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를 찌른 가시 ③
• 댓글 남기기1990년 10월, 에스텔라는 배심원 임무를 수행하러 출두하라는 제65지방법원의 편지를 받고 긴장했다. 에스텔라는 엘파소에서 살면서도 여러 이유로 자신이 아웃사이더라고 느꼈다. 그는 엘파소 시내와 리오그란데 강 사이에 있는 오래된 동네, 세군도 바리오(Segundo Barrio)에서 태어났다. 남미에서 오는 이민자들이 그 동네를 지나곤 했기 때문에 세군도 바리오는 제2의 엘리스섬(Ellis Island,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올 때 검역 등의 절차를 위해 거쳤던 뉴욕의 섬—옮긴이)으로 불렸다.
에스텔라의 아버지는 철강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무려 14명의 아이를 키웠다. 에스텔라는 그중 넷째로, 어린 시절 화장실도, 수도도 없는 아파트에서 침대도 없이 생활한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스페인어만 사용했던 에스텔라는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소득이 높은 백인들이 엘파소의 일등 시민이고, 자기 같은 가난한 멕시코계는 나서지 말고, 그들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자라면서 자기 엄마가 하는 말을 백인들이 끊고 말하는 것을 숱하게 봤다. 학교에서도, 빵집에서도 그랬다. 에스텔라는 그게 싫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자기도 엄마와 같은 자리에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입을 열면 "조용히 해!"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에스텔라는 키가 유난히 작아 친구들 사이에서 "엄지공주"로 불렸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똑똑했고, 말이 많았던 에스텔라는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자기 의견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학교는 좋아했지만, 학교에서는 대부분 입을 다물고 지냈다. 학교에서는 스페인어가 금지되어 있어서 영어로만 말해야 했는데, 에스텔라의 영어를 들은 아이들이 웃으며 놀렸기 때문이다.
빨리 일해서 돈을 벌고 싶었던 에스텔라는 9학년(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베이비시터 일을 시작했고, 그 후에는 병원에서 세탁일을 하면서 한 달에 100달러, 약 13만 원을 벌었다.
19살이던 1961년, 에스텔라는 동생 둘을 데리고 근처 백화점에 놀러 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반대 방향에서 올라오고 있던 젊은 남자를 보게 되었다. 조니 이바라(Johnny Ybarra Jr.)라는 이 남자는 에스텔라의 눈에 반해서 올라갔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에스텔라에게 말을 걸었다. 프로 권투선수였던 그는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에스텔라보다 두 살 많았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한 달 후 결혼했다.
조니는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되었다. 두 사람은 1960년대에 아들만 네 명을 낳았고, 1976년에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한다. 에스텔라는 주택 융자금을 갚는 데 보태기 위해 동네 YMCA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워낙 보수가 적었기 때문에 검정고시(GED)를 봐야겠다고 결심한 에스텔라는 식구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후 밤늦게까지 영어 공부를 했다. 에스텔라의 형제자매 중 누구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에스텔라는 결국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졸 학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그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돈도 더 벌고 싶기도 했지만, 자기가 속한 엘파소 커뮤니티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기도 했고, 영어도 더 자신있게 하고 싶었던 에스텔라는 엘파소 커뮤니티 칼리지(일종의 전문대학교)에서 정신건강과 관련한 2년제 학위 과정을 밟아 십 대부터 노인까지 상담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싶었다. 시어머니를 포함해 식구 중에 "너무 나이가 많지 않으냐"고 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입학했다. 그리고 1980년, 38세의 나이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 졸업장으로 에스텔라는 시각장애인을 돕는 단체(Lighthouse for the Blind)에 취직할 수 있었다. 워낙 대인 기술이 좋았던 그는 빠르게 승진해서 40명의 직원을 관리하게 되었다.
배심원으로 법원에 출두하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 에스텔라의 직장은 몹시 바빴기 때문에 에스텔라의 상사는 그가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치나 사법 문제에 관심이 없던 에스텔라 역시 원치 않았다. 살면서 대통령 선거 투표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법원에 가야 했다. 1990년 12월 17일, 남편 조니가 그를 데려다주었다. 법원은 에스텔라가 자란 동네, 세군도 바리오에서 몇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동네에 있었다. 에스텔라의 가난한 시절을 상징하는 세군도 바리오는 이제 아주 먼 기억이었다.
에스텔라는 배심원석에 앉은 후 다른 배심원들은 어떤 사람인지 둘러봤다. 여성이 여덟, 남성이 셋이었는데, 여성들은 대부분 히스패닉이었다. 피고를 보니 피고도 히스패닉이었고, 에스텔라의 큰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젊은 남성이었다.
자기 변호사와 함께 앉아 있던 카를로스는 에스텔라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겁에 질린 그는 자기가 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방청석에 앉은 형과 어머니를 보며 힘을 얻었다. 상황이 불리해도 자기는 무죄를 입증하고 법정을 걸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렇게 풀려나면 다시는 텍사스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물증이 없었다. 지문도, 머리카락도 없었고, 깁슨 변호사는 설득력있게 변론했다. 무엇보다 그는 마리아가 폭행당하던 순간에 카를로스가 자기에게 커비 청소기를 보여주고 있었다며, 그의 알리바이를 증언하는 세 명을 확보했다. 범행은 사건 당일 오후 1시 30분에서 3시 30분 사이에 일어났는데, 그 시간에 카를로스와 만났다는 증인에 따르면 그는 짙은 색의 양복을 입고 있었고, 자기 집에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청소기를 팔러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방문한 집에서 카펫에 세제를 뿌린 후 깨끗하게 청소했고, 성능이 마음에 들었던 그 여성은 그 자리에서 제품을 구입했다. 따라서 카를로스가 피해자를 성폭행했다면, 그는 집으로 돌아가 옷을 바꿔 입고, 차를 바꿔 타고, 피해자를 찾아 도시를 배회하다가 아이를 발견해 납치한 후 벌판으로 데려가 폭행을 한 후 다시 아이를 데려다준 후에 다시 양복을 입고, 차를 바꿔 탄 후에 대리점에 들른 후에 4시에서 5시 사이에 있는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했어야 한다.
훗날 깁슨 변호사는 카를로스의 알리바이가 자기가 변호인으로 참여했던 재판 중에서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 중 하나였다고 했다. 재판이 진행 중일 때 배심원들은 범행 증거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에스텔라는 자기의 의심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다. 다른 배심원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심원 실에 들어서는 순간, 대다수의 생각은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심원의 역할이 단지 종이에 "Not guilty(무죄)"라고 의견을 적는 거라면 어렵지 않았겠지만, 피고의 유죄를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백인 남성 두 사람 앞에서 자기가 생각이 다른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받았던 나쁜 기억들이 되살아 나왔고, 단어를 잘못 말해서 사람들이 비웃을까 겁이 났다. 에스텔라는 테이블 한구석에 앉아서 증거가 충분치 않다는 자기 견해를 이야기했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문제예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몇 시간에 걸친 뜨거운 공방이 있었고, 이제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에스텔라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에스텔라는 사법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유죄임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한 사람의 배심원이라도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펼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 남성은 에스텔라에게 "당신은 세금을 낭비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우리가 먹은 점심은 무슨 돈으로 산 거 같아요?" 이런 공격에 에스텔라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굴복했다.
검찰 측은 재판정에서 강력한 무기인 목격자의 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재판 첫날, 열 살짜리 마리아는 증인석에 엄마와 함께 앉아 증언했다. 아이는 울면서 그날의 일을 이야기했고, 피고석에 앉은 카를로스가 그 범인이라고 가리켰다. 카를로스는 배심원 몇몇이 눈물을 훔치는 걸 봤다. 하지만 그래도 배심원들은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거라고 생각했다. 트라우마를 겪은 어린아이의 2년 전 회상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깁슨 변호사의 변론이 효과를 발휘할 거라 생각했다.
카를로스는 "유죄"라는 평결을 듣는 순간 몸이 굳는 듯했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피고의 변호사는 평결이 나쁘게 나와도 배심원들의 봉사에 감사의 말을 한다. 형량을 조금이라도 적게 받기 위함이다. 하지만 깁슨 변호사는 그들의 평결에 분노했고, 감사 대신 모욕적인 말을 했다. "저는 지난 26년 동안 검사로서, 그리고 변호사로서 수백 건의 재판에 참여했지만, 정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결정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이건 너무나 잘못된 결정입니다. 여러분이 형량을 어떻게 결정해도 여러분의 잘못은 경감되기는커녕 더 커질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반면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종신형을 구형했고, 배심원들은 종신형에서 20년을 추가했다. 카를로스는 손에 수갑이 채워져 끌려 나갔다.
에스텔라는 집으로 가는 내내 화를 억누르지 못해 울고 있었다. 자기가 강하지 못해서 굴복해서 유죄에 표를 던졌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니 그냥 잊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에스텔라는 남편이 경찰인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는데, 경찰이 죄가 없는 게 분명해 보이는 사람을 감옥에 보냈고, 자기도 그 일에 협력한 거다. 그날 밤 에스텔라는 배심원 실에서 오고 간 대화를 곱씹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판 후에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깁슨 변호사가 그 재판에 참여했던 배심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배심원은 에스텔라만이 아니었다. 깁슨은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유죄 평결에 참여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법원에서 보낸 감사장이 도착했고, 기분이 상한 에스텔라는 감사장을 책상 서랍에 던져 버렸다.
내일 발행 될 '에스텔라를 찌른 가시 ④'에서 교도소에 간 카를로스의 이야기를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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