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자백 ① 아렌트의 착각
• 댓글 남기기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1906년에 태어난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으로, 나치 친위대의 장교였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유명한 이유는 그가 유대인 수백만 명의 강제 수용과 학살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전쟁에 패한 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1960년까지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다가 그의 위치를 찾아낸 이스라엘의 정보부 모사드가 체포해서 재판에 넘겼다. 그의 재판은 당시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고, 1962년 그가 교수형을 당한 이후로도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다.
사람들이 많은 나치 전범 중에서도 아이히만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정치철학자로 유명했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아이히만이 처형된 이듬해에 발간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는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악마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설명을 끝내기에는 너무나 많은 독일인이 잔혹 행위에 가담했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악(evil)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고, 고칠 수 없으면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소개한 개념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재판정에 나온 아이히만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그저 평범한 관료(bureaucrat)에 불과했고, "변태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은" "끔찍할 정도로 정상적인(terrifyingly normal)"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평가였다. 그는 나치의 관료주의 체제 내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려는 동기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악마가 아니어도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고, 아렌트의 결론이었다.
악이 평범할 수 있다는 개념은 20세기에 인류가 스스로에 대해 깨닫고 우리가 몰랐던 사각지대(blind spot)를 발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 비록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명령 체계 안에 있어도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 윤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은 칸트(Kant) 철학에 기반한 동시에 아렌트의 결론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히만 테이프
그런데 만약 한나 아렌트가 내린 결론이 틀렸다면? 아렌트, 아니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을 지켜본 모든 사람이 들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진술, 그들이 목격한 아이히만의 행동이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였다면? 아이히만이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끔찍할 정도로 정상적인" 관료가 아니라, 그 명령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기쁘게 수행한 악마였다면 우리는 아렌트가 내린 결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아이히만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테이프는 그가 모사드에게 체포되기 전, 아르헨티나에 숨어지내는 동안 진술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테이프의 내용은 2022년에 대중에 공개되었고,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개봉되었다.
아래는 '악마의 자백: 사라졌던 아이히만 테이프 (The Devil's Confession: The Lost Eichmann Tapes)'는 이 다큐멘터리의 예고편이다.
아이히만은 왜 하필 아르헨티나를 선택했을까? 약간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인의 아르헨티나 이민은 19세기부터 꾸준히 이어졌고, 독일계는 현재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네 번째로 큰 소수 인종 그룹이다. 독일 이민자들은 1871년에 아르헨티나 내에서 정치단체를 만들 만큼 성장했지만, 1885년과 1차 세계 대전 사이에 대규모의 독일 이민자가 유입되면서 (2차 대 이민) 그 규모가 두 배가 되었다. 이후로도 세 차례의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져서 총 5회의 대 이민이 있었는데, 그중 네 번째는 2차 대전 중에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계와 나치 반대자들이 주를 이뤘다.
마지막 대규모 이민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1950년 사이에 이뤄진 이민으로, 이때 나치와 나치 동조 세력이 집중적으로 아르헨티나에 유입되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Juan Perón, 우리에게는 '에비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가수 에바 페론의 남편)이 있었다. 그는 나치 전범들을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에 비판적이었다. 전쟁에 이긴 나라들이 승자답지 못한 태도를 보인다는 게 그 이유였지만, 페론은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나치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독일에 무기 수출을 추진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독일이 전쟁에 패하자 후안 페론은 유럽 내의 친 나치 세력, 특히 바티칸 교황청(교황 피우스 12세는 히틀러와 긴밀한 관계였다)과 손을 잡고 나치 인사들의 신분을 세탁해서 아르헨티나로 밀입국시키는 소위 "쥐구멍 라인(rattenlinien)"를 만들었다. 악명높은 나치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 요제프 멩겔레 등이 이 루트를 통해 남미에 도착했고, 아이히만도 그렇게 아르헨티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탈출 루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알고 있었지만 2차 대전 직후 강력한 적으로 떠오른 소련과 공산주의에 주목했을 뿐, 이미 패배한 적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히만이 저지른 범죄인 학살 자체가 그다지 널리 알려진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을 제외하면) 세계인의 역사적 상식처럼 된 홀로코스트이지만, 지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치가 유대인을 그렇게 많이, 조직적으로 죽였다는 사실은 전쟁 중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미국과 소련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진군하면서 최악의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렇게 발견한 후에도 홀로코스트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비롯한 일부만 알고 있는 얘기였다. 몇백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해 한번 물어보라. 지금의 튀르키예인 오스만 제국이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 두 번에 걸쳐 자국 내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이었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 1백만 명을 집단 학살한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사실임이 밝혀졌지만,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만큼 모두가 아는 사실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 팩트인 것과 그 팩트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슬픈 일이지만 사람들은 힘 있는 부자 나라 사람들의 목숨을 가난하고 이름 모를 나라 사람들의 목숨보다 더 값지게 생각한다. 우리가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그다지 자주 듣지 못하는 이유는 오스만 제국을 잇는 튀르키예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나라이고 지역의 맹주인 반면 아르메니아는 지도에서 찾기도 힘들어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의 이스라엘이 그런 존재였다. 1948년, 강대국들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독립은 했지만 가난한 제3세계 국가 수준의 꼴을 하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 '악마의 자백'은 홀로코스트가 인류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바로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 재판이었다고 설명한다.
'악마의 자백 ② 남미의 나치 소굴'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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