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파월(Colin Powell)이 전 미 국무장관이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미국에서 흑인으로서 공직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파월은 1937년에 뉴욕 할렘에서 자메이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뉴욕에서 대학(City College of New York)을 다니던 중 ROTC 훈련을 받고 졸업 후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훗날 4성 장군이 되고, 미군 합참 총장을 거쳐 흑인 최초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입지전적(立志傳的)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콜린 파월에게는 아무런 과장이 아니다. 뉴욕타임즈는 "His was a classic American success story"라고 표현했고, 나중에 백악관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 힘으로 그 자리에 간 사람으로 보였다. 미국 언론은 월요일 내내 파월의 부고를 전하며 그의 생애를 조명하기 바빴다. 아마 앞으로 며칠 동안은 그럴 것 같다.

4성 장군이던 시절의 콜린 파월

하지만 거의 모든 기사와 보도 내용에 붙는 한 줄이 있다. "2003년에 미국을 이라크 전쟁으로 몰고 가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비판이다. 미국 언론의 부고가 한국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세상을 떠난 인물의 오점을 숨기거나 축소하지 않고 낱낱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모두 보여준 후 평가를 한다. 파월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미국인들은, 특히 이라크 전쟁(2003~2011)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파월의 죽음 앞에서 이라크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한다.

콜린 파월의 부고 아래 달린 "이라크 전쟁으로 세상을 떠난 46만 명을 추모합니다"라는 댓글이 그들의 생각을 잘 표현해준다. 모든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특히 명분 없는 전쟁으로 평가된다. 이런 전쟁에서 46만 명이 사망했고, 강력한 독재자가 사라진 이라크는 테러 단체의 온상이 되었다.

이라크 전쟁의 주도 세력

안타까운 것은 콜린 파월은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취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현대사 최악의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지 W. 부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이 사람도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과 함께 이라크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라크가 9/11 테러리스트들을 숨겨주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정작 테러리스트들과 연계되었던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였지만, 우방이라는 이유로 그 연결점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까지 극비문서로 지정해서 숨겼다. 이 문서들은 최근에야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뒤에 들고나온 '침공해야 할 이유'가 그 유명한 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대량살상무기)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WMD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 당시 이라크가 9/11 테러와 관련이 없고, 미국은 당장 대 테러 전쟁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미국인들은 이 전쟁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부시가 사담 후세인에 "꽂혀있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걸프전의 승리를 알리는 신문의 헤드라인. 오른쪽 기사에 "군사적인 목적을 달성"했다고 설명한다.

미국 보수주의 강경파는 부시의 아버지 조지 H. W. 부시가 미국의 우방인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상대로 싸워서 승리했던 걸프 전쟁(1990~1991) 이후로 사담 후세인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 부시는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내며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는데, 그 이후로 후세인은 중동 지역에서 반미, 반이스라엘 세력의 맹주 행세를 하면서 미국의 신경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었던 거다. 부시는 9/11 테러를 막지 못한 책임이 있지만, 전쟁 중에 리더를 중심으로 뭉치는 대중의 심리에 힘입어 기록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고, 그런 전폭적인 지지를 발판으로 사담 후세인 제거라는,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일을 달성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조지 W. 부시는 보수의 허수아비라는 평가를 듣고 있었고,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 부시 정권의 실세가 딕 체니 부통령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해관계는 뭐였을까? 체니는 부통령이 되기 전에 할리버튼(Halliburton)이라는 기업의 CEO였다. 할리버튼은 세계 최대의 석유채굴 기업이었을 뿐 아니라, 군수기업인 KBR을 자회사(훗날 분리)로 갖고 있었고, 이라크 전쟁을 전후로 미국 정부로부터 수십 억 달러의 계약을 따냈다.

신뢰감을 주는 인물

2020년에 나온 뉴욕타임즈 매거진의 피처 기사에 따르면 당시 국무장관이던 파월은 2002년 여름에도 이라크 전쟁에 회의적이었다. 영국의 외무장관과 회동에서 "우리가 과연 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국민이 선출한 리더가 전쟁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다면 임명직 관료들이 얼마나 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의 고민이었다.

파월은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던 영국 외무장관에게 자신은 체니, 럼스펠드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그들이 변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백악관 회의 때 전쟁에 반대하는 파월은 고립된 상황이었다. 그가 부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를 제거하고 나면 대통령님께서 분열된 18개 지역, 2천 5백만 이라크인을 넘겨받는다는 겁니다"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보면 파월의 전망과 경고는 옳았다.

그랬던 그가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인물로 기억되는 일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부시 정권에게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콜린 파월은 베트남 전쟁(1955~1975)에 참전한 이후로 오래도록 군 경력을 쌓으며 군 안팎에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보수적인 인물이었지만 당파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체니, 부시, 럼스펠드와 달리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말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체니와 럼스펠드는 미국 유권자들로부터 이라크 침공이라는 군사행동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콜린 파월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부시 정부 수뇌부에서 이라크 전쟁에 가장 회의적이었던 콜린 파월이 말 그대로 총대를 메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의 유엔 발언이었다. 2003년 2월 15일에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파월은 미국이 수집한 "후세인이 WMD를 갖고 있고 ,계속해서 개발할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했다. 아래의 영상이 바로 그 장면, 파월이 말년에 "가슴 아프게" 후회했던 그 발언을 하는 장면이다.

파월이 2003년 2월 1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했던 발언은 이라크 전쟁을 사실상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월의 발언은 전쟁 개시 선언이나 선전포고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이 장면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의 말이 갖는 무게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당과 전쟁 반대론자들, 그리고 국제사회는 후세인의 WMD 노래를 부르는 미국 정부에 그럼 그 증거를 대라고 요구했지만, 부시 정권은 변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라크는 WMD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에 승리한 미군이 이라크에서 WMD를 찾지 못해 당황하는 모습은 워싱턴포스트 특파원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그린존 Green Zone'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상황은 파월의 발언으로 종료되었다. 그가 들고나온 위성사진과 생화학 무기 샘플 등의 "증거"는 미국의 유권자들과 국제사회가 부시의 전쟁을 승인하거나 최소한 눈감아 줄 수 있을 만큼의 신뢰를 제공했다. 즉 파월은 전쟁 세일즈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파월이 제시한 "증거"는 그가 직접 수집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정보를 부시 정권으로부터 전달받았을 뿐이다. 파월은 자신이 허위정보를 전달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상대방을 속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믿는 것"이라는 말처럼, 건네받은 정보를 신뢰한 파월은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었고, 46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도 지역 정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전쟁을 시작하게 해주었다.

Fall Guy

여기에서 부시를 포함한 백악관의 매파(hawks)에게 파월이 유용했던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뉴욕타임즈 매거진의 설명처럼, 파월이 전쟁에 회의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여론을 바꿀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파월은 부시를 비롯한 3인방이 전쟁으로 달려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아니라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견고한 신뢰(unassailable credibility)"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후세인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present and immediate danger)'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신뢰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은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물론 콜린 파월이 전쟁에 회의적이었다고 해서 그가 전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했지만 "최종 결정은 대통령께서 내리는 것이고, 만약 (외교적 해결방법이) 실패해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군사행동을 해야 한다면" 자신은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파월은 전쟁을 지지한 게 맞다. 하지만 전쟁에 가장 회의적이었던 인물이 전쟁을 원하는 세력이 주는 허위정보를 들고 유권자와 국제무대에 나가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발언, 혹은 설득이 전쟁으로 가는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여론을 바꿨다는 점에서 그는 이라크 침공의 얼굴이 되었다.

콜린 파월은 정확히 무슨 잘못을 했을까? 자신이 이용당할 수 있다는 의심이나, 그렇게 이용당했을 때 일어난 엄청난 결과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로서는 최선의 판단을 했을 거다. 그보다는 부시와 체니, 럼스펠드가 함께 일을 하자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을지 모른다.

부시와 매파에게 파월이 평생 쌓아온 신뢰는 딱 한번 잘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었다. 물론 파월도 그걸 모를 만큼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전쟁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었고, 딕 체니와 럼스펠드가 허위정보를 제공하는 등의 공을 들여야 했던 거다. 그런 그들의 치밀한 계획이 성공하자 파월은 폴가이(fall guy)가 된 것이다. (미국이 오래도록 범죄 조직을 소탕하지 못했던 이유는 조직의 우두머리는 직접 범죄에 가담하지 않고, 항상 졸개나 중간보스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보스 대신 자백하고 감옥에 들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희생되는 인물을 범죄 조직에서는 폴가이라 부른다).

fall guy n. a colloquial phrase that refers to a person to whom blame is deliberately and falsely attributed in order to deflect blame from another party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의적으로 대신 떠안는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

물론 사람들은 파월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아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엄밀한 의미의 폴가이는 조지 테넷이라고 할 수 있다. WMD 관련한 허위정보는 그의 손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진정한 혐의는 그에게 있다. 하지만 WMD와 관련해서 조지 테넷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다칠 만한 명예나 쌓아온 업적이 있는 인물도 아니다.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허위정보를 최종 전달한 파월을 기억한다. 대중이 들은 거짓말은 파월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항상, 어디서나 일어난다. 지난주 영국의 가디언은 페이스북의 대변인이 된 영국의 전직 부총리 닉 클레그의 최근 행보를 이야기하는 기사의 제목을 "닉 클레그는 어떻게 페이스북의 실패를 떠안는 폴가이가 되었나"로 뽑았다. 테크놀로지와 무관한 영국 정치인 클레그가 선거에서 패한 후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페이스북의 대변인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놀랐지만,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가 맡은 업무는 한국에서는 흔히 "대관(對官)업무"라 불리는 것으로 언론과 정치인들을 만나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이다.

하지만 미디어를 잘 아는 언론인을 선택하는 대신 유명한 정치인을 고른 이유는 그가 정치계와 언론계의 '언어'를 잘 알 뿐 아니라 대중에게 신뢰감을 줄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영국 억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물론 클레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대가로 정치인 시절에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연봉(65만 달러 이상으로, 외국 국적을 가진 직원 중 최고의 액수로 알려졌다)을 받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범죄조직의 폴가이는 일단 감옥에 들어가면 그 용도가 끝난다.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닉 클레그가 가진 대중적 신뢰도 한 번 잃으면 끝이다. 페이스북에 화가 난 사람들은 "클레그의 영국 억양도 듣기 싫다"고 할 만큼 그는 페이스북의 실패에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산을 돈을 받고 태워버렸다.


그렇게 자타가 인정하는 인생의 오점을 남긴 콜린 파월은 자신에게 남아있던 영향력을 사용할 기회를 두 번 더 만나게 되었다. 한 번은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출마한 2008년에 공화당원의 신분으로 민주당 후보인 오바마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이었다. 부시를 지지했던 보수와 중도 유권자들에게 그의 지지 선언이 일종의 보증수표로 작동했고, 오바마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올해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연방의회 의사당에 침입했을 때였다. 파월은 "공화당 동료들이 (침입을 부추긴) 트럼프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내 스스로를 공화당원이라 부를 수 없다"라고 선언하며 탈당했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이 장악한 공화당에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파월이 생전에 공개한 20대 시절의 셀카 (195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