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자백 ④ 자센의 거래
• 댓글 남기기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벤 구리온(Ben Gurion)은 아이히만을 체포하기 위해 첩보기관인 모사드의 요원을 아르헨티나로 보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건 체포 작전이 아니라 '납치' 작전이다. 인터폴(국제형사경찰)을 통해서 용의자를 체포하는 게 공식 루트이겠지만 각 나라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계산이 복잡하게 얽힌 아이히만 문제를 아르헨티나에 정식으로 알리고 데려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될 문제에 남의 나라 법을 무시하고 납치라는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정치적인 부담은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 일이 큰 뉴스가 되면서 아르헨티나에서는 반유대주의 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훗날 총리가 되는) 외무장관 골다 메이어는 납치를 실행한 사람들이 모사드 요원이 아닌 일반인들이라고 둘러댔다. 첩보요원의 행적이 드러날 경우 "우리와 무관하다"라고 꼬리를 자르는 일은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마침 당시 아이히만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사해서 외딴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모사드 요원들은 그가 사용하는 외진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기다렸고, 어두운 밤에 버스에서 내려서 혼자 걷는 그를 어렵지 않게 붙잡아 이스라엘로 데려올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형무소 하나를 통째로 비워 아이히만을 수용하고 군대를 동원해 철통 방어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자살을 시도할 것에 대비해 그가 있는 방에 감시 인력을 배치해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감시하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검찰총장의 지휘 아래 아이히만 재판 준비에 들어갔다.
자센의 거래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이히만의 증언을 녹음한 빌헬름 자센이 가지고 있던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세에 눈길이 간다. 나치의 종군기자로서 선전선동의 도구였던 사람이 훌륭한 기자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글을 파는 사람이고, 그게 생업임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이히만을 바로 옆에서 취재하게 된 행운을 잡은 자센은 아이히만이 어떤 깜짝 놀랄 발언을 해도 그것을 증거로 남기지 않으면 아무런 상품 가치가 없음을 알고 모조리 녹음을 해두었다.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아이히만의 증언 기록을 돈을 받고 팔기로 한 결정도 마찬가지. 그에게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생업이 나치라는 이데올로기보다 앞선 듯하다. 그런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은 아이히만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녹음테이프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녹음되고 녹취되는 모든 기록은 (외부에 유출하지 말고) 보관해 두었다가 내가 죽은 후에 과학적 연구 자료로 삼기 바란다." 그러면서 자신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고 죽을 때까지 숨어 살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랬던 아이히만이 모사드에 납치되어 이스라엘로 이송되고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자 자센의 계산은 달라진다. 온 세계의 관심이 아이히만에 쏠린 상황에서 그의 솔직한 증언 기록은 자신만 갖고 있다. 그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수집한 자료이니 이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경우 그는 나치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큰 돈 앞에서 위험을 감수한다. 결국 자센은 당시 영어권에서 가장 인정받는 잡지 중 하나였던 라이프(LIFE) 매거진에 인터뷰 내용을 팔았고, 이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4개월 앞둔 1960년 12월에 기사로 발행된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자센은 꽤 많은 돈을 받았고, 고급 벤츠 승용차도 샀다고 한다.
이 기사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그는 나치라는 살인기계의 작은 톱니바퀴가 아니라, 유대인을 증오하고 그들을 죽이려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리더의 한 사람이었다. 4개월 후에 있을 재판을 좌우할 중요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 기사가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었다. 녹음테이프가 없다면? 피고인 아이히만이 그건 글쓴이의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녹음테이프를 찾는 경쟁이 시작된다. 아이히만을 기소하려는 이스라엘 정부는 물론이고, 그를 보호하려는 나치도 자센이 보관하고 있을 게 분명한 녹음테이프를 찾아내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나치 추종자들로서는 홀로코스트는 허위 주장으로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아들을 비롯한 아르헨티나의 나치는 총을 들고 자센의 집에 쳐들어가 테이프의 행방을 물었다. 자센은 끝까지 모른다고 입을 다물었다. 그 테이프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야 자신의 목숨이 보장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럼 문제의 녹음테이프는 어디에 있었을까? 자센은 이를 아르헨티나에 있는 전직 나치 공군장교에게 맡겨 두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번 이 전직장교는 테이프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역할
그런데 아이히만을 법정에서 기소, 처벌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아이히만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과정부터 불법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가 나치였다는 건 이미 증명된 일이고, 그가 홀로코스트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문서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이미 본인도 인정한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적절한 처벌을 할 수 있는데 굳이 그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던 이유가 뭘까?
당시 이스라엘의 검찰 총장이자 이 재판의 검사를 맡았던 기디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재판은 두 개였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진행되는 재판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 여론을 결정하는 재판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재판을 통해 전 세계에 홀로코스트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이는 전쟁 중에 일어난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나치가 세밀하게 계획하고 이행한 악독한 범죄임을 증명하려 했다. 즉, 얼굴 없는 거대한 살인기계가 만들어낸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를 기획하고 진행했음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얼굴을 세상이 똑똑히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히만이 자신은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변호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 아이히만은 그의 주장처럼 그저 유대인들을 실어 나를 기차 편이나 마련한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아직 집권하기 전인 1932년에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해서 내부 승진을 거듭해 온 인물이다. 히틀러는 1933년 집권 직후부터 유대인들을 독일에서 자발적 이민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추방하는 정책을 추진해서 5년 동안 25만 명의 유대인을 국외로 내쫓았다. 당시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43만 7,000명이었으니 절반이 넘는 사람들을 추방한 셈이다. 나치는 같은 작업을 다른 나라에서도 반복하게 되는데 이때 아이히만이 등장한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1938년, 비엔나로 파견된 아이히만은 그곳에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을 추방하는 임무를 맡아 이를 효과적으로 이행한다. 녹음된 그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 1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신속한 임무 수행이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색출 방법을 직접 고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비엔나에 도착한 지 단 6개월 만에 그가 추방한 유대인의 수는 독일이 자국 내에서 5년 동안 추방한 유대인의 수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런 성과는 나치의 눈에 띄었고, 아이히만은 나치 내에서 유대인 처리 전문가로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다.
유대인을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나치의 정책은 1939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추방을 통해 내쫓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유대인들을 몰살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이었고,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이 1941년이다.
처음에는 병사들에게 구덩이로 몰고 가서 직접 총으로 쏘게 하는 방식으로 학살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를 "총알에 의한 홀로코스트"라 부른다. (오터레터에 실린 글 '생명의 은인 ① ②'에 등장하는 우크라이나 바빈 야르 대학살이 여기에 해당한다. '생명의 은인'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나치의 대학살을 역사적으로 연결하는 내용이니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이라고 해도 민간인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병사들에게 정신적인 충격이 심했다. 아이히만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라고 말하면서, 유대인 어린아이를 총으로 쏘아 죽일 때 자기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아이의 머리에서 터져 나온 뇌의 일부가 자신의 옷에 묻은 얘기를 한다. 깔끔하게 죽일 방법이 필요하다는 투였다.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 문화에 총살은 너무나 지저분한 방법이었다는 게 홀로코스트를 연구한 사람들의 말이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이 가스실이다. 아우슈비츠 같은 대규모 수용소에 샤워실 모양의 건물을 만들고 유대인들에게 샤워를 시킨다며 옷을 벗고 들어가게 하고 독가스를 주입해서 죽이면 처리가 쉽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죽일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용소로 보내느냐였다.
나치가 보기에 이런 일에 경험이 많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수행할 적임자는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악마의 자백 ⑤'에서는 왜 이스라엘 정부가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가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일본과 달리 독일은 전쟁 후 나치 처벌에 적극적이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나치의 처벌과 국가의 생존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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