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끝
• 댓글 1개 보기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의 종료 시점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발발 직후에는 많은 나라들이—여기에는 러시아도 포함된다—우크라이나의 항전이 일주일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한 의심이 커졌고, 여기에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세계의 러시아 제재가 본격화하면서 러시아가 어느 단계에서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가진 무기와 탄약, 그리고 무엇보다 병력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을 마냥 끌고 갈 수는 없다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망은 강대국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지를 간과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20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10년에 가까운 전쟁을 했다.) 긴 전쟁을 끝내는 것은 탄약의 부족이 아니라, 국내외 여론의 변화와 그로 인한 정치적 압력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함께 식량과 에너지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이고,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국가의 패망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정권의 생존은 다른 얘기다.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물론이지만, 독재국가도 여론의 악화를 무시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북한으로부터 약 1만 명의 병력을 지원받은 건 러시아에 싸울 수 있는 젊은 남성이 남아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푸틴이 총징집령 발동을 꺼리기 때문이다. 푸틴은 직업군인 병력으로만 이 전쟁을 시작했지만, 발발 3주년이 가까워 오는 현재 약 6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상황에서 병력의 부족분을 어디선가는 데려와 채워야 한다. 그가 북한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은 (아마도 기술 이전 등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총징집령만은 피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민 사이에서도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초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싸워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지만, 전선에 큰 변화가 없이 사상자만 늘어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미 빼앗긴 영토를 찾아올 수 없다면 차라리 휴전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료를 기정사실처럼 만든 것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부터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푸틴과 트럼프의 각별한 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재임 중 바이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우크라이나가 협조하지 않은 데 대한 앙갚음일 수도 있지만, 트럼프는 미국이 국제 문제에 개입해서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고립주의를 꾸준히 외쳐온 사람이다.
트럼프는 자기가 "아이젠하워 이후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첫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지미 카터, 제럴드 포드,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중에 "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것들을 고려했을 때 그의 재임 기간, 그것도 초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미국에는 우크라이나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금도 하루에 포탄 1만 발을 쏠 수 있는 건 미국의 지원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이 아무리 우크라이나를 응원해도 지금 미국이 하고 있는 규모의 무기와 탄약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 게다가 미국이 지원하는 건 무기만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우크라이나는 작동을 멈추게 될 만큼—미국의 지원이 없으면 공무원 월급도 줄 수 없다—크게 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는 젤렌스키에 정전 협상을 강요할 힘이 있다.
미국과 같은 물주가 없는 러시아는 당연히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 문제는 정전의 조건이다.
푸틴이 바라는 것
트럼프가 푸틴의 소원을 얼마나 들어줄지를 생각해 보기 전에 바이든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이든은 푸틴의 제거나 실각을 원하지 않는다.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에서 차기 지도자가 누구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독재자가 권력을 잃는 건 미국에게 악몽같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만 집어삼키고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바이든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찔끔찔끔 제공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푸틴이 정권을 유지하되, 나토 국가들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묶어두는 것이 바이든이 가진 우크라이나 전략의 핵심이다.
현재 시점에서 푸틴이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러시아가 빼앗은 우크라이나 동부(돈바스)와 남부(크림/크름반도)를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받고 일단 전쟁을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이를 순순히 허락할 경우 푸틴은 몇 년 후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푸틴이 애초에 원하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3년 동안의 전쟁 결과 러시아의 영토가 늘어났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도 생각이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와 유럽 국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트럼프가 푸틴이 바라는 대로 우크라이나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더 나아가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를 해제한다면—이런 일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2기 트럼프의 내각이 구성되는 것을 보면 그가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이를 막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가능성이다—유럽은 미국이 유럽의 방어, 즉 NATO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으로 받아들일 거다. 하지만 이 경우 미국 방위산업을 먹여 살리는 큰 손인 유럽의 시장을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트럼프도 그런 결정을 쉽게 하지는 못할 거라는 예상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바라는 것
바이든 행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모두 찾을 때까지 협상에 임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지만, 트럼프의 집권으로 상황이 달라졌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이제 우크라이나는 영토의 회복보다 안전 보장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영토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러시아가 재침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라는 것.
그 배경에는 2014년과 2015년의 경험이 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와 동부 국경 지역의 반군을 지원하며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점령한 후 정전(cease-fire)했지만, 2022년에 전면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우크라이나가 빼앗긴 영토를 포기하고 정전 협정에 들어간다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을 요구할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NATO 가입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이를 허락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러시아가 재침공할 경우 미군을 파견해 러시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가입이 승인된다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애초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핑계가 NATO의 확대로 러시아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것이었는데, NATO 회원국과 국경을 맞대는 것을 정전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토 가입이 불가능하다면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필요한 건 확실한 무장이다. 러시아가 재침공할 경우 외국의 도움이—온다고 보장할 수도 없지만—올 때까지 러시아군을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무장은 러시아가 재침공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억제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쿠르스크 점령지 문제
정전 협상의 중요한 걸림돌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가 지난여름 기습적으로 점령한 쿠르스크 지역의 러시아 영토다. 면적만으로 보면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와 비교할 수 없지만, 푸틴으로서는 이 땅을 뺏긴 채 정전 협정을 맺을 경우 국내에서 승리를 선언하기 힘들다. 따라서 러시아는 쿠르스크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나가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러시아의 입장이 과거 우크라이나가 "빼앗긴 영토를 찾기 전까지 협상은 없다"고 했던 말과 똑같이 들린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으로 러시아 영토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푸틴이 북한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도 바로 쿠르스크 지역 때문이다. 정전 협상이 가까워 오는 상황에서 반드시 되찾아야만 하는 영토가 있다는 건 불리한 조건이다. 현대 전쟁사가 주는 교훈이 하나 있다면, 정전 협정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맺어진다는 것이다. 푸틴은 이 지역을 되찾아야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이를 달성하기로 했다.
최근 바이든이 우크라이나가 미국제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해도 좋다고 승인한 것도 이 쿠르스크 점령지를 두고 나온 결정이다. 러시아가 북한군까지 동원해서 이 지역을 수복하려 하자 미사일 사용을 허용한 것은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가 중요한 협상 카드를 잃지 않도록 힘을 실어 주고 백악관을 떠나려는 의도로 보인다. (트럼프는 이런 바이든의 결정에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내년 초에 들어설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내년 초 미국이 제시하는 조건을 무시하기 힘들 거다. 하지만 미국이 국제 문제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트럼프가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미국이 축적해 온 외교적, 전략적 자산—트럼프가 줄이려 하는 바로 그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장담대로 정전 협정이 이뤄지면 우크라이나 국경에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런던 킹스 칼리지의 러시아 군사 전문가 로드 손튼(Rod Thornton)은 정전(cease-fire) 협정과 평화 협정(peace deal)을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정전은 가능하겠지만, 평화 협정은 없습니다. 구소련의 일부였던 트란스니스리야,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났던 분쟁들 보세요. 종료된 게 아니라 얼어붙었을 뿐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렇게 냉동 상태에 들어갈 거고, 나중에 어느 한쪽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얼어있던 분쟁을 다시 녹여 깨울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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