던 마케팅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디다스는 왜 그렇게 계약을 간절하게 원하는 조던에게 '노'라는 답을 하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포기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그들에게는 조던의 키가 큰 문제였다. 조던이 세번째로 드래프트 된 그 해에 첫번째 드래프트는 213cm의 장신 센터 하킴 올라주원이었고, 두번째였던 샘 보위는 그보다 더 큰 216cm였다. 신인들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의 미국 프로농구는 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 자바 처럼 7피트(213cm)가 넘는 장신 선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마이클 조던 정도나 그 이하의 키를 가진 선수들 중에서 MVP가 된 선수는 단 두 명 밖에 없었을 만큼 키는 곧 실력을 의미하던 시절이었고, 당시 스타들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했던 래리 버드나 매직 존슨도 마이클 조던 보다는 큰 선수들이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스폰서 계약을 해야 하는 임원의 입장에서 드래프트 3위의 키가 작은 선수와 계약하기 힘들었던 건 당연하다. 판단은 데이터를 통해 해야 하고, 데이터에 따르면 조던은 큰 성공을 할 선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든 이변은 일어나고, 이변이 일어날 때 관중은 환호한다. 아디다스가 어리석었던 게 아니라 나이키가 운이 좋았던 거다.
이 기업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돌아간다면 다른 결정을 내렸겠지만, 지금 당장 비슷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 아마 또 다시 기회를 놓칠 거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점쟁이가 아닌 한 누구나 현재 주어진 정보에 기반해서 거기에 충실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꾸준히 신중한 결정을 내리다보면 때로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있지만 그건 운이다. 큰 기업은 운에 의존할 수 없다. 반면 그렇게 원칙과 정보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다보면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다. 삼성, 데카, 아디다스, 모두 건재하다는 게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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