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쉬운 선택 ②
• 댓글 남기기오바마 행정부 때 이란과 맺은 핵협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란의 현대사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란은 20세기 중반 이후로 미국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나라다. 두 나라 사이의 악감정은 한국전쟁이 끝나던 1953년에 시작된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출한다는 간판을 걸고 세계 각국의 정치에 관여해서 미국에 불리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 정권을 세우는 일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런 미국의 노력을 이끈 가장 큰 동기는 경제적 이익이었고, 이는 미국 내 대기업이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펼치는 방식으로 외교 정책에 반영되었다.
20세기 중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동기는 물론 석유였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은 서구의 식민지가 쇠퇴하면서 식민지들이 독립하거나, 새로운 국가를 세우던 시기였고, 많은 나라들 서구의 경제적 착취를 벗어나려고 애쓰던 때다. 이란은 지금도 세계 4위의 산유국이지만, 그때도 대표적인 산유국이었고, 당시 세계 최대였던 아바단 정유공장도 이란에 있었다.
영국은 이란에서 1909년에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라고도 하고, 훗날 지금의 BP가 된다)를 설립하면서 석유 생산을 본격화했다. 이란의 석유를 장악하려는 영국은 이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이란의 왕조를 교체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이란은 석유 생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90%를 영국에 뺏기는 불리한 조건의 계약 아래 있었다.

서구 강대국의 도움을 받는 이란의 왕조가 국부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불만이 쌓이던 중,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정치인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가 등장해 이 구도를 바꾸려 한다. 1951년, 의회의 투표로 총리가 된 그는 1993년까지 유효한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의 계약을 파기하고 자산을 몰수하면서 이란의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다. 모사데크가 주창한 ‘자원 민족주의’는 훗날 중동 산유국들의 기본 원칙이 되었지만, 당시 이를 처음 접한 서구 강대국들은 반드시 잘라야 할 싹이었다.
모사데크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냉전 중에 있던 서구 진영에서는 산업을 국유화한다는 건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모사데크가 이끄는 이란이 소련과 가까워질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석유 산업의 국유화로 이란이 서구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자 실제로 모사데크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상황을 탈피하려고 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긴장한 영국과 미국은 모사데크의 민족주의 정부를 전복하기로 하고,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비밀정보국(MI6)의 주도로 모사데크 총리를 실각시키는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 1953)를 벌였다.
에이잭스 작전의 핵심은 이란의 팔라비 국왕을 따르는 장군의 친위 쿠데타였다. 그 쿠데타의 결과, 모사데크 총리와 그가 이끌던 국민전선의 지도자와 간부, 당원들이 체포되었고, 모사데크가 실각하면서 팔라비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모든 생명줄을 목줄"(Every lifeline is also a leash)이라는 말처럼, 미국의 도움으로 독재 권력을 되찾은 팔라비 왕조는 친미 정권으로 전락했다. 미국과 이란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터레터에서는 과거에도 이란과 관련한 시리즈 글을 몇 차례 게재했다. 이란의 현대사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서구 국가들이 중동 지역에 관여해 온 역사와 그 이후로 이어지는 갈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직 읽지 않으신 독자들은 꼭 읽어 보시길 권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독재자인 팔라비 국왕의 권력 강화를 도와준 1953년의 '에이잭스 작전'이 CIA가 1947년에 설립된 이후 쿠데타에 개입한 첫 성공 사례라는 사실(이후 CIA는 1970년대까지 여러 대륙에서 비슷한 작전을 수행했다)은 미국 정부와 CIA라는 조직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한다. 한국과 같은 제3국에서 보기에도 그럴진대, 자기 눈앞에서 민주주의 정부가 외세에 의해 전복되는 것을 목격한 이란인들이 그걸 주도한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 정부가 가진 의도를 과연 곱게 볼 수 있을까?
그 이후로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계속 꼬였다. 1979년, 이란 국민은 혁명을 일으켜 외세를 등에 업은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운다. '실수로 만든 혁명 지도자'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이때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1979년 말 수도 테헤란에서 발생한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다.
이슬람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린 이란 사람들이 그동안 팔라비 왕조의 뒷배가 되어준 미국에 대해 가진 반감이 컸던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혁명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으로 달아났고, 미국은 사실상 망명한 그를 보호해 줬다. 이에 분노한 이란 국민은 팔라비 국왕의 신변을 인도하라고 요구했고,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에 난입, 점거 시위를 벌이면서 대사관에 있던 66명의 미국 외교관들을 인질로 억류하면서 사태가 시작되었다.
이 인질 사건은 1981년 1월까지 무려 440일 동안 지속되면서 미국인들에게 이란이라는 나라와 이슬람 혁명 세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인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지미 카터 대통령(민주당)은 1980년 선거에서 참패하며 로널드 레이건(공화당)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어야 했다.
1982년 부산에서 일어난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을 포함해 1980년대 초 한국에서는 미국 문화원 점거, 방화 사건들이 자주 일어났는데, 이를 주도한 대학생들은 1980년 광주 학살을 주도하고, 대통령이 되어 독재를 시작한 전두환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묵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큰 틀에서 보면 이란과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20세기 미국의 외교가 낳은 결과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현지 독재 정권을 방조하거나 지지한다는 인식에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란은 언제, 어느 나라의 도움으로 핵 개발을 시작했을까? 역설적이게도 1957년에 미국의 도움으로 시작했다. '에이잭스 작전'으로 모사데크 총리를 실각시킨 후 이란에 친미 정권이 자리를 잡았다고 확신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란이 평화적인 핵 개발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줬고, 1967년에는 테헤란에 미국이 제공한 원자로를 갖춘 핵 연구센터가 들어섰다. 평화적인 핵 개발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이란은 미국, 프랑스, 독일(서독) 등 서구의 묵인 하에 핵무기를 만드는 것도 고려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1979년 이란에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이 망명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대한 서구의 동의와 지원은 끝났고, 198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 때문에 이란으로서는 핵 관련 연구를 진행할 여력도 없었다.
1988년에 긴 전쟁이 끝나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란은 다시 핵발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서구가 아닌, 러시아와 중국이 도움을 제공했다. 이를 본 서구 국가들은 이란이 평화적 핵 개발에 그치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1990년대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세계는 제1차 북핵 위기를 겪고 있던 시점이라 이란의 움직임에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구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2002년, 이란의 반체제 인사들이 이란 정부가 나탄즈에 핵 농축시설을, 아라크에 중수로 설비를 운영하고 있다고 폭로한 것이다. 핵무기를 제조하려는 확인한 서방세계는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란은 EU와의 협상 중에 우라늄 농축 작업을 일시 중단했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2006년에 재개했고, 이를 알게 된 유엔(UN)은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에 들어간다.
2009년에는 이란의 핵 설비인 원심분리기가 웜 바이러스의 일종인 스턱스넷(Stuxnet)에 감염되어 손상, 혹은 파괴되었는데, 이 배후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었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약 1천 개의 원심분리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이란의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미국은 이미 북한의 핵 개발 의도를 꺾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현재 북한은 50개가량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란 핵 개발은 협상으로 막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게 오바마 행정부 때의 일이다.
'손쉬운 선택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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