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개신교의 탄생 ⑥
• 댓글 8개 보기다트머스 대학교의 종교학자 랜덜 바머는 2014년에 지미 카터의 전기를 출간한 후 폴리티코에 그 책에 나온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The Real Origins of the Religious Right(종교적 우익의 진짜 기원)'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적 세력화를 이룩한 것이 그들의 주장처럼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인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 같은 복음주의 기독교를 믿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1980년) 재선을 막으려는 의도였음을 자세히 설명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왜 자기와 같은 복음주의자 대통령을 싫어했을까?

우선 카터는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었다. 복음주의자이면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그것도 남부 조지아주 출신의 정치인은 마치 유니콘처럼 특이한 조합이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아칸소주 출신의 빌 클린턴이 비슷한 유니콘이었다.) 미국 남부 백인 유권자들은 그의 진보적인 성향보다는—정치인 중에서는 처음 보는—그가 복음주의자임을 내놓고 밝히고 선거에 임하는 것에 더 눈길이 끌렸다.
아래 지도에서 "바이블 벨트"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 지역이 통째로 카터에게 넘어간 것을 볼 수 있듯, 그들은 카터가 진보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한 것이다.

하지만 카터는 신앙적으로 복음주의자였지, 복음주의자들이 바라는 보수적인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선진국과 같은 국민건강보험을 지지했고, 군사비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믿었고, 무엇보다 부자들에게 유리한 세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그는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전형적인 진보주의자였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전천년설을 믿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 그러니까 세상은 계속해서 종말을 향할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그걸 막거나 바꿀 수 없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태도와는 반대된다.
그런 카터의 성향에 실망한 복음주의자들, 특히 신자들을 상대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목사들은 대통령을 바꿔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서는 공화당 정치인들과 손을 잡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이를 가장 열심히 행동에 옮긴 사람이 폴 와이릭(Paul Weyrich)이다. 와이릭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자,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의 공동 설립자다.
참고로, 트럼프가 두 번째 집권할 경우 미국의 정부를 대대적으로 바꾸겠다며 '프로젝트 2025'를 만든 곳이 바로 헤리티지 재단이다. 이 계획은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 프로그램 중단, 교육부 폐지, 불법체류자 강제 추방, 환경과 기후변화 규제 철폐, 화석연료 생산 가속화와 같은 과격한 정책 외에도 신앙을 기준으로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독교적 가치 주입을 주장한다. 선거운동 당시 트럼프는 '프로젝트 2025'에 대해 모른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1기 행정부 보좌관들이 대거 저자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부 개혁의 방향도 이 계획과 거의 일치한다.

폴 와이릭을 비롯한 복음주의 진영의 리더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인종이 분리된 사립학교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을 분노하게 만든 이슈가 연방 정부가 개입한 강제적인 인종 평등이었기 때문이고, 이 감정은 남북전쟁의 패배라는 오래된 분노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종 분리를 정치적인 목표로 내세우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들은 훨씬 더 쉽게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슈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지미 카터의 임기 2년 차인 1978년의 중간선거를 앞두고 와이릭이 찾아낸 이슈가 5년 전에 나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이었다. 그전 10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낙태가 로마 가톨릭교회가 반대하는 문제라는 이유로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그 판결이 통과된 후로 합법적인 낙태가 증가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대법원이 인정한 낙태권을 표적 삼아 복음주의자들을 단결시키면 거대한 유권자 집단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공화당 후보와 협상할 수 있는 정치적 파워가 생길 것이었다.
그 후보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와이릭의 생각은 적중했지만, 그의 계획이 실현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두 사람이 있다. 프랭크 셰이퍼(Frank Schaeffer)와 그의 아버지 프랜시스 셰이퍼(Francis Schaeffer)다. 특히 한국에서는 "프란시스 쉐퍼"라는 발음으로 더 잘 알려진 아버지는 20세기 후반에 교회를 열심히 다닌 개신교 신자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프랜시스 셰이퍼는 복음주의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그가 스위스에 세운 복음주의 신앙 공동체 라브리(L'Abri, 쉼터)는 전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이 마치 순례지처럼 찾아와 머무는 곳이었다. 그런 셰이퍼도 처음에는 다른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낙태가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신학적 연구를 통해 1960년대에 결론이 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들 프랭크가 있었다. 프랭크는 10대에 이미 결혼해서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라브리에서 아버지를 돕고 있었지만, 신학자인 아버지와 달리, 장래에 헐리우드에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아들에게 영화 제작의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프랜시스 셰이퍼는 프랭크가 장래의 꿈을 이루는 것을 돕고, 동시에 자기의 신학적 견해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두 개의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How Should We Then Live?)'라는 이 10부작 다큐멘터리는 1977년에 나왔고, 프랜시스 셰이퍼가 1976년에 출간한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프랜시스 셰이퍼는 신학 외에도 미술사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라브리에서 했던 그의 강의는 성경과 예술, 문화가 뒤섞여 "기독교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목표가 있었고, 그와 아들 프랭크가 함께 제작한 10부작 다큐멘터리도 그렇게 예술과 문화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참고로, 유튜브에서 10부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마지막 두 에피소드에서 다소 뜬금없이 낙태 이슈를 이야기한다. 아들 프랭크 셰이퍼에 따르면 이 결정은 아버지가 내린 게 아니었다. "제가 아버지께 건의해서 '로 대 웨이드'와 낙태의 합법화 문제를 넣자고 했습니다. 그걸 제작할 당시 저는 10대의 아빠였기 때문에 그 문제는 아주 개인적인 문제였고, 전혀 철학적인 주장이 아니었어요. (마찬가지로 10대였던) 아내와 제게는 갓 태어난 딸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를 무척 사랑했어요."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는 미국 내 16개 도시를 돌면서 상영회를 열었고, 엄청나게 히트한다. 뉴욕의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상영했을 때는 무려 2만 명에 가까운 관객이 몰렸다. 그렇게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나온 지 한 참 지난 1977년, 셰이퍼 부자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복음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미국 내 기독교인들을 정치 세력화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폴 와이릭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스위스의 신앙 공동체에서 히피처럼 자란 10대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은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신학자 아버지의 도움으로 인기 다큐멘터리에 들어갔고, 와이릭을 비롯한 목사들이 정치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정치적 쟁점화하는 동안 미국의 동부와 서부 해안가 대도시에 사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스콥스 원숭이 재판' 이후로 복음주의자들은 존재감이 없었다. 프랭크 셰이퍼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 프랜시스 셰이퍼가 쓴 책들은 일반 서적보다 5배나 더 많이 팔렸지만,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다. 셰이퍼의 책들은 신앙 서적 전문 서점에서 팔렸는데, 그런 서점은 뉴욕타임즈가 판매량 통계를 낼 때 아예 고려 대상에 들어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2022년, 연방 대법원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을 때 여성 운동과 진보 진영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놀라고 탄식했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40년 넘게 그 순간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편, '보수 개신교의 탄생 ⑦'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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