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자백 ③ 나치 사냥꾼
• 댓글 1개 보기나는 누군가를 쉽게 '악마'라고 부르는 것에 부정적이다.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종교적이고 원시적이기까지 한 표현으로 부르는 것은–그 자체로 사회적 처벌 행위라는 것 외에는–인류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은 '악마적인' 일일까? 당시 서구에서 유대인들을 싫어하지 않는 사회가 얼마나 될까?
러시아는 스스로를 소련 시절 나치 독일을 물리치고 유대인을 해방한 나라로 포장하지만 나치보다 훨씬 먼저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던 나라였다. 포그롬(pogrom)이라는 이런 박해와 학살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한 중요한 이유였다. 미국은 어떤가? 미국의 반유대주의 정서는 아주 뿌리가 깊다. 유대인을 구원해 주고, 유대인 이민자를 받아준 나라로 스스로를 묘사하지만 유대인들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대학교 교수진에 쿼터제까지 사용했던 나라다. 지금도 반유대주의 단체들이 수정 헌법 제1조(발언의 자유)를 근거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유대인들을 싫어했고 수백 년 동안 그들을 사회에서 몰아내야 하는 기생충 취급했다. 다만 그 일을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가 독일 특유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행하는 바람에 주목을 받는 것이지, 다른 나라들에서는 차별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고 배워야 하는데 단순히 "악마가 한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을 놓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범죄를 계획적이고 지속적으로 저질렀다면 어떨까? 여기에서부터는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영역에 속한다. 더구나 세월이 흘러 모두가 자신을 지탄하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만한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신의 증오를 주위에 적극적으로 퍼뜨리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악마라고 부르는 것에는 동의하게 된다. 학살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며 남들에게도 이를 설득하는 것은 '선량한 사람을 악으로 끌어들인다'는 악마의 종교적인 정의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빌헬름 자센이 성실하게 녹음해서 남겨둔 아돌프 아이히만의 발언을 들어보면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Devil's Confession (악마의 자백)'이라고 정한 결정을 수긍할 수 있다.
열렬한 인종주의 투사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친나치 언론인이자 나치의 일원이었던 빌헬름 자센조차 홀로코스트를 믿기 힘들었다. 그는 이것이 허위임을 밝히기 위해 아이히만의 증언을 녹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가 행해진 방(자센의 집 거실)에는 아르헨티나로 도망온 나치들이 함께 앉아서 아이히만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자센은 자신이 유럽에서 수입한 책들, 그러니까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난 증거를 모은 책들을 가지고 와서 아이히만에게 보여줬다.
책 속에 등장한 자료(관련 서류)를 살펴보던 아이히만은 기뻐했다. "아주 좋네. 이거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이히만의 직속상관으로 전쟁 중에 암살당했다)의 서명 맞아." 방에 모인 나치들은 우리 편이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아이히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랬다.
"나는 내가 아우슈비츠로 보낸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었어. 죽든 말든 나는 관심 없었어. 총통에게서 명령이 내려왔고, 그 명령에 따르면 일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최종적인 해결책'에 처해야 했으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최종적인 해결책(Endlösung, Final Solution)'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최종적 해결책'을 줄여서 하는 말이다. 나치는 1933년 독일에서 집권한 후로 자국 내 유대인들을 타국으로 내쫓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정책을 펴다가 전쟁이 발발한 후부터 본격적인 몰살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학살, 몰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최종적인 해결책'이라고 돌려서 표현한 것으로, 아이히만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면 아이히만이 이 말을 하는 순간 방 안에는 정적이 흐른다. 그 자리에 모인 나치들에게도 학살 인정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잠깐의 침묵 후에 자센은 "물리적으로 제거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확인한다. (이 대목은 자센이 가지고 있던 저널리스트적 태도를 보여 준다.)
이런 확인 질문에 아이히만은 "내가 한 말이 맞다"라고 인정하고, 방에 있던 누군가가 "이거 안 되겠는데. 우리 이거 하면 안 될 거 같아"라고 말하고 녹음이 멈춘다. 이는 홀로코스트가 나치들 사이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들에게도 충격이었고, 무엇보다 이 녹음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임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행히 녹음은 다시 이어진다. 자센의 저널리스트 근성이 방 안의 분위기를 압도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히만 본인이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때가 1957년이고, 아이히만이 모사드에 붙잡히기 약 4년 전이다. 훗날 아이히만은 이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상했다고 했다고 한다. 학살에 가담한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들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신이 난 듯 빗장을 열고 본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만약 앞으로 두 달 동안 열차 50대가 필요하다, 혹은 어느 도시를 유대인 없는(Judenfrei) 도시로 만들라는 명령을 받으면 (...) 도착지가 어딘지를 확인하지. 그런데 도착지가 아우슈비츠야. 그럼 거기에 직접 가서 내가 상부에서 이런 명령을 받았는데, 너희는 하루에 몇 명이나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 거지." 그냥 시키는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기꺼이 아주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아이히만에게 자센은 "그럼 필요한 기차만 조달한 게 아니었군요?"라고 묻자, "(내가 보내는 유대인들이) 특별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확인시켜줘야 하니까"라고 답한다.
물론 1961년 예루살렘의 법원에 출두한 아이히만이 한 말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자신은 유대인을 수송할 때 그들이 죽게 되는 사람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고, 가혹행위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잡아뗐다. 자신은 베를린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어떻게 알겠냐고 했다. 한나 아렌트를 비롯한 서구의 기자들이 들었던 아이히만의 증언은 이런 거짓말이었고,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녹음테이프에서 아이히만은 점점 거침없는 말을 한다.
"나는 원래 조심스러운 관료(bureaucrat)에 이었는데, 그런 내가 광적인 투사(fanatical fighter)가 된 거야. 나의 혈통, 내가 속한 인종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 내가 조심스러운 성격의 관료이던 시절에는 (진실을 모르는) 장님이었다가 영감이 찾아와 나를 이끈 거지. 내 인종에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은 성스러운 질서이고, 성스러운 법法이야." (영어 표현은 다큐멘터리가 제공하는 자막)
나치 사냥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치들이 모여서 공개적으로 무용담을 나누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를 몰랐을까?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연합국은 연합국대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전쟁에 패한 나치에 신경을 쓸 생각이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찰도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데려온 나치를 체포할 리 없었다.
이런 유리한 상황 때문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던 아이히만이 체포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만만해진 아이히만의 방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숨어있는 나치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존재였다.
먼저 아이히만의 방심. 가족을 유럽에 두고 몇 년째 남미에서 지내던 아이히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을 아르헨티나로 불러들인다. 아르헨티나에서 살던 독일인들은 자녀를 대사관에 데려가 등록을 해야 했는데, 자신은 오토 에크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자식들의 성을 본명 그대로 '아이히만'이라고 등록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대범해진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생각만큼 실제로도 안전했을까? 그렇지 않다.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온 독일인들이 모두 나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가장 뒤늦게 온 소수였고, 그들보다 먼저 전쟁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남미로 온 유대계 독일인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로타 헤르만(Lothar Hermann)이었다. 그에게는 실비아라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이웃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며 아버지에게 그 아이들의 성이 아이히만이라고 알려줬다. 뉘르베르크 재판 등의 뉴스를 통해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헤르만은 "네 친구들의 아버지가 아돌프 아이히만인 것 같다"라고 했다.
헤르만은 곧장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그 변호사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전쟁 후에 숨어 지내는 나치를 추적해서 찾아내어서 '나치 사냥꾼'이라는 별명이 붙은 프리츠 바우어(Fritz Bauer)였다. 바우어는 워낙 유명해서 2015년에는 '집념의 검사 프리츠바우어(Der Staat gegen Fritz Bauer)'라는 영화로도 소개된 인물이다.
헤르만의 편지를 받은 바우어는 아이히만을 독일에 데려와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보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 독일은 나치의 과거를 다시 들춰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측에 알리면 정보가 새어나가 누군가 아이히만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이고 아이히만은 다시 도망해서 잠적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우어의 제보를 받은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작고 가난한 나라였던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당장의 생존이 급한 상황에서 과거의 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바우어는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있다는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겠다며 이스라엘을 압박했고, 그제서야 이스라엘 정부는 아이히만 체포 작전에 들어간다.
'악마의 자백 ④'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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