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표현에 "The right person, the right place, the right time"이라는 게 있다. 문자적 의미로는 어떤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꼭 있어야 할 시간에 있었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가장 완벽한–대개는 상상하기 힘든–조건이 만들어진 경우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2020년, 대중이 크리스천 쿠퍼(Christian Cooper)라는 이름을 뉴스에서 처음 들었을 때는 아무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 반대였다. 피해야 할 시간과 장소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처했던 당시 상황을 보면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날 가능성이 아주 컸다. 흑인 남성이 뉴욕 센트럴파크 내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강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사회적 편견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백인 여성을 홀로 마주치는 상황은 the wrong person, the wrong place, the wrong time일 가능성이 높다. 에멧 틸(Emmett Till, 간략한 설명) 살해 사건부터 '센트럴파크 파이브 (Central Park Five, 간략한 설명)'까지 미국에서는 단지 백인 여성 가까이에 있었다는 이유로 살해되거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일이 아주 흔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쿠퍼라는 이 흑인 남성이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완벽한 사람이라는 건 그날의 사건 후에 일어난 일들, 그리고 그걸 통해 알려진 그 사람의 배경 때문이다. 자칫하면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어느 흑인 남성에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이를 뒤집어 가장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크리스천 쿠퍼였다. 모두가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2020년 여름에 일어난 이 일은 그해 말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 패배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를 만들어 냈다는 건 나만의 생각을 아닐 거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한 번 들어본 적 있고, 크리스천 쿠퍼가 미국에서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가 운이 좋아서 반짝 떴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앤디 워홀이 말한 "15분 동안의 유명세"를 타는 것으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조금 바뀔 거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오기 힘든 결과를 만들어 낸 사람이다.

아래의 글은 미국 공영라디오 프로그램 'Fresh Air'에서 최근에 진행된 인터뷰를 옮긴 것이다. 이해를 위해 가벼운 편집과 설명을 덧붙였다. 방송은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테리 그로스(Terry Gross), 진행자: 2020년에 나왔던 뉴스를 기억하십니까? 센트럴파크에서 한 탐조인(birdwatcher)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여성에게 공원 내에서 야생동식물이 많은 지점에서는 개에게 목줄을 채워야 한다고 말했죠. 그런데 그 여성은 거부했고, 탐조인은 폰을 꺼내서 이때 일어난 대화를 녹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백인 여성은 경찰에 전화해서 흑인 남성이 자신과 자신의 애완견을 위협한다고 허위로 신고했습니다.

그 남성이 오늘 초대 손님으로 모신 크리스천 쿠퍼입니다. 이번에 회고록을 발간하셨죠. 이 책의 첫 챕터는 센트럴파크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고, 그 이후로는 저자가 성장한 1970년대를 배경으로 (쿠퍼는 1963년생이다–옮긴이) 대부분의 탐조인들이 백인이던 시절에 새를 좋아한 젊은 흑인 탐조인으로서, 그리고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 소년으로서, 마블(Marvel)이 지금처럼 주류가 아니던 시절에 만화책을 좋아하던 너드(nerd)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쿠퍼는 하버드 대학교 재학 시절에 커밍아웃하고 성소수자 활동가가 됩니다. 마블에서 일할 때는 회사 내에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처음으로 공개한 작가, 에디터 중 한 사람이었고, 마블 코믹에서–그의 생각에는 아마도–최초의 레즈비언 캐릭터를 만들었고,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데 참여했습니다.

현재 쿠퍼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평범하지 않은 탐조인(Extraordinary Birder)"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오듀본협회(Audubon Society, 미국에서 가장 큰 조류협회) 뉴욕시 지부의 이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번에 발간한 책은 "Better Living Through Birding: Notes From A Black Man In The Natural World (탐조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기: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한 흑인 남성의 기록)"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하실 수 있는 것처럼, 탐조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크리스천 쿠퍼의 책 (이미지 출처: Twitter)

크리스천 쿠퍼 씨, 반갑습니다. 이번에 발표하신 책 첫 챕터의 제목이 "센트럴파크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저는 읽으면서 제가 이 사건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렇게 쓰셨어요. "나는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달리고 있는 흑인 남자다. 나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안다." 그러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고 하셨죠.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뉴스에서 이 사람이 센트럴파크에서 뛰었다는 얘기는 읽은 적이 없는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좀 더 읽어보니 희귀한 새가 근처에서 목격되면 폰에 알림이 뜨도록 해두셨고, 그래서 그 새가 날아가기 전에 보려고 뛰어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책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안다"라고 하셨을 때는 어떤 모습을 말씀하신 건가요?

크리스천 쿠퍼: 추레한 차림(sloppy-looking)의 흑인 남자가 공원을 뛰고 있는 모습이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당시에 차림새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웃음)

이발한 지 오래되어서 머리는 길고, 며칠 동안 면도도 하지 않았고, 입고 있던 옷은 옷장 맨 아래 있던 거였죠. 맨 아래에 있는 건 최소한 빨래를 3주 이상 하지 않았을 때나 꺼내 입는 옷이죠. 그러니까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었고요, 심지어 발에는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탐조를 할 때는 공원을 몇 시간씩 걸어야 하고 진흙탕을 밟을 일도 많기 때문에 좋은 신발을 신고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꼴이 엉망이었죠.

진행자: 그렇군요. 자, 그럼 그날의 일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죠. 그날은 2020년 메모리얼 데이(Memoridal Day, 미국의 현충일로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고, 미국인들이 여름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날이다–옮긴이)였는데, 센트럴파크는 평소보다 조용했죠. 코로나19 때였으니 예년에 비해 탐조 활동도 뜸했겠죠. 게다가 뉴욕은 미국에서 코로나19의 진원지였고, 아직 백신이나 치료약도 없던 시점이죠. 그래서 아마 어딜 가도 마스크를 하던 때죠.

그런데 센트럴파크 내에서 램블(the Ramble)이라는 지점에 계셨다고 했어요. 램블은 센트럴파크의 다른 곳들과 달리 특별한 점이 있나요?

램블은 뉴욕 센트럴파크 한 가운데 있다. (이미지 출처: Google Maps)‌

쿠퍼: 램블은 캣츠킬(Catskills)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볼 수 있게 설계된 곳입니다. 뉴욕시에서 캣츠킬에 가려면 두 시간은 운전해야 하는데 맨해튼 한복판에서 숲이 우거진 장소를 경험할 수 있는 거죠. (캣츠킬은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차를 한참 몰아야 갈 수 있는 지역이지만, 뉴욕시민들에게는 그나마 가장 가까운 숲 지대여서 큰 사랑을 받는다–옮긴이) 나무만 많은 게 아니라 낮은 덤불이 풍성하고, 걷는 코스를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설계해서 눈앞에는 숲만 보이게 해놓았죠. 그래서 램블(ramble: 정해진 코스 없이 걷는 행위)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고요. 그래서 램블이 특별한 겁니다.

이렇게 식물이 많은 데다가 그 사이를 물이 구불구불 흐르게 설계해 놓아서 새들이 많이 모입니다. 숨을 곳이 많고 먹이도 구하기 좋거든요. 흐르는 물이 있으니 새가 물도 마시고 목욕도 할 수 있어서 야생 동물들의 낙원 같은 곳입니다. 라쿤(미국 너구리)도 살고, 코요테가 발견되기도 했어요. 자연의 생태계를 복제할 의도로 설계했으니 온갖 동물들이 모이고, 그래서 새들도 좋아합니다.

진행자: 그런데 개들은 야생동물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목줄을 매어야 하는 거죠?

쿠퍼: 야생동물뿐 아니라 식물에도 좋지 않습니다. 민감한 곳이니까요. 개가 뛰는 걸 자세히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개들이 뛰어다니는 곳에는 풀이 자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들이 끊임없이 뛰면 풀이 뜯겨 나가거든요. 개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개들은 그냥 개들이 하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사람만 밀집한 게 아니라, 반려동물도 밀집해 있습니다. 따라서 목줄을 하지 않은 개들이 마구 뛰어다니면 (램블 같은 민감한) 환경은 견디지 못하고 쉽게 파괴됩니다. 거기에 더해 말씀하신 것처럼 야생동물도 피해를 보는 거고요.

나는 대부분의 개공원이 잔디를 깔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크리스천 쿠퍼의 설명에 따르면 개들이 다니는 곳에서는 풀이 자라기가 힘들기 때문에 흙바닥인 거다. (이미지 출처: Surfside Beach)

진행자: 그렇군요. 그런데 2020년 메모리얼 데이에 쿠퍼 씨께서 그곳에 가셨다가 목줄을 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개를 목격하신 거죠. 그러고 나서 에이미 쿠퍼(Amy Cooper, 크리스천 쿠퍼와 성이 같지만 관련이 없다)라는 여성을 만났고요. 백인 여성이고, 그 개의 주인이었죠. 쿠퍼 씨는 그 여성에게 개에게 목줄을 해야 한다면서 공원에 붙은 안내판을 가리켰다고 들었습니다. 청취자를 위해서 당시 오고 간 대화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쿠퍼: 네, 좀 더 정확하게는 개가 짖는 소리를 먼저 들었습니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가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가 찾으려던 희귀 새가 있을 법한 바로 그 지점을 다니면서 발로 풀을 찢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걷던 오솔길을 가로지르며 만나게 되는 다른 길을 걸어오는 그 여성을 보게 되었어요.

그 장소에 익숙한 저는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개에 목줄을 채워야 한다는 안내문 팻말이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팻말에서 5, 6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더 가지 않고 그 여성이 팻말 바로 앞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 팻말이 있는 건 이런 상황에서 참 도움이 됩니다.

그 여자분이 가까이 오는 걸 보고, 제가 그랬습니다. 죄송하지만 램블에 개를 데리고 올 때는 항상 목줄을 해서 잡고 있게 되어 있다고 말이죠. 저희 둘 사이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들릴 만큼 큰 목소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랬더니 개가 뛰어다닐 수 있는 곳들은 모두 닫혀있고, 우리 개는 운동을 해야 해서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느 쪽으로든 30미터만 벗어나면 램블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럼 목줄을 풀고 마음껏 뛰게 할 수 있다고 했죠.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그렇게 해도 돼요. 그랬더니 그건 너무 위험하다는 겁니다. 램블이 어떤 곳인지 안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주장이죠.

센트럴파크 램블에 붙어있는 푯말. 개에 목줄을 해야 하고, 자전거는 끌고 가야 하며, 길이 아닌 곳은 걷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johnrieber)

결국 그 여성은 듣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고, 그게 싫으면 그건 당신 문제라는 얘기죠. 대화가 그 단계까지 가니까 저도 당신이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하지만 당신도 내가 하려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쩔 거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개를 저한테 오라고 불렀죠.

그 여성은 자기 개는 당신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공원에서 탐조 활동을 35년이나 한 사람입니다. 이런 문제를 아주 오랫동안 겪었어요. 그래서 저는 탐조할 때 애완견 간식을 들고 다닙니다. 연약한 야생동식물이 있는 곳에서 개를 끌어낼 때 사용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그런데 제가 간식을 꺼내자 그 여성의 태도가 돌변했어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던 사람이 분노를 폭발하는 데 0.5초밖에 걸리지 않았죠.

그때부터 사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불안했는지 개의 목걸이를 움켜쥐더니 그걸로 개를 들기 시작했어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제가 개 먹이를 주는 게 싫으면 줄을 채우면 됩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시점에서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진행자: 그리고 나서 그 여자분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했죠? 그런데 쿠퍼 씨는 "네, 전화하세요"라고 말했고요. 왜 그렇게 대응하셨나요?

쿠퍼: 사실 신고하겠다고 위협하기 직전에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빠졌어요. 그 여성이 개의 목걸이를 움켜쥐고 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니 개가 아파하고 있었죠. 저는 개에게 목줄을 하게 하려는 거였는데, 제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걸 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주려던 간식을–아직 주지도 않고 있었거든요–도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제 폰을 꺼냈죠. 개 간식도 먹히지 않는다면 개 목줄을 묶을 때까지 그 여자분이 공원 규칙을 어기는 모습을 녹화하기로 한 겁니다.

크리스천 쿠퍼가 촬영한 영상

'그 남자의 뒷얘기 ②'에서 이어집니다.