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대에 선 역사
• 댓글 2개 보기오랜만에 외부 저자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을 쓰신 박누리(Angela Park) 님은 작년에 저와 함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연설을 모은 책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를 번역하셨고, 뉴스레터 커피팟에서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을 연재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엄청난 다독가일 뿐 아니라, 저와 관심 영역이 많이 겹쳐서 평소에도 제게 새로운 책을 종종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특히 한국에 아직 번역되지 않았거나, 번역되기 힘들 것 같은 책을 많이 읽으시기 때문에 오터레터 독자 여러분의 시야를 더욱 넓혀 드릴 거라 확신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줄리언 잭슨(Julian Jackson)이 쓴 'France on Trial: The Case of Marshal Pétain'입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침공을 받은 프랑스에서 승산이 없어 보이자 히틀러에 굴복한 후 비시 정권(Régime de Vichy)이라는 나치의 협력국의 지도자를 지낸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전쟁이 끝난 후 그를 재판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읽어 보시죠.
—발행인 박상현
'France on Trial (재판대에 선 프랑스)' 은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가 2022년 말, “내년에 출간될 가장 기대되는 책” 중 한 권으로 선정했고, 그래서 출간예정일을 저장해놓을 정도로 기다렸던 책이다. 영국에서 6월 초에 출간되자마자 전자책으로 다운받아서 약 반년에 걸쳐 읽었다. 20세기 전반 유럽사, 특히 제3공화국과 2차대전 당시 프랑스 역사 전문가인 줄리언 잭슨이 쓴 이 책은 1차대전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었으나 2차대전 때는 정반대로 나치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고 비시 정부를 세워 프랑스의 "흑역사"로 남은 필리프 페탱의 전후 부역 재판과 그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객관적이면서도 다양한 관점과 디테일을 폭넓게 아우르며 근대 프랑스 역사의 아킬레스건을 세심하게 헤집는다.
이 책의 제목, France on Trial은 쉬운 세 단어로 이뤄져 있지만 제대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재판에 회부된(=on trial) 당사자가 페탱 개인이 아닌 프랑스라는 국가라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페탱은 단순히 나치 부역자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전후 사정이 너무 복잡미묘하고 온갖 가정이 난무해서 오늘날까지도 프랑스는 극우, 중도, 좌파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 편하게 물어뜯지 못한다.
전후 부역자 청산을 담당한 프랑스 검찰은 1945년, 다른 모든 혐의는 포기하고 '국가 반역죄' 혐의만으로 페탱을 기소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페탱이 국가를 배신한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배신'의 정의부터 격론의 대상이 된 것이다. 페탱이 전쟁 초기 몇 번의 전투를 제대로 치르지도 않고 바로 히틀러와 강화를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항복”을 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의 전격전으로 피해가 극심했던 프랑스군은 당시 패배가 뻔한 전투를 계속해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강화를 맺는 편이 그나마 남은 병력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전선에 나가있던 한 젊은 프랑스 군인은 “페탱이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가 국토 전체를 나치에 점령당한 것도 아니다. 현재 프랑스 국토 기준 남쪽 절반은 페탱이 수장이었던 비시 정부(국내에서는 오랫동안 비시 정권을 “괴뢰 정부”라고 불러왔지만, 애초에 “괴뢰”의 정의야말로 불분명하다. 비시 정부는 어찌됐든 공화국 국체, 즉 총리, 대통령, 내각, 의회 등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승인을 받은 공식 정권이기는 했다)의 통치 하에 있었고, 강화 조약의 조건에 따라 나치가 주둔한 북부 역시 폴란드나 네덜란드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온건한 점령 통치를 받았다. 페탱의 옹호자들이 "페탱이 아니었다면 폴란드나 네덜란드처럼 국가가 만신창이가 되고 홀로코스트의 광풍에 휘말리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비시 정권 기간 내내 나치가 점령한 북부를 중심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이 활발했고,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가 "해방"된 뒤 부역자 청산에 앞장선 것도 이 레지스탕스 단원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는 이 레지스탕스 단원들에게도 치부가 없지 않았다. 이들은 “숙적 독일”에 “내 나라 프랑스”를 빼앗길 수 없다는 애국심으로 무장한 민족주의자들이었지, 공산주의자들이나 유대인들의 인권, 혹은 생명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1930년대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고, 나치 침공과 페탱의 강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빨갱이냐, 나치냐”를 놓고 고민했다. 게다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프랑스 상류층은 러시아 집권층의 몰락, 피비린내 나는 살육에서 살아남아 망명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홀로코스트는 분명 끔찍하지만,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빨갱이보다는 나치가 그나마 낫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다수의 프랑스 중산층과 상류층은 적어도 나치 침공 직후, 즉 전쟁 초기에는 비시 정권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이들이 “국가의 배신자”라며 비시 정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중반으로 치닫고, 영국이 버티고, 미국이 참전하면서 히틀러가 예전과 같은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페탱의 재판에 출두한 수많은 검찰 측 증인들 역시, 대다수는 페탱에 대해 격렬한 공격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1차 대전 구국의 영웅이었던 페탱에 대한 개인적 존경심도 없지 않았으나, 당시 프랑스의 상황 자체가 페탱을 무조건 비판하기가 매우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역자, 국가의 배신자로 비난 받는 가장 큰—현실적인—이유는, 당시 페탱에게는 치욕적인 강화 대신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프랑스와는 달리 북아프리카에 거대한 식민지를 가진 제국이었다. 프랑스 본토가 나치의 수중에 떨어진다고 해도, 내각과 의회가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임시 정부를 세웠다면 충분히 항전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프랑스의 대체 역사 마니아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스토리여서 수많은 동인물이 나올 정도이다. 실제로 모로코와 알제리의 프랑스 함대는 비시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비교적 중립을 지켰고, 1942년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을 때 큰 저항 없이 투항하여 연합군의 자산이 되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재미있게도 페탱의 변호인들은 재판에서 바로 이 행위를 “페탱이 완전히 나치에게 붙은 것은 아니”라는 증거로 내세웠다.)
저자가 영국인임을 고려하면, 이 책이 전반적으로 “페탱과 그 옹호자들의 입장에서도 할말은 있다”라는 관점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 특히 흥미롭다. 이 책의 70퍼센트 정도는 재판 기록을 토대로 페탱의 재판 과정을 여과없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고, 후세의 해석이 아닌 현장의 느낌을 우선했기 때문에, 왜 증인들이 이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증언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설명하다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는 하다.
심지어 페탱의 재판이 열린 기간은 악명높은 파리의 한여름인 데다, 재판부, 검찰, 피고와 변호인, 양측의 증인, 보도 기자들과 방청객들의 규모를 고려하면 재판정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세계의 이목이 쏠린 세기의 재판이라고 해도 실제 재판정에서는 방청객 대부분이 폭염, 졸음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페탱의 변호인들이 내세웠던 논리는 “페탱이 히틀러에게 붙은 적이 없다”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반대 증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변호인들은 그 대신 "페탱이 히틀러에게 붙은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더블트릭,' 즉 독일 편인 척하면서 사실은 뒤에서 연합군에게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기 위함이었다"라는 논리를 사용했다. 이쪽이 덜 이념적이고, 검찰 측 논리의 허점을 공격하기도 더 쉬웠다.
위에서 언급한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함대 역시 이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쓰였고, 심지어 처칠과 비밀 서신을 주고받았다고도 주장했다. (물적 증거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으나, 이 서신의 존재에 대해 들었다는 전언 증언들이 있었다.) 심지어 당시 처칠과 루즈벨트가, 어차피 프랑스 군대가 히틀러를 상대로 버티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 차라리 강화를 맺어서 아예 일종의 중립 지대로 버텨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는 정황 증거도 있다.
따라서 변호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북아프리카로 서둘러 피난 간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끝까지 프랑스를 “지키며” 앞에서는 히틀러를 상대로 연극을 하고 뒤로는 어떻게든 연합군과 대반격을 준비한 페탱의 "살신성인"과 비교했을 때, 안전한 영국으로 피신해서 입만 나불거리고 있었던 드골은 군인이라고도 하기 힘들 만큼 비겁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모든 일이 페탱의 현명한 의도대로 되지 않은 이유는 80대 후반의 노령으로 인해 판단력과 실행력이 예전만 못한 페탱을 둘러싼 “매국노 간신배”들, 특히 총리였던 피에르 라발이 페탱의 의지에 반하는 반역 행위들을 일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변호인의 요지였다.
절반은 레지스탕스, 절반은 제3공화국 정치인들이었던 배심원단은 구성부터 페탱에게 불리했지만, 의외로 최종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국가 반역죄로 사형 선고가 마땅하다, 사형은 과하다, 라는 팽팽한 의견 대립이 수 시간 동안 이어졌다.
결국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대로 유죄 판결과 사형 선고 후, 이미 고령과 1차대전 당시의 공적을 고려하여 드골이 대통령 직권으로 감형하는 결과가 나왔다. 참고로 페탱은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묵비권을 행사하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를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는데, 사형이라는 형량보다는 자신의 무죄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페탱은 유배형으로 감형받아 프랑스 본토에서 대서양의 작은 섬 이으(Île d'Yeu)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1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그곳에 묻힌다. 부인이 함께 거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부인과 그의 변호인만이 종종 작은 배를 타고 그를 방문했다. 신생 독립국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원한 것은 페탱이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잊혀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잊혀지는 것이 더 큰 벌일 때도 있는 법이다.
페탱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재판과 유배 이후 한동안 잊혀졌던 페탱이 다시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국가를 배반한 반역자였지만, 한때 구국의 전쟁 영웅이기도 했던 그가 일반 범죄자처럼 낙도에 이름없이 묻힌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끓어올랐다. 주축은 우파 정치 세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 페탱과 함께 베르됭에서 싸웠고, 페탱 덕분에 목숨을 건진 1차대전 참전 용사들도 거들었다. 살아생전에야 어쨌든, 죽은 페탱은 그의 전우들과 함께 베르됭의 전몰자 묘지에 묻혀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페탱의 이장 청원은 이후로도 꾸준히 등장한다. 페탱은 알제리 독립, 2000년대 이후 르펜이 이끄는 극우 정당의 부상, 난민 문제 등 다양한 사회 이슈에서 프랑스 민족주의의 아이콘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1차대전 관련 이벤트(베르됭 전투 기념일 등)가 있을 때마다 프랑스 대통령이 “전쟁 영웅”으로서의 페탱의 묘에 참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참배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 갑론을박이 첨예하지만, 결과적으로 해방 이후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은 단 한명도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페탱의 묘에 참배하지 않았고, 페탱은 여전히 이으 섬에 잠들어있다.
페탱의 변호인 3명 중 자크 이소르니는 페탱 재판 당시 정치적 야심이 큰 햇병아리 변호사였다.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페탱 재판을 통해 일약 스타 변호사로 떠올랐고, 평생 페탱의 사면 복권을 추진했다. 페탱의 복권 청원은 이소르니가 정치적 입지가 약해질 때마다 들고 나왔던 카드이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한국에서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이슈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공산주의자였으나 레지스탕스에 투신했고, 그 과정에서 가족과 때로는 자신의 생명조차 잃어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반공이라는 공적으로 국가를 배신하고도 아무런 지탄을 받지 않고 사회의 지도층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 같은 시기, 프랑스에도, 대한민국에도 존재해 왔다. 차이가 있다면, 프랑스는 나치 부역 문제에 있어서 철저한 단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사회 지도층 내부에서 “어디까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인지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있었다. 페탱의 유죄와 사형 선고는 그런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페탱은 프랑스 해방 후 본토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다. 전쟁 말기 나치는 페탱과 비시 정권 고위 인사들을 납치해 독일 남부로 끌고 갔으나, 페탱은 나치를 따돌리고 스위스로 망명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스위스에서 프랑스로 돌아온다.
이미 90살이었던 페탱이 스위스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연사하기를 희망했던 드골은 페탱의 귀국 소식을 듣고 분노를 터뜨렸다고 전해진다. 페탱이 부역자로서 처벌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편이 프랑스의 미래에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페탱이 귀국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재판에 세울 수밖에 없고, 이 재판은 이제 막 새로이 태어나려는 상처투성이 프랑스를 깊은 분열에 빠뜨릴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드골의 예상은 적중한다.
순수하게 법리적으로만 보면 페탱의 “국가 반역죄” 유죄와 사형 선고는 여러모로 무리한 정치적 판결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유죄와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은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은 페탱이든 아니든,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만에 하나 역사가 반복될 경우, 다시는 비시 정권과 같은 존재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선례의 메시지를 줄 필요도 있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부역자 재판은 그 규모도, 재판 결과도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물론 나치에 점령 당했던 북부에서는 군중 재판과 사적 제재들이 있기는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머리가 박박 깎여 조리돌림 당하는 여성들의 사진 역시 사회적으로 지위가 취약하고 그래서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 쉬운 여성들을 상대로 한 사적 제재였을 확률이 높다.
책 전반에 걸쳐 "페탱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한 저자는 “프랑스의 재판”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런 종류의 재판은, 좋든 싫든 어느 정도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정치적이라는 사실이 재판의 의미 자체를 깎아내리지도 않는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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