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유령
• 댓글 남기기샌프란시스코만(San Francisco Bay) 남쪽에 위치한 산호세와 북쪽의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101번 국도(U.S. 101)는 실리콘밸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표적인 도로다. 산호세에서 출발해 이 도로를 타고 구글이 위치한 마운틴뷰로 들어서는 순간 시선을 사로잡는 구조물이 있다. 모펫필드(Moffett Field)라 불리는 활주로 옆에 서 있는 거대한 격납고다.
사진만으로 상상했다가 실물을 보면 깜짝 놀라면서 인지부조화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그렇다. 가보면 이런 사진만으로 상상하던 것과 실제 크기의 차이에 놀라 적응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모펫필드의 격납고가 그렇다. 그보다 높은 빌딩은 본 적이 있어도 그보다 더 거대한 빌딩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과장이 아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큰 구조물 중 하나다.
활주로 옆에 있는 격납고이니 비행기를 넣기 위해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기를 넣는다고 해도 이 정도 크기의 격납고는 필요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큰 걸 만들었을까? 그 힌트는 이 구조물이 만들어진 시점에 있다. 이 격납고는 점보 제트기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프로펠러 비행기도 자그마하던 1930년대에 만들어졌고, 그 당시 하늘을 제압하던 건 비행선이었다. 이 격납고는 미해군이 운용하던 비행선, USS 메이컨(Macon)과 USS 애크런(Akron)을 위해 만들어졌다. 유명한 독일의 힌덴부르크보다는 조금 작지만, 길이가 24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비행선들을 보관하기 위해 제작된 격납고가 오랜 세월을 버티고 남아, 이제는 구글의 소유가 되었다.
이 격납고는 별생각없이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눈요기 거리에 불과하지만, 실리콘밸리의 탄생 신화, 혹은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곳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지 말라"고 끊임없이 알려주는 과거의 유령이다.
탄생의 비밀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 그것도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베이 지역(Bay Area)의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가령, 낸시 펠로시는 이런 곳에 지역구를 두고 198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하원의원직을 유지해왔다.) 미국 진보의 고향과도 같은 버클리, 한 때 환각제와 히피 문화의 본산이었고, 지금은 성소수자들의 안전지대처럼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 스티브 잡스가 정신적 지주로 생각했던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 같은 인물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듯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 때문에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몇 가지 이슈에서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 혹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봐야 이 지역의 본색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 지역 대학교들에 있던 뛰어난 연구 인력과 동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작동하던 투자자들이 실리콘밸리의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초창기부터 꾸준히 이어진 미 국방부의 대규모 투자 없이는 지금의 실리콘밸리가 탄생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인터넷의 전신인 아파넷(ARPANET)으로, 이게 국방부의 프로젝트로 시작했다가 민간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워싱턴이 방위비의 일부를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성공한 후에는 이 기술을 사용하는 민간기업들이 큰돈을 버는 일은 오래도록 실리콘밸리의 작동 방식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지역이었을까?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주변을 돌아다녀 보면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 나이키 미사일 발사대를 비롯한 미국 서부 방위의 요충지였던 흔적이 남아있는 이유는 대륙간 탄도탄이 없었던 시절, 태평양 너머에서 올지 모를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지역이 여기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 해군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존재였지만 미국 정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 연구시설을 운영했다. 앞서 말한 해군의 비행선 기지가 이곳에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행기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비행선은 도태되었고, 해군은 모펫필드를 미 항공우주국(NASA)의 전신인 미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에 넘긴다. 그리고 이 기구를 통해 돈이 흘러들어오자 항공우주와 관련한 기업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찾아온 회사 중 하나가 지금은 세계 방산업체 1위 기업이 된 록히드(Lockheed)다. 록히드는 1950년대부터 시작해 개인용 컴퓨터(PC) 붐이 일어나던 1980년대까지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가장 많은 직원을 고용하던 기업이다.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연구하는 마가렛 오마라(Margaret O'Mara)는 자신의 책, 'The Code: Silicon Valley and the Remaking of America'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실리콘밸리의) 산업 전체가 2차 세계 대전과 이후에 있었던 정부의 막대한 투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우주 시대를 위한 방위 계약부터 대학교 연구 기금, 이 지역의 공립학교, 도로 시설, 심지어 세금 제도까지 정부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 미국 정부는 실리콘밸리 최초의 VC(벤처투자자)일 뿐 아니라, 아마도 최대의 VC일 것." 이런 정부의 돈은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잠시 줄어들었다가,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성공 직후부터 다시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1958년에 만들어진 것이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 지금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 DARPA)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앞서 말한 아파넷(ARPANET), 즉 인터넷의 개발 주체다.
한 마디로 말해, 미국 정부 주도의 방위산업이 실리콘밸리의 진짜 뿌리였다.
펜타곤의 걱정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달 말, "펜타곤(미 국방부)이 실리콘밸리를 방위산업에 끌어들이기 위해 구애하고 있다(Pentagon Woos Silicon Valley to Join Ranks of Arms Makers)"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현재 미국의 방위산업은 록히드마틴, 레이시온, 보잉, 노스롭그루먼, 제너럴다이내믹스 같은 최대의 방위산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 다섯 개 업체는 순서대로 세계 1~5위의 방산기업이다). 미 국방부의 걱정은 이런 대규모 업체들이 연구개발에 드는 비용을 정부로부터 받고 있어서 혁신이 빠르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무기의 혁신이 얼마나 빨리 이뤄져야 하는가는 상황이 결정한다. 소련의 붕괴 후 세계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체제로 움직이던 시절에는 굳이 더 앞선 무기를 더 빨리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미국과 무기 경쟁을 꿈꾸는 나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 패권을 두고 미국과 경쟁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밝히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바이든은 이에 "내가 있는 한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의 리더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우위를 유지하는 게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중국이 최근 드론 기술이나 하이퍼소닉 미사일 등에서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기 때문에 펜타곤이 긴장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중국이 새로운 방위산업 기술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중국 정부는 민관인도기금(publc-private guidance funds)을 민간기업에 투자해서 방위산업의 혁신을 끌어내고 있다. 스탠포드 대학교 국가안보혁신센터(Gordian Knot Center for National Security Innovation)의 공동설립자인 스티브 블랭크(Steve Blank)는 이런 방식을 통해 신기술을 빠르게 얻고 있는 중국의 방위산업과 미국의 거대 방산업체를 비교해서 "중국의 방위산업은 실리콘밸리처럼 돌아가는데, 미국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인) 디트로이트처럼 돌아간다"라고 비판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실리콘밸리에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전통적인 방산업체가 아닌 새로운 기업의 참여를 끌어내려고 오래도록 노력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 피터 틸(Peter Thiel)이 세운 팰런티어(Palantir Technologies, 이에 관해서는 오터레터에서 발행한 '호안 톤 탯'에서 자세히 설명했다)라는 기업이다. 팰런티어는 전통적인 방산업체로 가곤 하던 국방부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소송까지 걸면서 오랜 관행을 바꿨다. 피터 틸과 함께 '페이팔 마피아'로 불리는 일론 머스크가 세운 스페이스X 역시 국방부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소송을 불사했고, 비슷한 일은 그 둘 외에도 더 있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국방부의 개발 프로젝트에 덤벼드는 스타트업들이 실리콘밸리를 국방부의 새로운 신기술 어장으로 바꾸고 있지만, 국방부에서는 성에 차지 않는 것 같다. 국방부의 구매(조달) 총책임자 빌 라플랜트(Bill LaPlante)는 팰런티어 같은 기업이 정보(첩보) 분야에 인공기술을 도입하거나, 퀀텀 컴퓨터 같은 기술을 개발하는 건 좋지만 당장 포탄이 날아다니는 우크라이나와 같은 전장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성공 여부가 보장되지 않은 장기적인 개발계획보다 당장 벌어지는, 혹은 다가오고 있는 전쟁에서 파괴력을 가질 신무기가 급하다는 얘기다. 위에서 언급한 스티브 블랭크는 "앞으로 3년 이내에 (미국 방위산업에서) 새로운 이름 10개를 보지 못한다면 민간 기술을 국방부에 이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블랭크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우리가 60년 전에 실리콘밸리를 건설하고, 지금 누리는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다시 한번 펜타곤과 학계, 기업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지난 60년 동안 지속되어온 대규모 방산업체 위주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고, 국방부는 민간 기술을 가져오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처럼 실리콘밸리는 방위산업이라는 뿌리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전부는 아니겠지만 돈 보따리를 풀면 많은 기업이 뛰어들 거다. 세상은 냉전이 시작되던 60년 전으로 돌아갔고, 새로운 냉전 구도 아래에서 중국과 경쟁하는 미국은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고, 기업은 돈이 필요하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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